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병원 생활과 벌전
2000년 겨울.
그즈음 꿈자리가 날마다 뒤숭숭했었다.
자꾸 검단이도 보이고. 그래도 애들 생활비에 학비를 벌려면 작업단 일을 빠질 수가 없었다. 하루면 돈이 7만 원인데... 그날은 건물 부지 정리 작업을 했다. 점심까지 조심조심 일을 잘했다. 소나무가 어찌나 큰지 두 사람이 팔을 펼쳐서 안아야 할 만큼 크고 오래된 자리였다. 마음으로 미안함을 고하며 조심히 작업하던 찰나, 옆에 있던 동료가 자른 나무가 나를 향해 덮쳐오는 것이었다.
순간 앞이 캄캄카지노 게임.
'아! 이렇게 죽는 것인가? 카지노 게임는? 내 새끼들은 어쩌지?'
일단 손에 들고 있던 기계톱을 던졌다. 그리고 겨우 머리만 가린 상태로 그 나무 밑에 깔리었다.
우지끈하니 허리가 미칠 듯이 아파왔다. 그 뒤로 어떻게 병원으로 호송되었는가는 기억도 안 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MRI 통에 들어가 촬영을 한다 하였고, 나에게 폐쇄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는 병원에 입원하였다. 온 가족이 병원으로 찾아왔고, 다들 혼이 빠져서 허둥지둥하였다.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이 화도 났고, 병원비며 생활비를 어찌 감당할지 걱정도 되었고, 혼자 있을 춘화가 잘 견딜 수 있을지도 염려도 되었다.
막내가 수능을 막 끝난 때라, 그날부터 3개월 가까이 내 옆에서 병수발을 했다. 다행히 내가 화장실을 걸어 다닐 수 있어서 심부름하고 말동무하는 일을 날마다 해주었다. 큰딸도 퇴근을 하면 찾아와서 보호자 침대칸에 두 딸이 꼭 붙어서, 불편하게 자고 출근하기를 일삼듯 했다. 춘화도 혼자서 처음으로 농사를 준비하고 고추 모종을 키우고 애를 썼다. 주변에서 둘째 동생이 왔다 갔다 하면서 자주 둘러봐 주었다.
불쑥 찾아온 큰아들 내외가 쑥쑥 자란 손녀를 데리고 와서 보여주었다. 더 보고 싶었지만 병원이 애한테 해로울까 봐 서둘러 돌려보냈다. 내가 혹시라도 잘못되었다면 저 예쁜 것들을 못 볼 뻔했구나 하는 생각에 명치끝이 아파왔다. 병실 옆자리 동생이
“형님 참 부럽습니다. 참 다복하네요.”
를 몇 번이나 찾았는가 모른다.
‘감사합니다. 신명님. 귀한 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그해 6월이 다되어서야 나는 보조기를 차고 퇴원할 수 있었다. 안방 아랫목에 누웠더니 카지노 게임가 풀썩 주저앉아서 나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더랬다. 뒤에 막내가 앉아서 그런 카지노 게임를 다독이고 또 다독이는데도 울음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
침대 없이 맨 땅에 눕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무에 맞은 척추 뼈가 튀어나와서 자꾸 받쳤지만 우리 형편에 침대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남은 평생을 반듯하게 눕지 못하고, 새우등처럼 우그리고 잠을 청카지노 게임.
그 뒤로 막내는 대학에 들어갔고, 큰딸은 야무지게 돈을 벌었고, 둘째 아들도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학 연구단으로 들어가 공부를 했고, 첫째 아들은 든든한 가장 역할을 카지노 게임. 그리고 명숙 동생과의 인연도 깊어 갔다. 답답한 나의 속내를 알기에 우리 부부를 데리고 기도를 몇 차례 다녀왔다.검단사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허리가 아파서 산에 오를 수 없으니, 명숙이 차를 타고 인근의산에 다녔다. 모든 신명은 같은 마음이시니, 이 답답함과 송구함을 아실 것이라 믿으면서.
