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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F SAGE 정프세이지 Mar 27. 2025

11년 6개월 동안 9만리를 걸은 카지노 게임

배티성지에서 만난 최양업 카지노 게임와 그의 삶배티성


오늘의 운전사는 나다. 배티성지를 향해 고고.평택제천고속도로를 따라 들어서면서 마둔호수의 넓은 풍경이 차창 밖에 펼쳐졌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눈이 녹지 않아 신경을 곤두세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둔 호수가 끝나면서 경사가 조금씩 커지더니 심해졌다. 아스팔트 도로 위를 차로 가는데도 숨이 찼다.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배티고개에 도착해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한 겨울이 아니라 다행이다. 배티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가가니, 사진에서 보던 배티성당과 배티성지가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날이 흐리고 미사시간도 지나 성지는 음소거 상태라 몸도 맘도 더 경건해졌다.


최양업 카지노 게임의 생애와 선교 활동

최양업 카지노 게임는 1821년 충남 청양의 다래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성가정의 신앙 속에서 자랐다. 1836년 처음으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함께 유학을 떠난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마카오에서 학문을 익혔다. 최양업은 사제로 가장 먼저 서양 음악을 배우고, 라틴어에 능숙했다. 마침내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에 귀국했다. 6차례의 시도한 후에야 귀국에 성공했다.



서양 음악을 여러 가지 음향으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를 하나 보내 주십시오. 여러 개의 건반이 딸려 있는 약 30 프랑짜리로 보내 주십시오. (최양업 카지노 게임의 1858년 10월 3일자 서한)

귀국후안스승인 르그레즈와 카지노 게임에게 서양 악기를 신청한 것을 보면 서양 음악에 대한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우들에게 창으로 교리나 기도를 암기하게 했다.


순례와 선교의 길

최양업 카지노 게임의 삶은 '길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년 동안 9만리를 걸었으며, 귀국 후 전국 5개도 127개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1850년에 다블뤼 카지노 게임가 배티에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했고, 최양업은 오지인 접경지인 배티를 사목의 중심지로 삼아 활동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는 신학교를 맡아 신학생들을 지도해 3명을 유학보내기도 했다.

그가 만든 <천주가사와 한글 기도서, 교리서들은 신자들에게 신앙의 진리를 전파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교리 교육과 더불어 백성들의 삶을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고백을 듣고, 세례를 베풀고, 교리를 가르쳤다.


신앙과 헌신의 삶

최양업 카지노 게임의 서한들은 그의 깊은 신앙과 사명감을 보여준다. 1842년 4월 26일 서한에서 그는 "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으로 회귀하여 우리의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지?"라고 고민하며 조선 민족의 영적 구원에 대한 깊은 열망을 표현했다. 최카지노 게임가 쓴걸로 밝혀진 21통중 20통이 배티성지의 최양업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잘 쓴 글씨에 남편과 나는 감탄했다.

그는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1851년 10월 15일 서한에서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주 쉬워서 10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한글을 통해 교리를 보급하고자 했다.

마지막 서한은 1960년 9월 3일 죽림굴에서이다. 자신들의 죄와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저희의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저희의 죄악대로 저희를 벌하지 마소서!"라는 기도는 당시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굳건히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영성을 보여준다.



마지막 순간

'땀의 순교자'라는 별명을 가진 최양업 카지노 게임는 1859-1860년 경신박해 때 경상도 간월산 죽림굴 공소로 피신했다. 동료 카지노 게임 페롱의 기록에 따르면, 낮에는 하루에 80~100(32~40km)리를 걸어야 했고, 밤마다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이동해야 했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활동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향하던 중, 충청도 진천의 공소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인해 40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경남의 알프스의 하나인 간월산에서, 배론 성지에서 최양업 카지노 게임에 대해서 들었다. 최양업 길을 따라 순례하는 이들도 보았다. '그렇구나.''우리나라 가톨릭 2번째 사제구나', '김대건 사제에 비해 덜 알려져 있구나'정도로 생각했다. 배티성지 대성당(최양업 카지노 게임 선종 기념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한 사제의 삶과 박물관에서의 최양업 카지노 게임의 활동을 보면서 '내가 몰라도 정말 몰랐구나.' 한탄을 했다.많은 고난과 죽음에 맞서면서도 교우들을 위해 걸어가는 모습은 눈물을 쏟게 했다. 박물관에 최양업 카지노 게임의 기도를 들으며 함께 눈길을 걷는 듯한 체험은 다시 내게 반문을 했다.'넌 무엇을 믿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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