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권비영 장편소설
외국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남산타워나 궁궐이라고 한다.
서울에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물론운현궁도 있지만 운현궁은 궁이라기보다대원군의 사저, 혹은 카지노 게임이 태어난 잠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울에 살면서 남산이나 궁궐을 일부러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혹명절이나 아이들이 어릴 때 체험학습으로 가기는 한다.
나는 철이 바뀔 때마다 꽃을 보기 위해 궁궐을 자주 가는 편이다. 주로 창경궁이나 규모가 큰 경복궁을 간다. 솔직히 가장 가고 싶은 곳은창덕궁 후원이다.
창덕궁 후원은 미리 예매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동작이 빠른지 아니면 여행사에서 한꺼번에 예매를 하는지 표를 구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포기하고 언제나 마음먹으면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나머지 궁을 가는 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일 년에 서너 번씩 창경궁이나 경복궁을 가면서 덕수궁이나 경희궁은 거의 가본 적이 없었다. 덕수궁은 학창 시절에 단체로 미술전 관람을 갔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대원군과 명성황후 그리고 카지노 게임 이야기를 쓰면서 덕수궁에 다녀왔다.
들어갈 때 안내도를 챙겨 어디를 가야 할지 먼저 살펴보았다. 희미한 기억으로 미술관 근처에 있었던 석조전과 분수를 보았던 생각은 났지만 나머지 건물은 이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특히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연지(연못)가 있었는데 나는 처음 보는 연못이었다. 경회루(경복궁), 춘당지(창경궁), 부용지(창덕궁) 보다는 훨씬 작지만 가운데 섬처럼 만들어진 곳에 철쭉꽃이 활짝 피었고 물속에 반영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궁궐 곳곳에피어있는 철쭉들, 철쭉을 보러 멀리 황매산까지 갈 필요 없이 서울 근교에 산다면 덕수궁이나 나머지 궁을 가면 좋을 것 같다. 철쭉뿐 아니라 모란도 환상적이었다.
입장료 1,000원으로 누리는 행복, 꽃과 궁궐의 조화, 이보다 더한 호사가 없었다.
고백하자면, 사실 '카지노 게임의 민낯'이란 제목으로 글을 다 써놓고 사진이 필요해서 덕수궁을 다녀와야 했다.
월요일은 휴무일이었고 화요일에가려고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온종일 비가 내렸다. 이제나저제나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비는5시가 지나서 그쳤다. 할 수 없이 수요일(23일)에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잔뜩 기대하고 갔던 운현궁에서는 보지 못한 꽃을 덕수궁에서 원 없이 보았다.
내가 작성했던 카지노 게임에 대해 쓰려면 덕수궁이 이렇게 화려해서는 안되는데, 일이 꼬인 셈이다.
덕수궁은 원래 1469년(예종1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엮였던 조영달의 집 터였다. 역적의 집이란 이유로 조정에서는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고 1470년(성종1년)에 성종이 이곳을 세종의 8남 영응대군의부인 송 씨에게하사했다.
1년 뒤 송 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으로 짓고왕실의 별궁으로 썼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의경세자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썼다.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제사를 맡으면서 이곳을 하사 받았고,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이면서 의경세자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되었다. 이후 1475년(성종 6년) 의묘의 위패를 경복궁연은전으로 옮기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으로 남았다.
덕수궁이 월산대군 저택이 된 경위를 다르게 보는 의견도 있다.
월산대군과 성종의 어머니인 수빈 한 씨는남편 의경세자가 죽자세자빈의 지위를 잃고궁궐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다. 그러자 시아버지인 세조가특별히 수빈 한 씨와 월산군, 자을산군, 명숙 공주가거처할 곳으로 이 저택을 하사했다.
이후 둘째 아들 성종이왕위에 오르자 어머니 수빈 한 씨도왕대비가 되어 대궐로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월산대군의 소유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 거처할 곳이 없었다. 선조는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행궁으로 삼았다.
그나마 월산대군의 저택이 온전했던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간이 부족했기에 주변 민가들을 대거 징발하여 궁궐로 증축, 연결하여 썼다.
