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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 유인원 시아 Mar 30. 2025

영화 [디 벨레] 그리고 10대 극우놀이




전체주의는 어떻게 부활하는가


1.

영화 {디 벨레}가 던지는 자유와 권력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해 요즘처럼 많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듯하다.

잔혹한 독재의 체제들이 가져왔던 고통과 절망을 오래된 역사책 속 이야기로 치부하고무딘 감각으로 지내 온 것 같기도 하다. 마치 현재의 민주주의 사회무료 카지노 게임 그런 비극적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놀랍게도 전체주의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곁에 늘 잠복해 있다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는, 잠재적 위험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징후를 얼마나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한 번 얻어지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과 갱신이 필요한 불완전한 시스템이다.


이야기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독일 영화 [디 벨레(Die Welle, 200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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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 벨레]는우리가 그토록 신뢰하는 민주주의 속에서 전체주의가 어떻게 조용히 스며드는지, 우리가 얼마나 순진한 착각 속에 있는지를 섬뜩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1967년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서드 웨이브(The Third Wave)’ 실험을 소재로 한다. 당시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스스로 파시즘적 권위주의 체제에 복종하게 된 과정을 독일이라는 민주주의 사회로 옮겨와 재현했다. 민주주의가 확립된 사회에서도 독재와 전체주의가 얼마나 쉽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안일한 착각 속에 사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독일의 한 고등학교,뱅어라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독재의 위험성을 알리는 수업을 진행하려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나치 독일의 문제점에 대해 지겹게 들어왔던 학생들은 뱅어의 수업 내용이 지루하다면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뱅어는 학생들에게 독재 권력이 나타나게 되는 과정을 직접 체험시켜 주기로 한다. 먼저 뱅어는 다수결로 교실의 대표를 정하자고 제안한다. 투표 결과 뱅어가 대표로 선출된다. 그 후 뱅어는 대표의 자격으로 프로젝트 수업을 위한 세 가지 규칙을 정해발표한다.


첫째, 수업 중에는 대표가 호명한 사람만 대답할 수 있으며, 발표자는 일어서서 대답한다.

둘째, 흰 셔츠와 청바지 같은 단체복을 입는다.

셋째, 수업 중에 명령하면 모두가 일어나서 행진을 하듯 발을 맞추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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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이 생기자 교실 내에서 집단행동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 학생은 곧바로 배척당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은 대표의 권위에 더욱더 복종하는 동시에 정치집단이 된 것처럼 행동했고, 스스로를 ‘디 벨레(Die Welle)’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마치 나치식 경례 같은 인상을 주는 독특한 경례를 만들어 냈고, 디 벨레 경례를 하지 않는 학생들은 교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국 학교는 ‘디 벨레 학생들’과 ‘비(非) 디 벨레 학생들’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뱅어는 학생들을 모두 강당에 모이도록 했다. 그 자리에서 뱅어는 이 자리에 조직을 배신한 학생이 있다면서 영문도몰라하는 한 학생을 강단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몇몇 디 벨레 학생들이 배신자로 지목된 학생을 강단으로 데려왔다. 이를 지켜본 뱅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재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고는 공식적으로 디벨레의 해체를 선언하며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는 평범한 학생들이 스스로 투표를 통해 대표를 세우고 강한 집단주의적 동일성을 추구하며 권위적 체제에 순응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그려낸다. 문제는 그것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디 벨레]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개인의 내면에 조용히 침투하고 정치적 삶을 소멸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충분히 자리 잡았다고 믿는 사회에서도 전체주의가 얼마나 손쉽게, 또 빠르게 뿌리를 내리는지 무섭게 그려낸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독일무료 카지노 게임 다시 독재가 가능할까?"
학생들은 비웃듯 말한다.
"말도 안 돼요, 그럴 리 없어요."



영화 속에서 실험이 시작되었을 때, 학생들은 처음에는 장난처럼 참여했다.
그러나 실험이 지속되면서 개인의 자유는 점차 축소되고, 강한 동일성 속에서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여졌다.


교사의 제안은 수업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규율이 만들어지고, 상징이 생기고, 옷차림이 같아지고, 구호가 등장하자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아이들은 한 집단으로 강력히 결속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생각은 사라졌다. 자신들이 동화되는 과정에 대해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선택했다고 믿으면서도, 실은 하나의 전체 속으로 포섭된다.