그해 가을걷이는 여러 사람의 손을 빌려서 가능했다. 뒷집 동생도, 둘째 동생도,마을 사람들도, 많이들 내 일처럼 도왔다. 앞으로 무엇을 해 먹고살아야 할까를 고심하고 또 고심했지만 답이 보이지 않았다. 허리가 예전과는 달라서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불같이 일었다.
대학생을 키우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조 선생님 앞에서 호언장담하던 것이 엊그제인데, 몸이 아프고 보니 쉽지 않았다. 다행히 막내는 장학금을 받아서 학교를 다녔다. 헌데 둘째 아들공부를 1년만 더 가르치면 좋았을 텐데, 돈을 벌겠다면서 타지로떠났다. 내 몸만 성했어도 공부를 더 시키고 싶었는데, 새삼스럽게 야속카지노 게임. 죽어라 해도 안 되는 것이 또 있다니...
다행히 둘째는 그곳에서자리를 잘 잡았다. 지금 둘째 며느리도 그 회사에서 만났다. 그사이 큰아들이 농협 비정규직으로 취직을 했다. 기틀을 잡아줬으니... 큰아들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큰 놈은 경찰이나 법 관련 일을 해먹을 사주였는데... 아쉽지만 돈을 만지는 일을 해도 잘할 것이었다. 꼼꼼하고 차근한 성품이라 실수가 없을 것이기에 이 또한 차선으로 괜찮았다.큰딸도 회사를 슬슬 옮기려 했고, 한두 해만 더 바짝 벌면 막내까지 졸업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 기계톱을 잡았다.
나무를 자르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 것은 알지만, 애들은 키워야 할 것이 아닌가?
불편한 허리에 복대를 차고 오랜만에 잡은 기계톱은 솔직히 무서웠다. 자꾸 그날의 공포가 떠오르기도 하고, 이러다 더 다칠 수 있다는 무섬도 일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해야지. 몇 개월 후 그 우려가 또 현실이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실수로 왼쪽 다리를 상하게 했다. 그렇게 다시 병원에 입원해서 또 몇 개월을 살았다. 이것이 신의 벌전인 것을 알지만, 입에 풀칠은 하고 애 학교는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의사 선생님도 이해 못 하는 호흡곤란이 찾아와 급하게 명숙 동생의 도움을 받았다. 춘화와 애들이 눈길에 검단사 밑에 가서, 벌전을 풀어 달라며 빌고 또 빌었다. 이미 마음으로 죄인 것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장사도 농사도 그 무엇도 돈이 되지를 않았으니, 몸으로라도 벌어먹으려던 것이 이런 참담한 꼴이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인 것을 알지만... 그것이 인간이려니 하며 꾸역꾸역 살았던 것이 죄였다. 그렇게 용서를 빌고 병원으로 돌아와 의사의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 링거는 지긋지긋했다. 예민한 몸이라 자꾸 혈관이 숨었고 날마다 뚫은바늘에 팔이 멍들어갔다. 춘화가 또 병원과 농사일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열성을 다했다. 아휴, 내 저 사람을 저렇게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한 달 넘게 두 딸들이 옆에 붙어서 나를 살폈다. 둘 다 일 끝나면 부리나케 찾아와서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바쁜 아들들도 가끔 찾아왔다. 몸이 좀 호전되어 일반 병실로 옮긴 다음에는 그 좁은 보호자 침대칸에 춘화와 큰딸, 막내가 붙어 앉아 생활을 했다. 내 이리 카지노 게임을 가득 받고 있다니 무슨 복이려나? 그렇게 몇 개월 후에 목발을 짚고 집으로 돌아왔다.
카지노 게임는 내 환갑잔치를 아주 거나하게 치러줬다. 식당을 잡아서 카지노 게임에게 맛있는 밥을 대접했다. 마을 어르신들도 모시고 온 가족에, 먼 친척까지 초대해서 잔치를 열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 환갑 때 돼지 두 마리를 잡아 마을 잔치하던 때가 자꾸 생각이 났다. 우리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