이때 명종의처가였던 영의정 심연원의 저택을 종묘로 삼았고, 손자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저택을 세자 광해군이거주하는 동궁으로 삼았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경운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경운궁은 더는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 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경운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카지노 게임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였으며,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 경운궁 대화재와 1907년 카지노 게임의 강제퇴위 이후 경운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이후 카지노 게임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카지노 게임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德壽)’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궁은 왕과 가족들이 사는 집이고 궐은 궁을 에워싼 담장, 즉 출입문 좌우에 자리 잡은 망루와 성문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궁(宮)과 궐(闕)을 합친 궁궐은 임금과 가족들이 살며 통치하는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덕수궁의 건물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眀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이고 정남 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카지노 게임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관명전(觀明殿), 보문각(寶文閣) 등도 중요한 건물이었다.
중화전은 처음 중층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져, 2층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규모를 줄여 단층건물로 만들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되어 없어졌다. 중화문 역시 처음에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재건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건물로 축소되었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이 보물 제819호, 함녕전이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여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1906년 재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큰 화재가 있은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여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있다.
화재 뒤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 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웃한 궁의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 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석조전은 조선왕조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미완의 근대적 궁궐이다. 외세에 시달림을 받으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석조전을 지으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끝내는 왕조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전통 목조건축과 신식 석조건물이 공존하는 덕수궁의 높은 언덕에는 정관헌이 있다. ‘조용히 바라보는 집’이라는 이 건물은 임금이 커피를 마시며 사색하던 공간이다.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정관헌은 서양식 건축이면서 동양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서 이루지 못한 왕조의 꿈과 함께 동서 문화의 만남을 보여 준다.
내가 둘러본 곳 중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돈덕전이었다. 특히 돈덕전 근처에 핀 철쭉이 가장 화려했고 전각 앞 회화나무가 근사했다. 돈덕전은 양관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지막 황실에 관해 전시를 하고 있었다.
돈덕전은 대한제국의 서양식 외교 건물로, 1902~3년에 카지노 게임 즉위 40주년 기념 예식에 맞추어 지어졌다. 이 건물은 국제교류를 실현하고 열강과 대등한 근대국가의 모습과 주권 수호의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하였던 화려한 건축양식을 사용하였고, 외교 사절의 접견실이자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1907년 돈덕전에서 순종의 황제 즉위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곳은 1920년대 일제에 의해 훼철되었으나, 복원정비사업을 거쳐 2023년에 개관하였다.
일제강점기 덕수궁에서 생활하던 카지노 게임의 하루는 무료함 그 자체였다. 카지노 게임은 늘 새벽 3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늦게 잠들었으니 일어나는 시간은 오전 10시 전후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카지노 게임은 아들 순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전화를 걸었다. 잠자리에 든다는 전화였으나 이미 잠이 든 순종은 이 소식을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야 보고받았다.
원래 문안 인사는 아들이 먼저 올리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으나 카지노 게임이 워낙 늦게 잤기 때문에 뒤바뀐 것이다.
카지노 게임이 일어나 처음 하는 일도 순종에게 일어났음을 알리는 전화 걸기였다.
카지노 게임은 세수를 한 후 창향차(蒼香茶)나 귤강차(橘薑茶)를 마셨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했는데 주로 우유를 끓인 낙죽(酪粥)을 먹었다.
카지노 게임은 아침 식사 후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주로 손님접대였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점심 식사는 12시쯤 했다. 식사 후에는 역시 손님을 접대하거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카지노 게임은 오후 6시 30분쯤 저녁을 먹고 산책하거나 궁녀들을 만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새벽 3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
이처럼 카지노 게임은 밥 먹고 차 마시고 자는 일 외에 하는 일이 없었다. 모든 권력을 일본에 빼앗긴 망국의 왕이니 그저 시간만 보낼 뿐이었다.