영화 속 학생들이 집단의 규율에 쉽게 동화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남의 나라 아이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치부해 버리기엔 영화는 너무나 묵직한 질문을 섬뜩하게 던진다.


한나 아렌트의[인간의 조건]을 비춰보면 개개인이 각자를 드러낼 수 있는 공적 공간이 사라진 결과라 볼 수 있다.아렌트는 이러한 공적 영역의 축소와 정치적 삶의 소멸을 예리하게 경고했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인간은 홀로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없으며, 자유 역시 사적인 영역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함께 토론하고 행동하면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적 행동이 경제적 이익의 실현이나 생존 수단으로 환원되면서,사적 존재로 철저히 고립되었다.


이와 관련해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제기한 공적 영역의 소멸과 정치적 삶이 위축된다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한나 아렌트가말한 "공적"이란 우리 모두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세계, 사적 소유와 구별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생각을 드러내고 상호작용하는 존재 표현의 장을 말한다. "공적"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정치적 행위에 의해 창출되는 공간이다. "공적"이라는 용어는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이고 그것은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는 공통의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모여 말로 하는 행위에서 서로의 생각이 다름을 드러내고 공유하며 상호작용함으로써 각자의 존재감을 표현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녀의 사유무료 카지노 게임 정치적 행위란, 인간의 개별성이 이 공적 영역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자신을 표현하며 서로를 인정하는 과정을 뜻한다.

세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마치 탁자가 여러 사람을 결집시키고 관계 맺게 하는 것과 같이, 개인들을 결집시키고, 분리하는 힘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또 하나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으로 중요하게 제시한 것은 ‘복수성(plurality)’ 개념이다. 그녀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노동, 인간의 삶과 연관된 보다 항구적인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작업, 그리고 인간이 모두 다르다는 복수성 혹은 다원성의 사실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행위가 그것이다.


인간의 복수성의 나타남은 언어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언어 행위는 그 하나로 일종의 행위이다. 언어가 동반되지 않은 행위의 경우 언어를 통해 그 행위가 갖는 고유한 특성과 의미가 설명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개인의 독특성의 드러남은 언어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아렌트는 "언어의 기능과 인간의 복수성이라는 사실은 상호 대응한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의 공적 영역에서는 정치적 행위가 표현과 소통의 계기를 내재하고 있는 언어 행위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지만 어느 누구도 이제껏 살아온, 현재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누군가와 동일하지 않다. 이 다름이 정치의 조건이며, 각자의 고유한 빛깔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 곧 정치적 행위의 핵심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적 삶은 개별적 존재들이 서로를 인정하며 공통의 세계 속에서 함께 의미를 창출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는 개인이 사적인 영역에서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행위하고 말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정치적 행위란 이러한 개성이 형성되고 드러나게 되는 행위이며, 정치 영역이란 이런 행위를 통해 자기 현시를 이루어내는 장을 말한다.


자유란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공적 영역은 점점 경제적 효용이나 생존, 소비라는 목적만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공적 영역의 자리가 경제적 논리로 채워지면서 정치적 삶은 위축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할 공간을 상실한 채 철저히 사적이고 고립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개별적 삶이 공적 장에서 표현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때, 인간은 존재의 근본적 의미를 잃고 내면 깊이 공허와 혐오를 느끼게 된다.


전체주의는 이 공적 영역의 빈자리를 파고든다. 영화 [디 벨레]가 경고한 것처럼, 우리의 자유는 언제든 다시 빼앗길 수 있다. 문제는 누군가 우리의 자유를 강제로 뺏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주의는 언제든 평범한 얼굴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나치 관료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아이히만은 특별히 악마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지적 교양을 갖춘 명령에 충실한 고급 공무원이었다. 악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영화 속 학생들도 비슷하다. 그들은 특별히폭력적이거나 나쁜 의도가 있지 않았다.집단의 규칙에 성실히 따랐고, 동료들이 하는 일을 함께 했을 뿐이다.


악이 평범한 얼굴로, 성실한 태도로 찾아오는 순간이 바로 이때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할 공적 영역이 경제적 이익의 실현이나 생존을 위한 수단에 관한 의제로 대체되었다.


