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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클디 May 11. 2025

'감感' - 지젝의 시선으로

7편: 현대인의 삶 ―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책임질 수 있다"

진실은 항상 맨 마지막에 찾아온다. 그리고 그 진실이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 책임져야 한다."

이 역설적 공식은 단순한 표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진정한 윤리적 행위가 가능하기 위한 최소 형식적 조건이다. 만약 카지노 게임 사이트 이 문장을 불편하게 느낀다면, 그것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 여전히 심리적 안전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스펜서, 칸트,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 심지어 불교의 무아까지 끌어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 모두 동일한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순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을 아는 주체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우리의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인식론적 불확실성이 윤리적 책임으로 전환되는 지점 말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비극이다 —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산다. 구글은 모든 질문에 답하고, 빅데이터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욕망까지 예측한다. 이것은 마치 대타자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보다 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잘 안다는 듯한 음침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전지한 '대타자'의 존재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위험한 환상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진정한 앎은 알 수 없음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칸트의 '물자체'는 뭔가?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운 X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 자체에 내재한 구조적 불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스펜서의 불가지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순한 인식적 겸손이 아니라, 인식 자체의 내적 한계를 가리키는 시스템적 실패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침묵은? 그것은 언어의 부재가 아니라 언어의 극단적 긴장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에서 고정된 중심의 부재와 불교의 무아는 모두 동일한 지점을 가리킨다 — 주체의 자리는 항상 이미 비어있다.


자, 이제 이것들을 한데 모아보자. 이 모든 사상적 노력은 동일한 구멍, 동일한 균열을 가리킨다. 그 구멍은 주체성의 중심에 있는 근본적 부재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구멍은 단순히 메워져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메워질 수 없으며, 메워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구멍이야말로 주체가 존재하는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구멍을 메우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통해서만 윤리적 주체로 존재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 단순한 철학적 유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일상적 삶을 재구성하라는 요구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설명하고, 더 많이 말하려는 강박적 충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충동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 피하려는 바로 그 공백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듣는 귀를 가져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과잉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은 상징화될 수 없는 실재의 과잉을 들어야 한다. 바틀비처럼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체제의 대답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알 수 없음의 상태에서 결단해야 한다." 윤리적 행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확실성에 기반한 행위가 아니다. 진정한 윤리적 행위는 항상 불가능한 결단의 형태를 띤다. 우리는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아니 정확히 말해서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결단해야 한다.


"자아가 없는 채로 타인을 응시해야 한다." 무아는 뉴에이지적 평온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결여를 통해 타자를 마주하는 윤리적 태도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자아란 사실 상징계에서 필사적으로 구성한 환상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 환상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자의 실재와 마주할 수 있다.


"실재는 흐름이며, 당신은 그 흐름의 장애물임을 자각하라." 여기서 핵심은 무엇인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 "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뉴에이지적 조언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그 흐름의 불균형이자 마찰이다. 당신은 실재의 흐름에 끊임없이 트라우마적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다. 그리고 바로 그 균열을 통해서만 실재와 접촉할 수 있다.


이것이 현대인이 살아야 할 인식론적 삶이다. 그런데 이 인식론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는 것, 실재의 주변부에서 하나의 균열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때 카지노 게임 사이트 느끼는 불안, 결핍, 무력감은 실패의 징후가 아니다. 그것들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 실재와 접촉하고 있다는 정확한 증거다.


"당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당신이 실재에 닿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역설에 도달한다. 성공적인 설명, 완성된 자기정체성은 사실 가장 큰 실패다. 그것은 실재와의 접촉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반면 실패 속에서, 바로 그 불안정한 자리에서 우리는 진정한 책임을 질 수 있다.


결국, 현대인의 삶은 모른다는 사실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이 모름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급진적 윤리적 태도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해야 하고, 응답해야 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주체의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지금, 여기에서 직면해야 할 윤리적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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