1912년 5월 25일, 고명딸 덕혜옹주가 태어났다. 카지노 게임은 그 어느 때보다 옹주의 출생을 기뻐했다.카지노 게임은 매일 점심 후와 저녁 후에 수시로 옹주를 보러 갔고 몇 시간씩 머물렀다. 나이 환갑에 얻은 딸이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덕혜옹주가 자라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자 카지노 게임은 덕수궁 준명당에 황실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었다. 옹주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거리는 고작 150m였는데 옹주를 가마에 태워 보냈다.
함께 다닌 원생들은 덕혜옹주와 또래인 사대부 가문의 딸들이었다. 원생들은 덕혜옹주에게 극존칭을 사용했으며 항상 시중을 들 궁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카지노 게임은 옹주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러 가기도 했다.
사실상 옹주를 위한 유치원이었다. 이 유치원의 원장은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라는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서울 중구 정동에는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이 있었다. 객실이 30개나 되는 꽤 큰 규모의 호텔이었다.
이 호텔을 세운 사람은 독일 국적을 가진 손탁(A. Sontag)으로, 그녀는 1885년 10월,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C. Waeber)를 따라 친인척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와 25년을 살았다.
입국 당시 32살이었는데 사람들은 ‘미스 손탁’이라 불렀다.
손탁은 원래 프랑스 알자스 출신이었는데 나이 17살 때 보불전쟁에서 이긴 독일이 이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독일 국적으로 조선에 입국했다.
손탁이 카지노 게임과 만난 것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던 때였다.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손탁은 우리말도 빨리 익혀서 카지노 게임의 눈과 귀 역할을 해주었다.
그녀는 카지노 게임에게 커피를 끓여주었는데이후 카지노 게임은 커피를 즐겨 마시는 애호가가 되었다.
손탁이 입국한 지 10년째 되던 해인 1895년 베베르 공사가 귀국하자 카지노 게임은 손탁을 위해 공사관 입구에 있는 기와집과 땅을 하사했다.
손탁은 이곳에 방 5칸짜리 서양식 건물을 지었고 영빈관을 운영했다. 영빈관은 정동에 있는 꽃처럼 아름다운 집이라 하여 ‘정동화옥(貞洞華屋)’으로 불렸다.
정동화옥은 이후 정동구락부의 사랑방이 되었다. 정동구락부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했으며 처음에는 반일과 친서방을 표방했기에 일본이 싫어했다.
이들은 정동화옥에서 손탁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구미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는 외교를 펼쳤다. 후일 독립협회도 정동구락부 구성원이 중심이 되어 출범하였다.
정동화옥으로 외국 귀빈들이 몰리자 손탁은 건너편에 손탁호텔을 지었다. 이 호텔은 1902년에 완공되었는데 2층짜리 러시아풍의 빨간 벽돌 건물이었다.
서양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해 경인선 철도를 타고 경성에 오면 대부분 손탁호텔에서 묵었다.
손탁은 왠지 연속극 <미스터 선샤인에서 호텔 주인 역을 맡았던 쿠도 히나의 모델이 된 여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지노 게임(高宗)은 1852년(철종 3년) 7월 25일, 흥선군 이하응과 군부인 여흥민 씨의 둘째 아들로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동 흥선군 개인 사저(운현궁)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카지노 게임은 일반 또래 아이들처럼 지냈다. 당시 흥선군은 실권은 없어도 전주 이 씨 종친부의 주요 직책들을 맡았기 때문에 조선 시대 기준으로 엄연히 상류층이었다.
카지노 게임의 아명은 ‘개똥이’였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으로 고쳤다. 조선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항렬에 맞춰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가 ‘형(㷗)’으로 다시 개명했다.
1863년(철종 14년) 음력 12월, 일개 평범한 종친으로 살아온 명복의 인생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왕이 된 것이다.
명복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사실 수렴청정은 조대비가 카지노 게임이 15세 되던 해인 1866년(카지노 게임 3년)에 물러나면서 끝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때부터 친정해야 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법적 제도적 근거 없이 살아있는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실질적으로 상왕처럼 군림했기 때문에 카지노 게임의 실질적 친정은 한참 뒤로 밀리게 된다.
카지노 게임은 22세가 되자 직접 통치하려는 강한 의욕을 가지게 되면서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된다.