이렇게 공적 영역이 소멸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공간을 잃고 결국 집단적 체제의 질서에 순응하게 된다. 영화 속 학생들이 ‘우리’라는 이름 아래 집단의 규율에 쉽게 동화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인의 존재 의미를 찾을 공적 공간이 없어진 자리에 권위주의에 예속된 집단적 동일성이 자리 잡는 것이다.


공적 영역이 붕괴될 때, 인간은 더 이상 스스로 의미를 형성하지 못하고, 동일성을 공유하는 구조 속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찾는다. 학생들은 집단에 귀속됨으로써 집단의 안과 밖의 경계를 의식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점차 집단적 동일성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고무하면서 예속을 부추기는 자율성을 획득하려고 했다.


이 틈 사이로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인간을 경제적 개체로 더욱 축소하며, 이를 방해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공적 영역이 사라질수록, 인간은 더욱 고립되고, 그 고립이 존재의 불안을 심화시킨다. 영화 속에서 학생들이 강한 집단적 정체성에 매혹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을 덜어줄 수 있는 유일한 질서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사회무료 카지노 게임는 아렌트가 말한 정치행위는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공적 토론과 협력은 줄어들고, 사람들은 개인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살아간다. 우리는 소비할 때만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시장의 소비시스템이 연출하는 허구적 세계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개인의 경제적 선택으로 환원한다. 그 결과 자유가 단지 소비나 취향 선택으로 변질되어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착각하면서도 주어진 질서 속에서 제한된 선택지만을 고른다. 영화 속 학생들이 느꼈던 강력한 집단 정체성은 바로 신자유주의가 만든 소유적 자유와 능력 위주 사회(meritocracy) 그리고 규율의 합작품이다. 결국 우리가 각자의 경제적 선택만을 자유라 여길 때, 전체주의적 유혹은 언제든 쉽게 찾아올 수 있다.








전체주의는 어떻게 부활하는가


2.

지금, 한국의 10대들은 왜 극우 놀이에 빠지는가?


한국의 10청소년들 사이무료 카지노 게임 이른바 ‘극우 놀이’가 유행이라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청소년들이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무료 카지노 게임군사독재 시절을 찬양하거나, 소수자 혐오 발언의 밈들을장난처럼 일삼는다는 것이다.태극기와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구호를 외치며역사의 아픈 기억이나 피해자의 상처를 농담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 디 벨레의 10대 청소년들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 [디 벨레]의 학생들이 처음 독재의 상징들을 장난처럼 소비했듯, 지금 한국의 청소년들 역시 극단적인 정치적 상징과 언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거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재미였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을 결속시키는 강력한 도구로 작동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한나 아렌트가 경고한 ‘악의 평범성’이 재현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별다른 죄책감 없이 폭력과 혐오에 동참하게 되는 무서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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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의 청소년들이 이런 극단적이고 위험한 놀이에 빠져들었을까?


한국의 청소년들이 극우 놀이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의 본성을 타고나서도, 특별히 폭력적이어서도 아니다. 영화 속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공적 영역에서 건강한 방식으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질문의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성적 경쟁만이 존재하고, 사회에서는 경제적 성공과 소비 욕망만을 강조한다. 정치적 토론과 가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 사회는 극단적인 성공주의를 강요하며, ‘승자’와 ‘루저’를 뚜렷하게 구분 짓는다. 오로지 경제적 성취만이 삶의 기준이 되고, 이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무가치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그러니 이들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쉽게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상징에 손을 뻗게 된다.

무한 경쟁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은, 필연적으로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낳는다.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왜곡된 ‘공정성’을 내세워 사회적 약자들에게 손가락질하며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공정성’은 사실 정의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이 겪고 있는 불안과 좌절의 책임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리는 것일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식이 완전히 뒤바뀐다. 본래 약자와 소수자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고 있지만, 극우 놀이에 빠진 청소년들은 이들을 ‘특혜를 누리는 가해자’로 여긴다. 자신들이 피해자이며 억울한 존재라고 느끼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것이 바로 혐오가 자라나는 메커니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의 미시권력이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경쟁과 두려움 속에서, 청소년들은 개별화되어 외롭고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SNS라는 공간을 통해 전체화된 극단적 상징으로 서로를 결속하며 일종의 ‘미시 파시즘’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개별화와 전체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매우 역설적이면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현재 한국의 입시 중심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낸 ‘사유를 가로막는 동일성’의 문제도 지적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국가교육과정은 그것의 성취에 도달하기 위해 정답을 찾도록 요구하며,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는 불필요한 시간낭비로 여긴다. 또한 입시 교육은 아이들의 사고를 단순화하고 동질화시키며,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을 박탈한다. 결국 아이들은 쉽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집단의 논리에 동화되는 존재로 길들여진다.


