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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일 Feb 06. 2025

학창 시절 기억나는 카지노 가입 쿠폰으로부터 배운 삶

요즘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닌다. 언제부터 제도로 정착되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제도를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학교가 공교육이고 학원이 사교육이라는 단어의 탄생도 맞벌이와 무관하지 않다. 집에서 부모님의 정을 느껴야 할 아이들이 학원으로 내몰려 지낸다. 지금의 아이들은 학창 시절을 어떻게 추억할까? 가끔은 궁금할 때도 있다. 누구나 학창 시절은 있다. 좋은 기억도 있을 것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도 있다고 생각한다. 추억으로 간직하기엔 불편한 마음이 있어도 세월이 약이 되어 상처가 덧나지 않고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속에 희미해지기는 하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도 많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우리나라 학제로 보면 12년이다. 나의 12년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에게 왕따 당한 적도 있다. 선배에게는 선배 교실로 불려 가 노래를 불렀던 기억도 있다. 선배에게 몽둥이로 심하게 맞았던 적도 있다. 무슨 사유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수많은 사건 중 지금까지 생각에 남아있는 것은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가장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특히 어릴수록 선생님의 위상은 하늘을 찌른다. 부모님도 자식 버릇 고치기 위해 선생님께 부탁드릴 정도로 무게감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은 김만기 선생님이다. 몸집은 조금 있었지만 키는 작은 편이었다. 아들이 한 명 있었고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으니 40세 전후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건물은 동백산을 뒤에 두고 있었고 운동장은 모래 하나 없는 돌바닥이었다. 입학생이 많아지면서 급하게 지역을 분배해 학교가 설립되면서 우리는 첫 입학생이지만 졸업은 3회 졸업생이다. 1회와 2회 졸업생은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학적을 옮겨 졸업식을 했다. 전쟁 후 10여 년 정도 되었던 때라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학교에도 미국에서 원조해 준 빵조각을 점심시간에 나누어주었다. 빵 배달은 학생 두 명 1조 짝을 지어 인력으로 운반했다. 도로가 나빠 산언덕을 내려가 리어카로 싣고 왔다. 빵은 언제나 나누면 여유분이 있어 남았다. 누구라도 하나를 더 먹고 싶어 군침을 흘렸다. 혹시 기회를 잡을까 청소를 열심히 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바람은 언제나 깨졌다. 학교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선생님 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켜서 오는 건지 자발적으로 먹고 싶어 온 것인지 지금도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그 아이가 오면 남은 빵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가는 것을 우리는 물끄러미 볼 수밖에 없었다. 남은 빵의 희망은 파도가 힘차게 밀려와 바위에 부딪히며 사정없이 부서지듯 사라져 버렸다. 당시 가난하고 어려운 가정환경이었기에 어린 마음에도 상처가 되었다.


‘이다음에 커서 난 저런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중학교 3학년 담임은 김 오기 선생님이다. 당시에 선생님이면 중산층이다. 선생님은 상급 기관의 지시에 충실했었다. 학생의 어려움보다는 자신의 능력이 문제 될까 걱정되는 분이셨다. 학생들의 가정형편은 살피지 않고 세무사처럼 공납금 받아내는 걸 우선으로 삼았다. 지금은 중학교가 무상교육이지만 예전에는 중학교를 입학하려면 시험도 합격해야 하고 공납금도 내야 했다. 가난을 경험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형편과 필요를 알 수가 없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선생님이라면 최소한 자신의 반 아이들의 가정형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난 선생님께는 자기 반이 아니었으면 할 미운털 박힌 학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납금을 제대로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공납금을 제날짜에 내지 않는 건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해”

“계속 이런 식이면 행동 발달에 ‘다’를 줄 수밖에 없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엄마에게 졸라서라도 돈을 가져와 알았지?”

“네” 건성으로라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2년 학교생활에서 치욕적인 ‘다’를 성적표에 받았다. 세월이 흐른 후 선생님은 지역 지원청 교육장을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내 자식에게는 돈 때문에 학교생활에 어려움 겪지 않게 살리라’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은 박영효 선생님이다. 공교롭게도 3년을 같은 사람을 만났다. 반이 바뀌어도 신기하게 운명처럼 만났다. 선생님은 부부 교사로 사모님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 전의 어린 자녀로 쌍둥이였다. 남자아이들이라 말썽꾸러기였다. 선생님은 내게 자신의 아이들 보모역할을 맡겼다. 당시에는 사교육이 발달하지 않았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수업을 시켰다. 대학 예비고사를 많이 합격해야 명문고라는 칭함을 받던 시절이다. 난 야간 자율 학습 담임선생님 시간이면 어김없이 선생님 댁으로 가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가 돌보고 계셨지만 내가 가면 아이들은 고맙게도 잘 따라주었다. 선생님은 내가 교회학교를 지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자율학습이 지루했던 사람으로서는 휴양의 시간이었다. 공부보다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유익하고 좋았다. 공부할 학생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게 한 선생님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 시간으로 인해 인생관이 정립되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 어떤 일이든 시키는 일에 불평하기보다 좋은 마음으로 행한다.’

학창 시절 별별 카지노 가입 쿠폰을 만났다. 인성이 잘못되어 얼굴에 침을 뱉는 분도 있었다. 훈계의 매라는 핑계로 얼굴을 벌게지도록 속풀이 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도 있었다. 인간이라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기엔 너무 심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모든 건 지나갔다.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면 쓴맛이었던 것도 단맛이었던 것도 결국 어떻게 흡수해 생산적으로 발현해냈는가였다. 그들도 시대의 아픔에 피해자일 수도 있다. 아프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당황하게 했던 과거도 있다. 그러나 아픈 과거가 삶의 거름이 되어 당당히 나를 지탱하고 있다. 가난의 고통과 아픔을 알기에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싶다. 자족하려고 애쓰고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도움 되고프다. 그리고 세상에 경제적 가치보다 사회적 목적에 가치를 두고 살았었노라고 이 세상 떠나는 날 인정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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