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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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28. 2025

황혼카지노 게임 쉽지 않아

황혼카지노 게임 쉽지 않아

박래여



이순을 코앞에 둔 여인이 황혼카지노 게임을 준비하고 있다. 카지노 게임로 함께 산지도 삼십 년이 넘었다. 남매는 결혼을 했다. 카지노 게임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사귀게 되었고 오랫동안 열심히 살았다. 남매 키우고 직장 생활하다가 아내는 귀촌을 했고, 남편은 도시에 남았다. 몇 년 후, 남편은 퇴직을 하고 원룸에서 혼자 지내다 아내를 따라 시골로 들어왔다. 농촌생활에 적응하면서 잘 살았다. 활동적인 아내는 공동체 마을도 운영하고, 학교 강사로 뛰면서 남매를 시집장가보냈다.


왜 황혼카지노 게임을 준비했냐고 묻고 싶었다.

카지노 게임는 한 지붕아래 살지만 각자 의식주도 해결할 정도로 자유롭게 살았다. 오랫동안 동거인으로 살았는데 이제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단다. 서로에 대해 미운 정이라도 남았으면 좋으련만 그 미운 정도 없고, 서로에 대해 불쌍한 정이라도 남았으면 좋으련만 그런 정도 안 남았단다. 차라리 이웃이라면 이웃사촌의 정이라도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남보다 못한 카지노 게임로 죽을 때까지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인격모독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래 함께한 카지노 게임 사이에 가능한 이야기다.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무관심한 관계로 사는 카지노 게임가 그들 만이겠는가.


그들 카지노 게임는 중년의 위기도 잘 극복한 것 같은데 문제는 중년의 위기보다 노년의 위기가 더 가파르다. 중년 카지노 게임는 사랑이 아니라 정으로 산다는 말을 한다. 사랑과 정이 어떻게 다를까. 사랑은 서로 쟁취하려고 들지만 정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점이 다를까. 사랑은 열정적이지만 정은 온유한 것일까. 카지노 게임의 길에는 그 모든 감정이 녹아든다. 사랑은 잠깐이고 미움은 길다고도 한다. 그 미움조차 사라진 자리에 무관심만 남았다면 각자 안 보고 살면 서로 편할까.


현대 들어 황혼 카지노 게임이 급증하는 이유는 뭔가. 인터넷에 찾아보니 구태의연한 사실들만 나열되어 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이 빠진 느낌이다. 노인이 되면 카지노 게임 사이에 있었던 미미한 신체적 접촉도 없어진다는 거다. 애를 낳고 산 카지노 게임도 마주 손잡는 것도, 포옹하는 것도, 어깨 두드리는 것도 없어진다는 거다. 각방 쓰기가 기본이고, 한방에 자도 각자 이부자리를 편다. 신체적 기능이 떨어지면서 일상이 그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 서로 안쓰러워하는 마음이라도 있다면 괜찮다. 문제는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 축적된 부정적 앙금이 신체접촉이 없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이 무관심으로 일관되는 것은 아닐까.


그 여인 덕에 우리 카지노 게임의 삶을 반추해 본다. 아직 애정이 있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스러운 마음의 흐름을 도돌이표로 그려본다. 아직 농부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 아직 애정을 바란다는 것, 상대방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는 것은 아직 정이 있다는 거다. 미운 정, 고운 정, 어떤 정이든 있다는 거다. 서로 소 닭 보듯 해도 내가 소위에 올라앉아 노는 닭이라 해도 소는 기댈 수 있는 언덕이라는 거다. 노인인데 혼자 설 수 없다는 자괴감이 먼저 인지 모르겠다.


아침에 성질을 버럭 냈다. ‘각방 써, 당신이 무엇을 하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당신이 언제 내 허락받았어? 매번 당신 맘대로 하면서 묻긴 왜 물어.’ 그렇게 성질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정이다. 내 성질에 그는 맞받아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다 자리를 피하는 것이 더 얄밉지만 그 얄미운 것도 정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십 년째 지지고 볶으면서도 서로 무관심하지 않으니 우리 카지노 게임에겐 아직 미련이라도 남았나 보다. 카지노 게임하자는 말 대신 졸혼하자는 말을 하면 농부는 ‘니 맘대로 해라.’하고 남매는 ‘우리 엄마 또 막가파 성질 나왔다’며 우스개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얄밉지.


가끔 삶이 허전하고 외로울 때 싸움이라도 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위로받을 수는 없는지. 혼자 살아도 외롭고, 둘이 살아도 외로운 것은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 태어나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것이 정해진 사람의 길이기 때문은 아닐까. ‘당신 나 사랑하지 않잖아. 사랑도 없이 왜 살아. 안 살아, 안 산다고.’ 그렇게 고함치고 억지 부리고 싶을 때 피식 웃고 만다. 칠순이 코앞인 내게도 아직 소녀 적 감상이 남아 사랑타령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여자는 아흔이 넘어도 여자라지. 수시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지. 참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도 여자라서 그런지.


그 여인에게 나는 ‘여태 그렇게 살았는데 그냥 살지. 서로 간섭 안 한다며? 그런데 왜 굳이 헤어질 결심을 하는 거야? 번거롭잖아. 그냥 살아. 별 인생 없어. 익숙한 게 편해. 친구처럼 살면 좋잖아.’ 그렇게 말해주고 싶고, 한편으로는 ‘잘 생각했어. 아무리 서로 간섭 안 한다지만 함께 살면 사사건건 눈에 티가 들어갈 수 있어. 안 보는 게 상책이야. 애들이 인정해 주니까 거치적거릴 것 없잖아. 헤어져.’ 헤어질 결심을 밀어주고 싶기도 하다.


정작 나는 헤어질 결심을 못 한다. 미우나 고우나 농부가 있어야 내가 온전해지니까. 이런 나를 내가 ‘어리석다. 혹은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다.’ 탓하면서도. 그냥 산다. 익숙해져서 편한 관계가 좋아서. 농부 같은 남자 다시는 만날 수 없어서. 누구 말처럼 겨우 길들여 놨는데 아깝게 왜 헤어지나. 장꼭도 시인처럼 ‘혼자는 외로워 둘이랍니다.’ 맞잖아. 언젠가 혼자될 것인데 서둘러 혼자될 필요는 없지. 손해 보는 장사를 왜 하나. 황혼 카지노 게임,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혼자 장구치고 북치다 하루를 날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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