그러나 이 현상은 단지 몇몇 청소년들의 일탈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역사적 악몽이 언제든 다시 깨어날 수 있음을 예고하는 조용한 진동이다. 혐오가 유희가 되고, 폭력이 놀이로 둔갑할 때, 우리는 언어의 탈구 속에서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한 얼굴의 틈 사이로 스며든 자기모순의 연기이며, 그 안갯속에 우리는 누가 주권자인지조차 더는 명확히 알 수 없게 된다.


20세기 총체국가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외형을 갖추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 전체를 하나의 의지 아래 포섭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자체가 독재적 기제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이른바 ‘통치자와 인민의 의지의 동일성’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면, 그 동일성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써의 강제, 검열, 배제, 동원의 장치들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이때 민주주의는 자유의 수호자가 아니라, 자유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이 개념을 현실 정치에 적용해 보면, 민주주의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일시 중단시키는 구조, 곧 ‘자기 해체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청소년들의 극우 놀이는 이러한 총체적 상황의 축소판이며, 신자유주의적 교육 시스템, 혐오의 메커니즘, 사유의 중단, 민주주의의 자기 파괴적 본질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칼 슈미트는 이러한 정치적 모순을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라는 두 개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위임적 독재는 기존의 헌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예외적 권력의 행사이며, 체제를 지키기 위한 임시 조치이다. 반면 주권적 독재는 헌법 질서를 근본적으로 중단시키고,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구성하기 위해 예외 상태를 선포하는 결정권자의 출현을 의미한다.

슈미트에게 있어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며, 이때 정치란 결국 질서가 중단된 상태에서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 선언은 법의 바깥에서 내려진다. 법을 중단시키는 결정을 내리는 자, 곧 질서 자체를 창조하는 자다. 그는 단순히 위기에 대응하는 "위임자(kommissarischer Diktator)"가 아니다. 그는 세계의 규칙을 다시 쓰는 자, 질서를 넘어선 결단의 목소리, 곧 "주권적 독재자(souveräner Diktator)"다.


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혹은 작동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되는 순간, 질서를 유지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해 ‘예외’를 선언하는 존재가 주권자다. 중요한 것은, 이 선언은 법 안에서가 아니라 법 바깥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예외를 결정하는 자는 곧 법을 ‘중단’시키는 권력을 가지며, 이것은 곧 새로운 질서의 기획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 정권이 특정 위기의 국면-예컨대 선거 결과 부정 가능성, 대규모 시위, 정치적 교착상태-무료 카지노 게임 "계엄령"을 검토하거나 시사한 정황은 바로 이러한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결정자로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 질서 안에서는 계엄령은 최후의 수단이자 이례적 방식이어야 다. 그러나 주권적 독재의 논리 안에서는 그것이 새로운 질서를 가능케 할 수 있는 결정적 개입이 된다.


칼 슈미트의 가장 도발적인 통찰은 민주주의 자체가 내적으로 결정권자를 부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국민’을 상정하지만, 이 ‘국민’은 언제나 동일한 의지, 동일한 언어, 동일한 감정을 가진 통일체로 전제된다. 그러나 현실 속의 국민은 이질적이고, 복수적이며, 갈등적이다. 이 간극을 봉합하기 위해 정치권력은 종종 ‘다름’을 불온시하며, 결국 질서를 정지시키는 결정자, 즉 주권적 독재자를 스스로 소환하게 된다.


오늘날 윤석열 정권이 법치를 내세우면서도 동시에 법의 일시적 정지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을 준비하는 이중적 태도는, 민주주의가 가진 자기 폐쇄적 충동의 발현일 수 있다. “국민의 뜻”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이견을 불온시하고, 위기를 명분으로 결단자의 권력을 호출하는 체계, 그것이 바로 슈미트가 지적한 민주주의의 내적 모순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시사는 법 집행이나 질서 회복이 아닌, 법의 경계 바깥에서 새로운 질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결단의 욕망으로 읽힐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의 통찰은 우리에게 경고의 철학이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이, 사유의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어떻게 전체주의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가 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녀는 말한다.


