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뭐가 남아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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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세계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 기쁨은 기쁨이고, 슬픔은 슬픔이고, 두려움은 두려움이었던 시절. 견뎌내는데에 능했던 때.
세계가 무엇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알아가던 시절. 보이지 않던 부조리가 눈 앞에 보이던 시절.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눈 앞을 너무 빠르게 스쳐대던 시절.
뭐가 뭔지를 이제서야 조금이나마 알게 된 시절. 꿈과 현실을 구분짓는 장벽에 처음으로 소심한 망치를 휘둘렀던 시절. -이건 사실 지금이다. 해봤자 2-3년 전.
내가 지금 내 얘기를 쓰려하는건지 연극을 쓰려하는건지 모르겠다. 불순한 의도는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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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다림이었다. 이마트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에서 밤늦게까지 일했던 엄마. 밤 11시경에 돌아왔던 것 같다. 한 10시쯤부터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만화가 딱 그때 쯤에 시작했다. 하염없이 TV를 본다. 만화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가,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온다.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에 거칠게 들린다. 졸려서 귀가 밝아졌던 것 같다. 절반이 검은 화면과 느릿느릿한 노래를 듣고있자니 무언가 마음이 축축해진다. 아직 적적함에 적적함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 때였다.
누나와 나는 어둠을 무서워 했기에 방 안에 불을 모두 켜놓는다. 온 집 안이 훤하다. 어두컴컴한 창문 밖 세상과의 대비. 저 바깥에 놓여카지노 게임 추천 무시무시한 곰, 아니면 괴물. 여기는 안전한 둥지 같은 느낌. 이제 일터에서 돌아오는 엄마아빠를 맞이하면 기다림이 끝나고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 더 이상 집중할 것이 없어 눈이 감기면 누나와 차례로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 세수를 한다. 5분 정도는 괜찮다가, 덜 닦인 물 사이로 다시금 졸음이 밀려온다. 몽롱한 정신으로 종이접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오기 전에 항상 누나가 나를 혼냈던 기억이 난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크게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누나는 어린 시절부터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다. 감정의 진폭이 컸고, 본인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했다. 아빠가 누나를 혼내면, 누나는 나를 혼냈다. 분노는 언제나 만만한 사람을 향해 흐른다. 분한 마음에 눈물이 나오면 돌아온 엄마아빠에게 보여주기 위해 닦거나 참지 않는다. 몇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했기 때문에 어차피 눈물은 다 말랐지만. 감정이 언제 사라지고, 눈물이 어떻게 마르는가를 잘 알지 못했으므로, 그때는 그게 가능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이 돌아오면 졸림과 반가움에 가려 감정도 눈물도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 갑작스레 환해지는 집 안 분위기. 엄마의 밝은 음성. 제일 강렬했던 심상은 손에 든 커다란 봉투. 예쁘게 포장된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처럼 무언가 희망이 담겨있는 것. 그 순간의 밤은 어떤 낮보다도 환한 기억으로 남았다.
잠자리에 누워 마지막으로 TV를 본다. 무슨 만화를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제목도, 내용도 잊어버린 만화일 것이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리모컨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고장났거나, 이미 잠든 아빠 밑에 깔려있거나. TV를 끄기 위해 콩닥대는 심장을 이끌고 깜깜한 방 안을 가로지르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귀신이 방문을 여는 상상. 방문이 살짝 열려 검은 심연이 새어나오는 때에는 몇 분에 걸친 커다란 결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누나와 나는 서로가 잠들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했다. 깨있는 사람이 있으면 덜 무서우니까. “누나, 자?”라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을 때. 느껴졌던 공포심 내지는 위기감이 기억에 남는다.
유치원 티를 벗은 초등학교 저학년. 오후 1-2시면 끝나는 학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올 때는 걸어온다. 혼자서 버스를 타는 법을 몰랐다. 도착한 집 문 앞.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카지노 게임 추천 것은 무서웠다. 집에 들어가 재빨리 리모컨과 이불을 들고 벽장 옆, 옷을 담아놓는 틀 위로 올라간다. 눈만 간신히 보이도록 이불을 뒤집어 쓰고 TV를 본다. 깜빡하고 리모컨을 놓고오면 리모컨 위치를 확인한 뒤 허겁지겁 들고와야한다.
