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색 유인원 시아 Jan 13. 2025

작별하지 카지노 게임 마음의 윤리학에 대하여

플라뇌즈

-한강 작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이 멎는 듯하다.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하기 전 숨을 흉통 가득 채우는 의례와 같다.그리고 한강은 이 질문들을 뒤집어 나에게 다시 던진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 두 쌍의 질문들은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며, 시간과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한다.

카지노 게임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이 있다. 수천수만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는 그곳에서, 각각의 나무 뒤로 무덤의 봉분들이 이어진다.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우리는 묻는다. 왜 이런 곳에 무덤들을 썼을까. 이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시작된 자리다. 꿈과 현실이 교직 되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하나의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죽은 자들을 기억해야 하는가.

얼굴 없는 자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레비나스는 말했다.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나를 죽이지 말라"는 첫 번째 말을 건넨다고. 그러나『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이미 죽음을 당한 자들의 얼굴이다. 차가운 겨울 눈 속에서 녹지 않는 얼굴들. 그들은 이제 두 번째 말을 건넨다. "나를 잊지 말라."

소설 속 정심은 이 두 번째 말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이다. 사랑하는 이의 뼈 한 조각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 그녀의 삶은, 레비나스가 말한 '무한책임'의 가장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감각이다. 죽은 자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완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영원하다. 마치 별빛이 우리에게 도달할 때쯤이면 이미 그 별은 사라졌을지 모르되, 우리가 여전히 그 빛을 향해 손을 뻗는 것처럼.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그 질문들이, 어느 순간 가능의 영역으로 건너온다. 우리가 상상했던 시간의 흐름이 뒤집히는 순간이다. 과거는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고, 죽은 자들은 살아있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숨 쉰다.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의 입을 통해 다시 울리고, 그들의 꿈은 우리의 걸음을 통해 다시 걸어간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예술의, 그리고 사랑의 힘이 아닐까. 시간의 화살을 거스르는 상상력의 힘. 죽은 자들이 우리를 통해 다시 말하고, 과거가 우리를 통해 현재가 되는 기적. 한강의 소설은 바로 그 기적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유령들과 함께 춤추는 시간

데리다는 애도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애도는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작별하지 않을 것이다. 작별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파도가 끊임없이 해안을 치고 물러나고 다시 치는 것처럼, 기억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돌아온다.

소설 속에서 1948년 제주의 겨울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유령처럼 현재를 배회하며, 우리의 시간 감각을 교란한다. 경하와 인선이 그 깊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망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현재진행형의 부재다. 영원한 현재로 우리를 호출하는 타자들이다.

"
폭력에 훼손되고 공포에 짓눌려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
<본문 내용 중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간절한 기도와도 같은 구절은 소설이 도달하는 윤리적 지평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한 개별자들의 우연한 조우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차원의 연결성이다. 마치 촛불이 다른 촛불을 밝히듯, 심장이 다른 심장을 울리듯.
소설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라는 질문과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품는다. 이 모순적인 두 질문은 실은 하나의 더 깊은 물음을 향한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한강은 쓴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이는 단순한 창작 방법론의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 개념이나 관념이 아닌, 살아 있는 몸을 통해 타자의 고통과 기쁨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치 촉각이 세상의 질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선언의 몸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문장들은 그렇게 하나의 감각적 카지노 게임을 써 내려간다. 차가운 겨울 바다에 몸을 담그는 듯한 문장들, 검은 통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 같은 문장들, 촛불 앞에 무릎 꿇은 이의 떨리는 손길 같은 문장들이 우리를 타자의 현존 앞으로 인도한다.

끝나지 카지노 게임 시작을 위하여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깨닫는다. 과거는 현재를 도울 수 있다고. 죽은 자는 산 자를 구할 수 있다고. 그것은 단순한 위안이나 희망이 아닌,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윤리적 실천의 현장이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의 삶은 현재 속에서 계속되며,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울린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근원적인 구원의 형식이 아닐까.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이 아님을. 그것은 끝없는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매 순간 타자를 새롭게 기억하고, 매 순간 사랑을 새롭게 시작하는 영원한 현재의 카지노 게임.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선물이다.
구체적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의 고통과 사랑을 통해 타자성의 윤리와 애도의 불가능성이 어떻게 육화 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여전히 그 벌판을 걷고 있다. 검은 통나무들 사이로, 무덤의 봉분들 사이로, 밀려오는 바다를 향해.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여정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선택한 사랑의 형식이기 때문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