카지노 게임과 민 왕후는 개항 후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1904년(광무 8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 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카지노 게임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 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 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궁내부대신 박영효가 양위작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7월 21일 탄핵하였다.
1910년(융희 4년)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했고(경술국치), 카지노 게임은 태황제(太皇帝)에서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당했다.
카지노 게임은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붕어(崩御)했다.
카지노 게임 독살설
카지노 게임의 사망을 두고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항간에 퍼졌다. 그날 카지노 게임의 병세가 위중하여 이완용이 궁에 머물며 숙직하였으며 궁전의 나인을 시켜 카지노 게임에게 식혜를 올렸는데 식혜를 마신 후 복통으로 급서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지노 게임에게 식혜를 올렸던 나인 2명도 잇따라 사망했는데 카지노 게임 승하 후 이틀 뒤에 나인 김 씨가 감기로 급사하고, 2월 2일에는 나인 박 씨가 심한 기침으로 사망했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카지노 게임)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인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카지노 게임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崩御)하셨다.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소문은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3.1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덕혜옹주는 아버지가 독살당한 것으로 굳게 믿고 일본 가쿠슈인(學習院)에 다니면서도 먹는 물을 보온병에 따로 챙겨 다녔으며,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정신분열증에 걸릴 정도였다. 일본 황족인 며느리 이방자 여사조차 시아버지가 독살당했을 거라고 말했다.
카지노 게임의 사인이 독살이었다는 주장은 윤치호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진창(韓鎭昌) 씨는 광무 태황제가 틀림없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완벽하게 건강하던 광무 태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 안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했다.
2. 하루 이틀 사이에 광무 태황제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바지를 벗기기 위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閔泳達)과 몇몇 사람들이 약용 솜으로 광무 태황제의 입안을 닦아낼 때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있고, 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목에서부터 복부까지 30cm가량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
5.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습(殮襲)을 한 민영달 씨가 한진창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고 한다.(윤치호 일기-1920년 10월 13일 자)
보통 시신은 사망 후 하루 안에 바로 염을 하는데 카지노 게임의 시신은 4일 정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도쿄에서 유학 중인 황태자가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카지노 게임 시신에서 혀가 없어지고 다리가 붓고, 목, 가슴, 복부 등의 상위 부분에서 일직선 모양의 검은색 선이 목에서 복부까지 눈에 띄게 나타나 있는 것은 정상적인 부패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검은색 부패는 보통 10일 이상을 넘겨야 가능하다고 한다.
카지노 게임의 승하가 기록된 <카지노 게임실록 및 <순종실록은 일제에 의해 편찬되었으므로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순종실록 부록에서는 1919년 1월 20일 카지노 게임의 와병 기록이 있고, 정확한 병명에 대한 언급 없이 도쿄에 있는 왕세자 영친왕에게 전보를 쳐서 알렸고, 이완용(李完鎔)과 이기용이 숙직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또한 사망일 역시 <카지노 게임실록에는 1월 21일로, <순종실록에는 1월 20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칙령 9호로 카지노 게임 승하에 따라 3일간 음주가무를 중지한다고 결정했는데, 1주 뒤에 칙령을 내린 점도 미심쩍다.
당시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지만 만약 살해당했다면 이완용과 이기용이 배후일 거라고 지목되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카지노 게임 독살설의 배후로 이왕직 장시국장을 지낸 한창수 남작과 시종관 한상학을 꼽는 이들도 있다.
이증복은 1958년 12월 16~19일 자 <연합신문에서 1918년 12월 19일에 두 한 씨가 카지노 게임에게 독이 든 식혜를 올려서 독살했다고 기록했고, 구양근 교수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국민대회 성명서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들(이완용 등 친일파)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윤덕영과 한상학을 시켜서 식사와 기미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려서 살해했다.”
독립운동가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의 유신영 편에서는 “역신 한상학, 윤덕영, 이완용이 카지노 게임을 독살했다”라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카지노 게임은 죽기 전에도 독을 탄 음료를 마시고 사망할 뻔한 적이 있었다.
