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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노 Feb 07. 2025

모두 내 카지노 게임 (7)

지성이면 감천이라

그즈음.

같이 살며 농사를 짓던 둘째 동생이 속병을 앓았다. 장정이 54킬로도 안 나갔으니, 온 가족이 걱정을 하였다.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이 녀석을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농사짓는 틈을 내서 산에 가서 풀을 뜯어다 팔았다. 당시에는 인삼 농사를 짓는데 들어가는 큰 줄기를 쪄서 팔면 돈이 되었다. 그 돈으로 한약을 사서 달여 먹였다. 춘화가 날마다 약탕기로 약을 달여 지성으로 챙겨줬다. 어머니께는 동생이 아픈 것을 알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픈 녀석을 거두는 것은 온통 춘화의 몫이었다.

아픈 둘째 동생은같이 누워 있는 돌배기 어린 딸을 많이 돌봐주었다.마치 솟아오르는 태양을 저물어 가는 달빛이 돌보듯 애지중지하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참 쩌릿쩌릿카지노 게임. 기저귀도 갈아주고, 애들 노랫소리를 녹음해 남겨주기도 하면서, 생을 기록하기 위해 애를 썼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애들이 부르던 ‘뚱보 아저씨’와 동생이 부른 ‘잃어버린 30년’ 노랫소리를 지금도 가끔 듣는다. 소나기 같던 그때를 어찌 지내왔는가 아주 까마득하다. 하루하루 삭아가는 동생의 눈빛을 애간장 태워가며 지켜볼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듯 차츰차츰 동생의 안색이 돌아오더니 거동이 편안해졌다. 그즈음 막내가 태어났다. 갑자기 생긴 자식이라 놀랐지만, 어디 자식은 사람이 주는 것인가? 다 신명이 주는 것이니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아들 둘, 딸 둘을 품에 안았다. 그즈음 나이가 마흔 가까웠다.


큰아들 10살,둘째8살, 큰딸6살, 막내4살. 무럭무럭 자라는 새끼들을 보면, 농사만으로는 제대로 키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동생과긴 논의 끝에 우리는 장사를 해보기로 카지노 게임. 당시에 고물상을 하면 큰돈을 번다는 지인의 조언을 듣고, 거금 140만 원에 2.5톤 트럭을 사서 ‘형제 고물 상회’를 시작카지노 게임. 없는 살림에 있는 대로 다 끌어서 산 차에 고사를 지내며, ‘부디 배나 곯지 않게 해 달라.’고 부처님과 신명님께 간절하게 빌었다.


나와 춘화, 동생셋은 함께 카지노 게임을 사러 다녔다. 동생이운전을 하고 낯선 동네에 들어가서

“카지노 게임 삽니다.”

를 외쳤지만 동네 반응은 싸카지노 게임. 다들 맡아 두고 고물을 파는 장사꾼이 따로 있었던 까닭이었다. 어디 초짜가 그런 내막을 알았겠는가? 한 집 한 집 찾아다니며,

“카지노 게임 주세요.”

를 말하는데... 그렇게 부끄럽고 창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 새끼를 생각하면 못할 것이 없었다. 한 곳 두 곳 돌다 보니 차츰 돈이 되는 고물을 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조건 크면 돈이 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고물은 철과 사료 포대 종이가 중량에 따라 돈이 되었다. 요령을 알고 나니, 사료 포대가 많이 나는 곳을 찾아다녔고, 김제에 닭을 많이 사육하는 동네를 알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손끝이 야물어서 사료 포대 종이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각이 딱딱 잡혀서 두 번 손 갈 일이 없었다. 몇 번 찾아가니 달걀도 삶아줘서 먹고 이무롭게지냈다. 한참 뒤에 알게 되었는데, 그곳은 한센병을 앓는 환자가 있는 곳이었다. 그 뒤로도 사료 포대를 구하러 다니며 연을 오래 맺었다.


고물은 계근을 해서 중량 값을 계산카지노 게임. 계근은 짐을 실은 차량 무게에서 짐을 다 내린 무게를 빼서 계산하였다. 매번 그곳에 가면 큰돈을 받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몇 해를 해도 돈 벌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90년에 고물상을 그만둘 때까지 참 많은 것을 구하러 다녔었다.

돈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백과사전이나 학생용 도서 문고가 있으면, 값을 묻지 않고 무조건 사다 두었다. 우리 애들이 한 글자라도 더 읽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애들은 책을 가지고 잘 놀고, 읽고, 뒤적이며 그 속에서 컸다. 그것을 보면 배가 부르고 행복카지노 게임.

아참, 조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애들의 이름을 한차례 바꿔 주었다. 티끌만큼이라도 좋다면 이름 바꿔주는 것이 대수일까? 애비의 이름이 둘이니, 자식도 그 운명을 닮나 보다 했을 뿐이다. 보다 더 생이 편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 사이 검단사 장 선생님도, 장모님도,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지붕을 카지노 게임 잃은 마음이었다. 이제 어디서 ‘왜무수’ 소리를 들어보겠는가? 사람의 인연은 어찌 이렇게 짧은지, 아무리 태연하려 해도 마음이 잡히지가 않았다.


그때 유일한 위로는 내 새끼들이었다. 애들은 공부를 썩 잘카지노 게임. 특히 큰아들은표창장을 수없이 받아 왔다. 그래서 동생과함께 ‘서울대 법학과’를 노래 부르며 키웠다. 배움에 포원이 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식 교육이었으니. 그것이 녀석에게 부담이 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키웠다. 큰 녀석이 공부를 잘하니, 둘째도 절로 공부를 따라갔다. 공부할 때 엄격하게 가르치던 춘화의 공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큰딸도 제법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막내는 영 공부에는 재능이 없어 보였다. 자식이 여럿이면 아롱이다롱이니, 그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막내는툭하면 코피를 흘리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건강만 하거라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애면글면했더랬다.



농사를 돕던 둘째 동생도 33살에 장가를 가서 가정을 꾸렸다. 고향에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94년에는 농협에 취직해서 자리를 잡아갔다. 첫아들을낳아 일가를 이룬 모습을 보니 참 뿌듯카지노 게임. 제수씨는 생활력 강하고 가족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제수씨 덕에 따뜻한 밥을 잡수신다 생각하니 마음의 서리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첫 손자를 어찌나 이뻐하시는지 동생 차를 타고 오셔서 머물다 가시라고 해도, 하룻밤만 주무시고 나면 손자가 보고 싶다며 되돌아가셨다. 자식 카지노 게임은 내리카지노 게임이라더니, 옛말이 딱 맞았다. 그런 어머니를 뵙는 것 또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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