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생후 14개월이 된 아들을 데리고 남편 따라 대만에 갔다. 공항에 마중 나온 시댁 식구들은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손까지 붕대로 칭칭 감아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만에 도착한 우리 셋은 예정 대로 시댁으로 들어갔다. 반불구 상태인 내겐 어쩜 다행일지 모른다. 육아의 피로에서 시작한 손목의 통증은 악화될 대로 되어 학위논문 제출할 무렵에는 오른쪽 상반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대만에 도착했을 때 내 몸 상태는 겉으로 보는 것보다 한층 더 심각한 상태였다.
젓가락질이 안 되었다. 일본을 떠날 때 지도교수님과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서툴게 왼손으로 포크를 들어 먹다, 구운 생선이 나오는 바람에 포크를 내려놓고 왼손으로 먹었다. 이곳 대만에서는 숟가락은 아기들이나 사용하고 어른은 젓가락 하나로 밥이든 반찬이든 집는다. 그런 식사 문화인데 젓가락질이 안 되니 밥 먹는 것부터 문제가 되었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국수를 사 와서 점심으로 내게 먹으라고 하셨다. 그릇에 놓인 국수를 보면서 어떻게 먹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신 걸까, 시어머니는 아기에게 먹이게 하는 것처럼, 가위로 국수를 잘라 주셨고, 나는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먹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것도 큰 문제였다. 가까스로 바지를 벗긴 했지만 볼일 본 후 바지 단추를 메는 게 너무 힘들었다. 손가락의 세심한놀림이 어려웠다. 그래서 아기 옷을 갈아입히는 것은 당시 엄청 힘든 일이었다. 아기를 안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대만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일상 생활도 어려운 몸을 들고 병원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병원에서는 수술도 권했지만 수술이 제대로 안 되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수술은 최후의 선택이라 생각하고推拿(한국의접골원 같은 곳)에서 카지노 게임를 해보기로 했다. 대만에서는 어깨 결림, 요통, 운동 부상 등으로推拿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결점으로는 보험 청구가 안 되어 전부 자비 부담이기 때문에 카지노 게임비가 결코 싸지 않았다.
한 마디로 고통의 카지노 게임였다. 약간의 움직임으로도 통증이 있는데 그 아픈 곳을 누르고 밀고 잡아당기고 하니 그 통증이야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카지노 게임하는 1시간 내내 신음 소리가 절로 났고 카지노 게임가 끝나면 식은땀으로 옷이 다 젖어 있었다. 카지노 게임 후 집에 돌아오면 통증으로 앉아 있기도 누워 있기도 힘들 정도로 상반신 전체가 아팠다.
(推拿, 이미지 사진입니다)
그런데 2번의 카지노 게임 후에 나는 몸의 변화를 감지했다.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팔을 들 수 있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내 팔을 들 수 없어플라스틱의 빈 우유병조차들기 어려웠다.
그래, 고통의 카지노 게임지만 참고 이 방법으로 카지노 게임해 보자.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카지노 게임를 받았다. 카지노 게임받은 날부터 3일간은 전신이 아파, 몸을 건드릴 수 없었고, 4일째 되어야 그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 거였다. 카지노 게임받은 지 3개월쯤 지나자 일주일에 2번을 갔다. 카지노 게임의 통증이가라앉을까 말까 하는 시점에 또 카지노 게임를 받으러 간 것이다. 빨리 낫고 싶어서였다.
推拿에서카지노 게임를 받고 반년 정도 지날 무렵,나는 팔을 들어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카지노 게임는 1년 반넘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