1898년(광무 2년)에 ‘김홍륙 독차 사건’이 있었다. 당시 실각한 김홍륙이 앙심을 품고 평소 카지노 게임이 즐겨 마시던 커피에 독(아편)을 넣었다.
커피마니아였던 카지노 게임은 조금 먹어보고 커피의 냄새가 이상하여 뱉어낸 후 나머지 커피는 버려서화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커피를 마신 순종과 내관은 죽다 살아나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카지노 게임은 독살 위협으로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한때는 외국 선교사 에비슨이 보내준 연유 통조림과 삶은 달걀 몇 개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카지노 게임은 장기간 일본에 시달리면서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지만, 카지노 게임의 죽음은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평소 카지노 게임은 일본에게 순응하는 것같이 보여서 유림은 카지노 게임에게 절도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이 일본인의 손에 독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유림의 태도가 달라졌다.
“카지노 게임황제 폐하께서는 무능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오직 그분만의 책임인가? 우리도 여러 실책을 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니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결국 강경파를 제외한 대다수 유림들은 3.1 운동 등에 참여하여 다른 종교인들과도 상호 연대하고, 파리 장서 사건을 모의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카지노 게임의 장례식은 3월 3일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기왕이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3월 3일에 거사를 하기로 날짜를 정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장례식은 평화롭고 위로의 날이 되어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하루 앞당겨 3월 2일로 정했다.
3월 2일은 주일이었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는 개신교들이 있어서 주일은 안 된다고 반대했다. 결국 다시 하루를 앞당긴3월 1일 토요일로 거사 일이 정해졌다.
<덕혜옹주의 저자 권비영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소설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권비영은 1995년에 신라문학대상으로 등단했다.
2005년도에 첫 창작집 <그 겨울의 우화를 발표하였고, 2009년에 출간한 <덕혜옹주가 베스트셀러 도서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2010년 9월 26일 소설 <덕혜옹주의 표절 문제가 제기되었다. 동명의 소설 <德惠姬를 출간한 일본 작가 혼마 야스코가 한겨레신문 독자 투고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권비영의 소설은 나의 표현과 소 다케유키(덕혜옹주 남편)가 썼던 시의 해석을 베낀 것이다."
한편 권비영도 인터뷰를 할 때 일본 소설 <德惠姬를 많이 참고했고 2008년에 그 책이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에 원고의 상당 부분을 수정해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번역이 되지 않았다면 그대로 출판했을 것이라는 해석일 수도 있어 논란이 일었다.
소설 <덕혜옹주가 주목을 받으면서 2016년 8월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었다. 덕혜옹주는 알려진 대로 강제 일본유학과 정략결혼, 딸의 죽음으로 정신병이 도져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한글학교를 세우고, 조선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던 적은 없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덕혜옹주에 대한 최초 소설로 지난 2009년 초판 출간 후 1백만 부 이상 판매되며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
카지노 게임황제의 막내딸, 조선 최후의 황족, 덕수궁의 꽃이라 불렸던 덕혜옹주는 태어난 순간부터 철저히 정치적 희생자로 살아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카지노 게임황제의 죽음을 목격한 후, 일본으로 끌려가 냉대와 감시로 점철된 십 대 시절을 보낸 그녀는 일본 남자와의 강제결혼, 10년 이상의 정신병원 감금생활, 딸의 자살 등을 겪으면서 정서적, 신체적으로 쇠약해진다.
그 치욕스러운 시간 속에서 그녀를 붙들었던 건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터전을 되찾겠다는 결연한 의지’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은 해방 후에 그녀를 찾지 않는다.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권력층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황족들을 외면했고, 덕혜옹주는 국적도 없이 일본 땅에서 유령처럼 떠돌았다. 결국 37년이 지나서야 그녀는 쓸쓸히 조국 땅을 밟는다.
1912년 소주방 궁녀였던 양춘기는 승은을 입고 카지노 게임의 고명딸 덕혜옹주를 낳았다. 당시 30살이었던 양 씨는 카지노 게임의 다섯 번째 후궁이었고 카지노 게임은 환갑이었다. 순종이 38세였으니 아들보다 어린 후궁이었다.
