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너무도 사랑했는데....
난 어려서부터 카지노 게임를 엄청 많이 좋아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지만....
내 눈에 우리 카지노 게임는 참 곱고 예뻤다.
사실 나는 오 남매 중 넷째라 젊은 시절 카지노 게임의 모습은 기억이 없고 나이 든 카지노 게임의 모습인데도 내 눈엔 그랬다.엄마는 도자기 피부여서 세수만 해도 뽀드득소리가 났다.
초등학교 1, 2학년때는 학교가 재미없어서 공부도 안 했다. 그러다 3학년초에 시험 성적이 우수하게 나왔다는 말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는 카지노 게임모습을 보고 "공부를 해야겠다. 우리 때문에 힘든 카지노 게임 인생을 좀 기쁘게 하자!"라 생각하고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을 해 항상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어쩌다 성적이 떨어지면 카지노 게임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카지노 게임 고생하시는데...
한 번은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여러 가지 장신구를 싣고 가는 리어카 아저씨를 보았다. 브로치들이 있었는데 우리 카지노 게임 저고리에 하면 참 예쁠 것 같은 분홍색 벚꽃 브로치가 있어 돼지 저금통을 깨서 그것을 사서 "카지노 게임! 이거 해~예쁘지?"
카지노 게임가 참 기뻐하셨다.
아마 지금 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사본적도 없고 어렸으니보는 눈이 있을 것 같지 않다.
평상시 카지노 게임는 늘어지고 구멍 나려 하는 헌 속옷에 늘 입던 옷에 늘 그랬다.자식이 먼저고 자신에게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어쩌다 카지노 게임가 시장에서 자투리 천을 사다 새 옷을 만들어 입으시면 내 눈에 카지노 게임는 너무 예뻤다.
난 카지노 게임냄새도 좋아해 심심하면 뒤에서 카지노 게임를 끌어안고 코를 대곤 했다.참 포근했다!그 무엇도 줄 수 없는 행복감!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카지노 게임가 65세였다.
내가 공부를 끝내고 오다 보면 잘못하면 카지노 게임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눈물이 나도 모르게 줄줄 계속 흘렀다. 그때는 나라도 어렵고 해서 학위를 받은 후에야 귀국을 했지 중간에 나오기가 어려웠다.돈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꾸 울자 그때 내 옆 좌석 서양 아저씨가 어찌할 줄 몰라하며"May I help you?"
지금 생각하면 그 아저씨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참 미안하다!다시 보면 사과하고 싶다.
그러면서 독일을 갔다.
그때는 국제 전화가 비싸서 전화도 잘 못했는데
공중전화로 하면 비교적 쌌다.
5마르크(6000원 정도) 동전하나면 3분을 할 수 있어서 매주 동전을 모아 전화를 걸었다.토요일이면 카지노 게임의 안부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카지노 게임를 못 보는 대신 그렇게 버텼다.
통화내용은 서로 아무 일 없이 잘 있다는말이다였다.다른 말을 할 시간은 없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내가 아들을 낳자 카지노 게임는 "이젠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셨다.
결혼 후 아이가 없자 카지노 게임는 불임인 줄 알고 걱정을 많이 하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잘 지내던 어느 날 카지노 게임가 고관절이 부러지셔서수술 후 퇴원을 잘하셨는데 3일 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자다가 꿈속에서울었다.
꿈속에서 우는데도 볼에 진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 잠에서 깼다. 그러기를 1년이나 그랬다.
그래서 정신과도 다녔다. 애도증이란 말을 들었고
시간이 흘러야 한다고 했다.
잊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자다 울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카지노 게임한테 "카지노 게임! 사랑해!"란 말을 못 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
당연한 말이라 안 했던 것이고 알거라 생각해서 안 했는데이리 후회될 줄 몰랐다.
한 번만이라도 할걸,
쑥스럽더라도 할걸~
이 생각이 들면 또다시눈물이 난다.
이 눈물은 끝이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