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카지노 게임 것들은 누구였을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의 영화를 다 보지는 않았지만, <더 랍스터, <킬링디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보면서 그의 팬이 되었다. 세상의 부조리나 비틀린 부분들을 집어내는 관찰력, 이를 재치 있으면서 섬뜩하게 풀어내는 표현력, 그의 영화는 멀리서 봐도 그의 영화인 줄 알 것 같은 특유의 개성과 분위기까지 나로서는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도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무빙 시청을 위해 디즈니 플러스를 보게 된 김에, 드디어 이 <가여운 것들을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린왕자가 생각났다. ‘이건 요르고스가 란티모스가 자신의 색깔대로 보여주는 비틀린 버전의 어린왕자가 아닐까?’하는 해석이 내내 머릿 속에 맴돌았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 극에서 가여운 자는 누구인가? 남들과는 좀 다른, 별난 벨라가 가여운가? 그보다는 감추려고 온갖 포장을 해도 자신의 상처와 어리석음을 가리지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진정 ‘가여운 것들’이 아닌가?
벨라는 빅토리아의 몸으로 살아가는 빅토리아의 딸이다. 빅토리아는 임신 중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고, 이를 발견한 의사 갓윈 백스터는 빅토리아 뱃 속 아기의 뇌를 빅토리아의 머리에 이식하는 충격적인 실험을 진행한다. 그렇게 탄생한 인물이 주인공 ‘벨라 백스터’다. 벨라는 그래서 특이하다. 아기의 몸으로 했어야 할 성장의 과정을 어른의 몸으로 겪으니 말이다. 그런 특이한 벨라를 보는 시선들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시선은 아마 하나였을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 너는 참 안됐다, 카지노 게임 것,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그건 때론 동정이고 연민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를 불쾌한 대상으로 보든, 괴물로 보든, 욕망의 대상으로 보든, 그래도 따뜻한 시선으로 보려 하든. ‘넌 이상하구나, 그러니까 넌 나보다 못한 존재구나’라는 전제를 은연 중에 깔고 본다는 것은 거의 예외가 없었을 것이다. 악의가 없다고 해도 그 불쾌한 시선, 자기보다 밑인 대상을 보며 딱하다는 듯한 그 시선.
극 중 많은 인물들은 카지노 게임를 구슬리기도 하고 가르치려 들기도 한다. 그들은 거만한 태도로 굴지만 정작 카지노 게임의 잠재성을 알아보는 이는 많지 않다. 카지노 게임가 비범한 지능과 뛰어난 공감능력을 가지고, 비록 매끄럽지 않은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눈부신 속도로 성장해 나갈 것을 좀처럼 내다보지 못한다. 그런 통찰력을 가지고 카지노 게임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려 들려고 해봤자 정작 무언가를 카지노 게임로부터 배워야 했던 것은 그들이었다. 카지노 게임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울 용기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겁에 질려 있다. 자신과 자신이 겪은 고통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한다.
생텍쥐베리의 문학 작품 <카지노 게임 왕자에서도 여러 어리석은 자들이 등장한다. 카지노 게임 왕자가 자신이 머물던 행성을 떠나 다른 별들을 탐험하는 과정은, 벨라가 자신이 유일하게 머물던 공간인 갓윈의 집을 떠나 세계 곳곳을 탐방하는 여정과 유사하다. 거기서 여러 군상의 사람들을 만나며 성장을 해나간다는 점도 그렇다.
<카지노 게임에서는 인물들의 어리석음이 좀 더 우화적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직관적으로 그들의 결점을 알 수 있다. 겉을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허세를 부리지만 자신의 실력, 가치관, 존재 자체에 대한 자긍심이 없어 내면이 취약한 허영심 많은 남자, 자기연민과 과거에 대한 집착이라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술꾼, 욕망을 쫓다보니 이젠 자신의 욕망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망각한 사업가 등이 그렇다.