그때는 아마 1-2시간 후면 오는 누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집에 들어가기가 특히 무서울 때면 놀이터에 가서그네를 탔다. 그네를 타던 도중 아파트를 돌아다니던 반대편 단지의 형과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거기서 조금만 더 지나면 컴퓨터를 접할 것이다. 모니터 안 세상은 할 것들이 넘쳐나는 모험처럼 느껴졌다. 시간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았기에 즐거웠던 기억도 많고, 혼났던 기억도 많다. 아파트 뒤편 농구장에서 함께 놀던 대여섯명의 무리가 서서히 멀어지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청주 변두리의 아파트, 흥덕구 장성동, 404호. 지금 돌이켜보면 몹시 비좁고 낙후된 곳. 내가 11살이 될 무렵 그곳을 떠난 이후 우리 가족은 물질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이사를 할수록 사는 곳은 점점 더 넓은 집이 되어갔고, 더 세련된 분위기가 집 안을 감쌌다. 어릴적 익숙했던 그 누런 분위기. 이제는 그카지노 게임 추천 낯설게 느껴졌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나는 새롭게 하얀색에 익숙해져갔다.
얼마전 옛 집을 다시 갔을 때. 저물어가는 교외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노을이 질락말락 잿빛을 띠는 하늘. 모래사장과 쇠로 만든 놀이기구들은 사라지고 어설프고 허름한 우레탄 바닥 놀이터가 과거의 추억을 대신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던 아파트 뒤편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울창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살아숨쉬던 공간에는 앙상하게 늙은 나무와 좁은 골목만이 남아있었다.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 함께 어울리던 옛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았다. 이제는 서먹서먹해져 서로 인사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있을 때에도 이미 서서히 그래왔으니 자연스레 멀어져갔을 카지노 게임 추천다. 어릴적 가까웠던 친척 형들하고도 이제는 어색한데.
선명한 알록달록함이 온 동네에 칠해져있던 곳. 우리가 아직 어렸던 곳. 허름한 겉면 안에 놀라운 활기가 스며들어있던 곳. 이제 그 다채로운 색의 페인트는 낡고 부스러져 새로 도색한 아파트 겉면이 무색하게 활력을 잃어버렸다.
옛 집은 우리의 옛날을 잊어버렸다. 꿈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았다. 무언가 기울어감을 느낀다. 내가 상승하든 하강하든 과거의 자취들은 서서히 허물어져갈 것이다. 내가 걸어온 궤적들은 현실에서 사라지고 내면에만 남았다. 이제는 나만 볼 수 있고, 나만 알 수 카지노 게임 추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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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은 사라지고 콘크리트만 남았다. 뒤섞여있던 환상과 현실 틈에서 현실만이 추출된 세계. 나는 어느덧 그 세계의 변두리에 놓여있는 경계인이 되어있었다. 자라나가는 내면에 비해 외면은 가정 내에서 언제나 아이, 막내, 여전히 보호와 지도 아래에 있는 누군가, 그러한 것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무수히 교차하며 세계 곳곳을 가득 메우던 환상의 실. 대부분이 맹렬한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버렸으나, 그 중 몇몇을 겨우 잡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과는 반대되는 바람이나 꿈이었다. 모험이 죽은 세계에서 아직 살아있는 모험. 실용이 압도하는 세계에서 아직 살아있는 낭만. 과거의 그 화려했던 감성의 왕국을 이 현실 속에 복원해놓는 일이 내 삶의 과제가 되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루는데에 능숙한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는 수수께끼 같았다. 어떻게 사람들은 어깨에 짐이 놓여카지노 게임 추천 상황 속에서도 현실과 조율된 꿈을 찾고 그럭저럭 만족하며 사는 것인가? 어떻게 적당히 노력하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소통하고, 적당히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인가?
삶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 틈에서 나는 홀로 공중을 떠도는 까마귀가 되어카지노 게임 추천 것은 아닌가? 혹은 나뭇가지, 전선줄, 옥상에 저마다 터를 잡고 견고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는 까마귀들의 세상 속에서 나는 홀로 하얀 까마귀가 되어카지노 게임 추천 것은 아닌가? 모순된 현실성, 가능하지만 불가능한 것, 까마귀지만 까마귀가 아닌 것. 여기서 보면 저기에 속해있고, 저기서 보면 여기에 속해카지노 게임 추천 노마드.
경계의 안, 혹은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경계는 저 너머의 선명한 지평선이지만, 경계에 서있는 이에게는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경계인에게는 더 이상 어느 무엇도 구분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경계에 놓임으로써 어떤 경계에도 놓이지 않는 고유한 세계. 외진 바다에서 더 이상 어떤 현실에도, 어떤 구분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하고 드높은 감성의 성채를 쌓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세계는 더 이상 추출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