카지노 게임은 옹주가 태어나자 매우 기뻐했다. 카지노 게임은 틈만 나면 옹주를 보기 위해 모녀를 찾았다. 그러나 모녀는 정식 후궁과 옹주로 곧바로 인정받지 못했다. 양 씨는 ‘복녕당(福寧堂)’으로, 아기는 ‘복녕당 애기씨’로 불렸다.
'덕혜(德惠)'는 1921년에 이복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인데, 그 이전에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한국 측의 기록에는 그냥 '아기씨', '복녕당 아기', 일본 측의 기록에는 姬(ひめ, 아가씨)로만 되어 있다.
훗날 대한민국 호적에도 ‘이덕혜(李德惠)’라는 이름으로 올라갔다.
카지노 게임이 덕혜옹주를 무척 예뻐하고 총애했기 때문에 양 씨의 친정은 불같이 가세가 일어났다.양 씨의 친정 오빠는 백정으로 당시 조선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여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고 궐에 출입하는 귀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곧 카지노 게임이 승하하면서 모녀만 남겨지게 되고 덕혜옹주도 일본으로 보내져 생이별을 당했다.
딸이 일본으로 떠난 후 1926년 조선으로 잠시 왔을 때 만난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양 씨는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일본으로 반강제 유학을 떠난 덕혜옹주는 급히 귀국해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상복도 입지 못하게 했고 슬픔을 추스리기 전에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점점 정신이 피폐해져서 우울증을 앓았다.
대중매체에서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들이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녀는 생각보다 잘 살았으며 만약 정신병을 앓지 않았다면 이혼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기모노를 입고 일본어를 쓰며 살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친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일본어를 사용했다. 물론 그녀가 일본으로 가고 싶어서 자의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13살 때 일본으로 간 덕혜옹주는 19살 때인 1931년 대마도주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국내에서 상영된 연극에서는 덕혜옹주의 남편이 꼽추라는 설정도 있었으나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그녀의 남편은 뛰어난 외모와 학식과 인격을 갖춘 귀족이었다. 다만 덕혜옹주가 왕족인데 반해 그는 황족은 아니었다.
남편 소 다케유키는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엘리트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명문가 자제였다.
처음에는 부부 사이도 좋았다. 신혼 때는 각종 행사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덕혜옹주의 표정이 밝았다.
덕혜옹주는 결혼 전부터 이국 생활의 외로움으로 인해서 발병된 신경쇠약 증세가 있었고 결혼 3년 만에 다시 병이 도져서 대부분 병원에서 살았다.
결국 결혼 생활 20여 년 만에 이혼당했으며 유일한 딸 마사에마저 결혼에 실패한 뒤 자살하자 덕혜옹주는 참기 어려운 세월을 살아냈다.
남편은 덕혜옹주를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곧 재혼했다. 병원비는 영친왕이 지불했는데 병원비가 매우 비쌌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10년이나 정신병원에서 갇혀 살았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서울신문사 김을한 기자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원래 카지노 게임은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은밀히 신랑감을 물색했다. 덕혜옹주가 8살이 되자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다. 김황진이 아들이 없다고 하자 "그럼 조카라도 달라"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이 세상을 뜬 후 약혼은 무효화되었고, 일본은 그녀를 일본인과 결혼시켰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을한 기자는 카지노 게임이 약혼시켰던 김장한의 형이었다.
김을한 기자는 정신병원에 있는 덕혜옹주를 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이승만 정권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박정희 정권으로 바뀌고 미국 출장을 가기 전 박정희 대통령이 잠시 일본에 들렀다. 김을한 기자는 또 찾아가 덕혜옹주의 일을 말했다.
박 대통령은 카지노 게임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정신병원에 갇힌 덕혜옹주는 1962년,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한국에서 정신 치료를 받으면서 영친왕 배우자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서 살았지만 끝내 정신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향년 76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죽음을 앞둔 그녀가 평소 정신이 비교적 좋을 때 삐뚤빼뚤한 한국어로 낙서를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