반면 <가여운 것들에서는 현실적인 영화에 비해서는 우화적으로 표현되지만, 어린 왕자에 비해서는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언어로 그들의 약한 면들이 포함된다.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대화를 할 때 자신의 가리고 싶은 면을 가리고 보여주고 싶은 면들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상대에게서 보는걸까. 우리는 타인이 어떤 모습을 감추려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어떤 언어와 억양과 제스처 밑에 어떤 부끄러운 것이 숨겨져 있는지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가여운 것들은 대사, 표정 등의 단서들을 통해 인물의 그러한 면들을 추론하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던컨 웨더번은 말만 번지르르한 자다. 자신이 교제해 본 여성은 수도 없이 많다며, 그래서 자신은 서로 한 상대에 집착하는 것은 선호하지 않는다며 허세를 부리지만, 카지노 게임에게 접근하는 남성들을 견디지 못해 그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한다. 그는 카지노 게임의 성장을 도울 듯이 말했지만 그녀가 진짜 성장해 자신이 원하던 모습에서 멀어지고 통제 밖의 영역으로 가는 것 같다고 판단되자, 그녀가 읽던 책을 바다에 집어 던지는 추태를 보여준다. 그는 세상을 모험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배에서 술과 도박에 쩔어 살다가, 돈 없이 파리에 떨어지자 어떤 생활력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는 그 대신 돈을 벌어 온 카지노 게임보고 몸을 판다며 천박하다는 뉘앙스로 그녀를 비난하지만, 정작 머리에 든 내용물이 천박한 것은 카지노 게임가 아닌 그다. 극 초반 상류사회가 영혼을 파괴한다는 그럴싸한 말로 카지노 게임를 꾀어냈지만 정작 그의 영혼은 성숙하지 않다.
해리 애슬리는 똑똑하지만 허무주의에 빠져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 자다. 극 중에는 ‘냉소주의자’, ‘비관적이다’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내 견해로는 허무주의가 더 적합한 표현 같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 멈출 줄을 모르고 쏟아지는 비극들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그리고 그카지노 게임을 미리 다 예방할 수도, 추후에 다 해결할 수 없기에 세상에 별 의미 있는 일은 없다는 허무함. 난 해리가 이런 감정들에 압도된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난 그의 의견 일부는 인정한다. 아니 공감한다. 한 개인이 돕고 싶은 이들 모두를 도울 수 없고, 세상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다 막을 수도 없다. 이상주의는 현실 위에 서야 한다. 그래야 말뿐이었던 무언가가 되지 않는다. 그는 똑똑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다. 통찰력 또한 좋다. 하지만 그 뛰어난 지성의 힘을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쓰지는 않는다. 그는 늘 세상 밖으로 물러난 태도로 정적으로 군다.
그 이유를 카지노 게임는 간파한다.
“이제 당신을 이해할 것 같아요, 해리. 세상의 고통에 꺾여 버린 꼬마일 뿐이죠.”
사실 해리 애슬리 같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는 누구보다 큰 이상주의가 있는 것 아닐까? 좌절의 크기만큼 신념은 큰 각도로 꺾이게 되는 것처럼 느껴져 씁쓸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가 그런 사람이어서 카지노 게임의 피드백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럴지도요”라는, 그 다운 간결한 멘트와 함께.
해리 애슬리와는 달리, 카지노 게임는 자신부터 한 걸음 내딛여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둘 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지만, 그게 둘의 행동력을 가르는 차이점이 아닐까 싶었다.
여담으로 카지노 게임가 해리의 객실을 찾아갔던 장면에서, 카지노 게임의 대사가 인상 깊었다.
“난 잔혹해지고 싶지 않아요. 이런 내 모습을 발전시키고 싶어요.”