“전체주의 지배는 도덕적 기준의 붕괴만이 아니라, 사유의 능력을 박탈당한 인간을 통해 가능해졌다.” (전체주의의 기원, 1951)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타자에 대해 ‘나 자신’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학교, 공동체, 공적 영역 안에서 길러져야 하는 것이다.




“악은 급진적이지 않다. 그것은 깊이가 없다. 그것은 생각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만든다.”
(전체주의의 기원, 1951)

악은 괴물이 아니라, 무표정한 얼굴이다. 질문하지 않는 자, 판단을 유보한 자, 고개를 돌리는 자들 사이에서 악은 번져간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오늘날 혐오와 폭력의 언어를 놀이처럼 받아들이는 현상은, 우리가 공동체로서 이미 오래전에 사유를 포기한 대가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느껴야 할 ‘부끄러움’은 교육의 어휘 속에서 사라졌고, 남겨진 것은 점수와 경쟁, 생존과 효율뿐이다.






“고립된 인간은 결코 말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결코 행위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는 함께-존재함 속에서만 드러난다.”
(인간의 조건, 1958)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본질을 노동, 작업, 행위라는 세 가지 활동으로 구분하면서, 가장 인간다운 활동은 바로 행위(action), 즉 타인과 함께 세계 속에서 시작을 열어가는 행위라고 보았다. 이 행위는 오직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공적 공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행위는 결코 고립된 개인 안에서 이뤄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할 때 비로소 실현된다.”
(인간의 조건, 1958)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육 시스템과 신자유주의 질서는 이러한 ‘행위의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 청소년들은 타자와 함께 말하고, 생각하고,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점수와 경쟁 속에서 오로지 ‘생존’만을 강요받는다. 그 결과는 고립이고, 고립은 다시 극단적 집단 정체성과 혐오의 유희로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숫자의 논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조건은 단순히 제도나 투표의 형식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응시와 대화, 곧 공적 사유의 실천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고립시킨다. 경쟁은 타인을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고, 교육은 비판이 아닌 모범답안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청소년들은 ‘함께 존재하기’를 배우지 못한 채,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군중 속에서 익명성과 동일성의 가면을 쓴 채 혐오의 말들을 주고받는다. 그것은 고립의 반동이자, 가짜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개별화와 전체화가 동시에 작동하는 파시즘적 욕망의 구조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정치적 위기의 조짐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위기의 징후다.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을 상실할 때, 정치적 파국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이 혐오의 언어를 소비하는 순간, 그들은 단지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공적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존재들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교육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사건 속에 숨어 있는 세계와의 관계다. 아렌트가 말했듯, 진정한 교육은 세계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바로 그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극단적인 사상과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극우 놀이에 빠지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들이 처한 두려움과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한 몸무림인지 모른다.


우리는 다시금 한나 아렌트를 교육에 소환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시장의 허구적 자유가 아니라,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는 공적 영역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공적 사유의 공간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다시금 그 자기모순의 심연으로 빠져들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은 또다시 혐오와 폭력의 언어를 ‘놀이’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철학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지 말고, 질문하라고 말한다. 사유하라고, 말하라고, 존재하라고. 진정한 자유는 시장의 유연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말하고 함께 책임지는 공적 사유의 공간 속에 있다. 그 공간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끝내 스스로를 정지시킬 것이며, 그 잿더미 속에서 또 다른 ‘아이들’이 혐오를 놀이로 착각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묻지 말고 답하라 하는 교육이 아닌, ‘함께 묻고 다시 생각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 시대의 위기를 뚫고 나갈 유일한 민주적 힘이며, 아직 늦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가능성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극우 놀이는 결코 철없는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역사적 악몽이 언제든 다시 부활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현상이다.


영화 [디 벨레]의 학생들이 비극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듯, 우리 역시 너무 늦기 전에 이 문제를 직시하고 행동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시장의 허구적 자유가 아니라,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는 교육의 공적 영역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한나 아렌트를 교육에 소환하는 이유이다.








