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나는 박 원장에게 감사의 표시로 사우디아라비아산 대추야자와 호두로 만든 간식 한 팩을 보냈다.
최 선생은 내 덕분에 삼촌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며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길래 내가 말했다.
"최 선생, 내게 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삼촌이 살게 된 것은 내 덕분이 아니라 삼촌이 그날 죽을 카지노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인 게지."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카지노 게임과 우연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날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면서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그저 우연의 연속인지, 아니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맞물려 돌아간 카지노 게임의 톱니바퀴였는지.
개인에게 일어난 과거사나 한 나라의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고들 하지만, 이 퍼즐을 풀기 위해서는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법만 한 것도 없다.
* 환자의 형제 중에 최 선생을 자녀로 둔 여형제가 없었더라면?
* 비록 그런 조카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 친구의 며느리가 되지 않았더라면?
* 비록 내 친구의 며느리라 하더라도 본인과 남편이 우리 병원에서 수술받게 되면서 평소에 나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졸업한 지 50년도 더 지난 초등학교 동기가 수년 전 병원 문제로 부탁할 일이 생겨 동창회를 통해 내게 연락해 오지 않았더라면?
* 어릴 적 인연의 끈이 그렇게 다시 연결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부탁할 땐 숨넘어갈 듯이 하다가 일 끝나고 나면 말 한마디로 입 싹 닦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와 내가 친구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 그때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이다.
나는 평소에 퇴근해 집에 오면 휴대전화는 무음이나 진동으로 하고 내 침대 옆 충전기에 연결해 놓고는 그냥 잊어버린다. 이 나이 되면 전화 올 데도 잘 없을뿐더러 볼 일이 있어 전화하는 사람들도 다들 낮에 하지 퇴근 후에 전화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날, 그것도 일요일 아침 시간에 전화를 바로 받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그날 내가 전화를 받은 것은 하필 그날 아침 그 시각에 전화가 한 통 오기로 되어 있어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인데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았고 대신 엉뚱한 전화가 온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카지노 게임일까?
이 일곱 가지 경우의 수가 모두 카지노 게임으로 한꺼번에 맞아떨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을 제대로 계산하려면 각 항목마다 일어날 확률까지 생각해서 곱해야 하는데, 그리되면 소수점 이하 천문학적 개수의 '0'이 붙고 난 후에 오는 '1'의 확률이 될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 일곱 가지 요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긋나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일을 우연이나 재수가 아닌 카지노 게임(運命)이라 여긴다.
그것은 지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듯, 해와 달이 어김없이 밤낮으로 뜨고 지듯,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카지노 게임의 굴레야말로 이 모든 조건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물고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연과 필연과 카지노 게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