세상 모든 것은 사실 양날의 검이다. 절대적으로 좋고 나쁜 건 없다. 어떻게 발전시키고 활용하느냐의 문제이다. 카지노 게임는 자신 내면에 끓어오르는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지도 억누르지도 않는다. 다만 이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를 고민한다. 개인적으로 칼 융의 그림자 이론을 좋아하는데, 이런 카지노 게임의 태도는 자신의 그림자를 잘 마주하고 활용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빅토리아의 남편은 소통할 줄 몰라 불행한 자다. 그는 권력에 취해 우월감과 일시적 쾌락을 느끼지만 그다지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그는 힘의 논리에만 수긍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힘과 권력을 기반으로 타인을 멋대로 통제하려 든다. 문제는 이 때문에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그 소통의 기쁨을, 관계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하인을 상대로 인간적인 소통이나 교감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인은 무례하고 폭력적인 그를 싫어한다. 더 큰 문제는, 그런 태도가 그의 가장 큰 불행의 이유인 빅토리아의 도망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성숙한 사랑이 아닌, 카지노 게임 아이가 가질 법한통제욕과 소유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그리고 나아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만나게 된 그의 딸 벨라도 그를 싫어하게 된다(그는 계속 빅토리아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많다고해서그가 행복한 것도아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하나하나를 다 용납하지 못하니까 말이다.결국 끝까지 폭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려던 그는 역으로 당해서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벨라는 결국 돌고 돌아 갓윈과 맥스 곁으로 돌아온다(정확히 말하면 돌아왔다 떠났다 다시 돌아온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자신은 성장했지만, 여기서의 삶이 가장 좋다면서 말이다. 여기서 맥스를 카지노 게임 왕자에서 장미와 같은 존재로 해석해야 할 지 생각해보면(…), 카지노 게임 왕자의 낭만적이면서 아련한 색채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기발하고 기괴한 색채가 대비되어 웃음이 터져나온다. 어쨌든 긴 여정을 지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돌아간다는 구조는 비슷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인물은 갓윈 백스터다. 맥스는 내 시선에 딱히 카지노 게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갓윈 백스터는 상당한 실력을 가진 의사이자 과학자지만, 그는 내면의 결핍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극 중에서 ‘이제 아버지가 이해된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는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를 받아들이려는 그만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바로 합리화이다. 아, 의사이고 과학을 하는 사람이라 그랬구나, 이유가 있었구나, 그럴만 했겠구나 하고. 그래서 그는 ‘나는 과학자로써, 의사로써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어떤 감정 때문이 아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말도 자주 한다. 어쩌면 그가 받은 일종의 학대가 의학과 과학의 분야에서는 그럴만한 일이고, 그렇기에 그게 별 일이 아니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게 충격을 줄이기 위해 선택의 나름의 방식이었을지는 몰라도, 정말 제대로 마주하고 털어내는데 효과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정말 제대로 털어냈다면 그렇게 합리화하는 언어들을 자주 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벨라는 사실 갓윈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고통의 대물림으로 탄생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갓윈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리움과 사랑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그리고 비인간적이고 잘못된 것들은 잘못된 것임을.
결말을 어떻게 봐야할 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맥스와 같이 길을 걸으며 결혼을 약속하던 장면까지 느끼던 감정선이 산산이 깨졌기 때문이다. <어린왕자와 비슷한 이야기를 해도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역시 요르고스 란티모스다. 여러 위기들을 지나 마냥 훈훈한 결말로 가나 싶었지만 그의 영화는 역시 그렇지 않았다. 남편을 죽일수는 없다고 해서 어떻게 하려나 싶었는데 바로 다음 컷에서 염소를 비추길래 바로 입틀막하고 봤다(난 사실 이쯤되면 란티모스가 무섭다). 응징의 방식으로 택한 것이 그 방식이라는게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어쨌든 그런 충격적인 마지막 씬은 논외로 하고, 그 앞 과정들만 봐도 꽤 느낀 것이 많은 영화였다.
극 중 ‘카지노 게임 것들’은 자신의 감추고 싶은 것들을 가리기 위해 그 위에 강한 척을 덧바른다. 하지만 그 중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벨라보다 지혜로워 보이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 극 내에서 이런 양상들을 반복해서 보다 보니, 자기 내면의 고통, 생각, 신념도 중요한 가치들이지만, 자신한테만 끊임없이 몰두하는 것은 오히려 내적 성장을 저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내면에 일단 솔직하다면, 나아가그 밖의 세상과 존재들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는 게 어쩌면굉장히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벨라에게 중요한 성장의 발판이 되었으니 말이다. 자기 연민의 ‘가여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타인을위할 줄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 부분에서 떳떳하지 않았던 적이 많아 반성도 많이 하게 된다. 스스로를 ‘카지노 게임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기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계속 고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