전체주의는 어떻게 부활하는가


3.

왜 학교인가? 교실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미시물리학

왜 학생들은 그렇게 쉽게 하나의 집단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까?


개인이 고유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공적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적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녀는 정치란 원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자신을 드러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공통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자유란 집에서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다른 사람들이 공적 영역에 모여 토론하고 서로의 의견을 겨룰 때 비로소 자유는 현실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뱅어 선생은 배신자로 지목된 학생을 강단으로 끌고 올라오라고 지시한다.

학생들은 이 명령에 망설임 없이 복종했다. 뱅어는 말한다.


"이 배신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붐버 말해봐 네가 이 녀석을 끌고 올라왔잖아?"

"선생님이 시켜서 끌고 왔어요."

"그래 내가 시켜서 응?"

"그럼 내가 이 놈 죽이라고 하면 죽일 수 있겠네?"

"목을 매달아야 할까?"

"아니면 우리 법을 따를 때까지 고문을 할까?"

"독재 정치란 바로 이런 거다."

"첫 수업 때 내가 했던 질문 기억나나?"

"우리한테 아직 독재정치가 가능할 것인지?"

"이게 바로 그거다. 파시즘"

"모두 우리 자신이 다를 거라고 착각했지?"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너희들에게 사과해야겠다."

"우린 너무 심했어. 내가 너무 심했다."

“독재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이 장면은 파시즘이 결코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권력관계의 극단적인 표현임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영화 속 이 상황이 펼쳐지는 공간은 다름 아닌 학교다. 왜 학교였을까? 왜 학교라는 공간에서 파시즘적 권력은 손쉽게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일까?



70~80년대 초국민학교 조회시간



학교는 미셸 푸코가 말한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규율권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학교는 교육의 공간만이 아니다. 신체를 배치하고 움직임을 규정하며 시선을 통제하는, 철저하게 기획된 권력의 장치로써의 공간이다.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근대 사회는 신체를 조율하고 생산적으로 만들어내는 ‘규율권력’을 통해 통치를 수행한다. 일상의 미세한 규범 속에 침투해 들어와행동을 교정하는 ‘미시적 권력’이다.

학교는 학교는 철창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규율권력이 작동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반복적인 시간표, 일렬로 배치된 책상, 교사의 일방적인 지시, 종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의 흐름. 이 모든 요소는 개별적 존재를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치밀한 통제 장치들이다.


어느 쪽이 학교고 어느 쪽이 교도소인지/출처:세바시



아이들은 종소리에 맞춰 걷고, 앉고, 대답하고, 침묵한다. 매 시간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 이는 감옥의 처벌처럼 노골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아이들이 ‘좋은 학생’이 되기를 스스로 욕망하게 만든다. 아이는 자신이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언제 손을 들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목소리가 ‘적절’한 지 배운다. 그렇게 규율은 체벌이 아니라 습관이 되고, 감시는 공포가 아니라 일상이 된다. 이것이 푸코가 말한 ‘규율권력’의 은밀한 방식이다.


학교 건축은 이 권력의 구조를 은밀하게, 그러나 치명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구조는 자연과의 단절, 외부 세계와의 접촉 차단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학교 건축은 ‘창 너머의 풍경’을 지우고, 오로지 내부의 규범만을 재생산한다. 천편일률적인 복도, 교실 창밖으로는 나무 대신 시멘트 벽이 있고,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체육관, 이러한 공간은 상상력을 부식시키는 폐쇄 회로이다.

자연과의 우연한 조우를 철저히 차단하며,

‘다르게’ 생각하거나 움직일 수 있는 공간적 여지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자유와 권리를 교육한다.

프로그램된 시간표에 맞춰 살아가는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권력이 작동하는 실체인 것이다.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생산’의 힘이다. 학교는 억압이 아니라, 특정한 주체 - 순응적인,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신체- 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교실에서 하루 종일 생활하는 아이들/출처:세바시


그 결과, 이 공간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자신의 개성을 스스로 규제하고, 타인의 특이성을 불편해하며, 이탈을 ‘관종’으로 명명한다. 이것은 단순한 또래 집단의 놀림이 아니라, 일상적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파시즘은 어느 날 갑자기 밀려오는 괴물이 아니라, 일상의 규율 속에서 미세하게 자라나는 익숙한 감각이다.


영화 디 벨레의 교실 수업 장면은 국가 기구와 수많은 신체들 사이에 신체 자체에 물질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지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푸코가 말하는 '규율'이 작동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권력을 모세혈관 속에서 미시적으로 움직이게하는규율은 학교든 공장이든 감옥이든 가리지 않고 작동하는 권력의 테크놀로지이다. 규율은 집단이나 다수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조직 '안'에서 움직이는 기술이며, 그런 점에서 장치나 제도를 운용할 수 있게 하는 내재적 기술이다. 규율은 법률-정치적 구조에 종속된 것도 아니고, 그 구조의 직접적인 연장 형태도 아니다. 그렇다고 또한 독립적인 것도 아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 본다면 법률적 구조가 작동할 수 있는 것은 규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자유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사법체계나 계약이 아니라 바로 신체중심적이고 현실적인 규율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무료 카지노 게임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



영화 [디 벨레]의 교실 수업 장면은 국가라는 거대 권력 기구와 수많은 개인의 신체 사이에 존재하는, 신체 자체에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극명히 드러낸다.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국가나 법률이라는 거대한 장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행동을 통제하고 규율하는 아주 작은 일상의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


규율(discipline)명령과 복종을 통해 신체를 길들이고, 그 길들여진 신체는 스스로 권력의 요구를 내면화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언제 일어나고 앉아야 하는지, 어떻게 손을 들어야 하는지, 어떤 자세와 태도로 선생님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를 몸으로 학습한다.


영화에서 뱅어가 제시한 세 가지 규칙

-호명된 사람만 일어나 대답할 것, 같은 옷을 입을 것, 발맞춰 행진할 것-

은 사실 학교에서 이미 흔히 적용되는 신체적 규율의 극대화된 형태일 뿐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규율이 단순히 강압적 명령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푸코는 규율권력이 ‘다수의 조직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내부에서 움직이는 내재적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즉, 규율은 우리 내부에 이미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것에 복종하도록 유도한다. 영화 속 학생들이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던 규칙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규율의 언어와 방식에 친숙했고, 이 규율이 자신들을 더욱 강력하게 결속시키고 안정감을 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권력이 <위로부터 발원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권력은 <아래로부터 발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관계의 원리 차원에서일반적인 모태로서 상명하복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분법적이고 총체적인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권력을 통해 다양한 복수의 관계들과 여러 종류의 권력의 매듭들, 즉 권력이 집중되고 그 효과들이국가 내부무료 카지노 게임처럼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 잘 느껴질 수 있는 공간들 -예를들면 파놉티콘- 을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권력의 역학관계의 미시적 효과들이다.


학교는 수많은 작은 관계들과 그 관계들 속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권력의 매듭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이런 권력의 매듭들이 촘촘하게 연결된 곳이다. 학생과 교사, 학생과 학생, 개인과 집단 사이에 복잡한 권력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 속에서 권력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작동한다.


푸코가 지적한 ‘파놉티콘’의 구조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완벽히 재현된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교사는 학생 모두를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학생들은 늘 감시받는다는 느낌 속에서 자신들의 행동과 생각을 스스로 통제한다.


영화 속 학생들은 이 파놉티콘 구조 아래서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규율에 동화되었고, 그 결과 파시즘적 권력이 너무나 쉽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디 벨레] 영화는 토드 스트라써의 소설 "파도"를 원작으로 두고 있으며, 역사 교사 론 존스가 학급에서 실제로 수행한 실험 제3의 물결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당초 2주의 실험을 계획했던 존스는 빠르게 공동체에 몰두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결국 5일째 되는 날 실험을 중단한다. 영화는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독일의 청소년들도 파시즘적 집단 최면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특히 주류 집단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들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정신적인 운동에 열광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소수는 무시되고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집단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며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영화는 전체주의의 특성과 원동력 그리고 그 위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전체주의는 위로부터의 강압적 권력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아래로부터의 규율권력의 작동으로 스스로 동화되어 전체주의에 예속적 주체로 구성된다.


영화는 비극으로 끝난다. 실험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다. 하지만 더 비극적인 것은 그들이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행위를 통해 자유와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둘 다 핵심은 같다. 우리의 자유는 혼자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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