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억나니? 그날 이후로 너와 나는 종종 아파트 복도나 엘리베이터, 단지 안 놀이터에서 마주치고는 했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나를 향한 카지노 게임 마음을 볕이 잘 드는 양지로 이끌었는지도 몰라. 그것은 신의 계시였겠지. 아마 우리는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평생 서로를 찾아다니는 반쪽짜리 인간이었을 거야. 딱한 사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신이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이곳에서 만나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지. 너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네가 해맑게 웃으며 나를 언니라고 부를 때마다 심장의 피가 거꾸로 뛰듯이 흥분되고 숨이 가빠지면서 얼굴이 빨개지곤 했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너는 말했어. 언니. 왜 이렇게 귀여워요? 어느 오후 너는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어. 나는 현관문 외시경으로 바깥에 서있는 너를 말없이 바라보았어. 카지노 게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어.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 집 한 구석에는 삽화를 스케치한 캔버스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초라한 노트북 한 대가 윙윙 거리면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어. 내가 움직일 때마다 지독한 정수리 냄새가 뒤 따라다녔고 사람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과 피지냄새로 집안 곳곳이 뒤덮여있었어. 나는 왠지 네가 우리 집으로 들어올 것만 같아서 일부러 기척을 내지 않고 숨죽이고 있었어. 이 더럽고 냄새나는 집구석에 누군가를 들이고 싶지 않았고 특히나 하얀 캔버스처럼 순수해 보이는 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아니야. 그냥 나는 누군가 나의 실체를 아는 것이 싫었을 거야. 남루한 삶을 이어가는 데에도 많은 비밀이 필요한 법이니까.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너와 나는 마지막 전투를 하려는 장수들처럼 비장하게 대치했어. 우리를 가로막은 금속성의 차가운 적요가 어느덧 비등점에 도달해서 오후의 환영 幻影 속으로 휘발될 때쯤 너는 손 뒤에 감추고 있던 하얀 백설기를 외시경 앞에 가져다 대며 말했어. 언니. 안에 있죠. 이거 같이 먹어요. 문 좀 열어줘요. 나 더운데. 백설기의 하안 살점이 외시경을 가득 채우자 나는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을 추스르며 무표정으로 너를 환영 歡迎 했어. 너는 그림자처럼 문 틈새로 들어왔고 네가 들어오자 집안의 공기가 정화되는 것 같았어. 왜 이렇게 어두워요? 너는 성큼성큼 거실 창문으로 다가가서 커튼을 젖혔어. 초여름의 강렬한 햇빛이 열기를 머금고 거실에 쏟아져 내렸어. 때가 끼고 얼룩진 창문 앞에서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너는 순결한 처녀처럼 보였지. 하얀 원피스 사이로 서슴없이 드러난 카지노 게임 윤곽을 보고 누군가에게 더럽혀질 카지노 게임 알몸을 상상했어. 어둠이 걷히자 카지노 게임 얼굴이 드러났어. 피와 멍으로 얼룩진 그 얼굴. 나는 눈을 감고 회색 티셔츠 속에 함몰되어 있던 유두가 딱딱해지는 것을 느꼈어.
5.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잖아. 난 누군가에게 마음을 읽히고 싶지 않아. 바닥에 뒹굴고 있던 내 그림을 보고는 왜 사람들 얼굴에 눈동자가 없어요?라는 너의 질문에 난 그렇게 답했지. 내 대답에 흡족한 듯이 너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참을 웃었어. 이상하게도 그 웃음에는 절망과 잔혹함이 묻어있었어. 당연하지. 네 얼굴은 피와 멍으로 얼룩져 있었으니까. 무한한 생명이 숨 쉬고 있던 너의 깊고 검은 눈동자는 무엇에 쫓기듯이 다급해 보였어. 누군가를 향해 도움을 청하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지. 나는 너의 그 카지노 게임 쳐다볼 수 없었어. 솔직하자면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어. 왜냐하면 예상된 불행이 야금야금 너를 좀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니까. 그 처절하고 간교한 바람을 너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언젠가 나는 너의 눈에서 비밀스러운 희망을 엿본 것 같기도 하고 움직이는 슬픔을 본 것 같기도 해.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그래도 확실한 건 마지막으로 본 너의 눈빛에서 나는 그것을 뚜렷하게 보았다는 거야. 채워지지 않을 나의 마음속의 마음속의 마음을. 지워지지 않을 너에 대한 기억 속의 기억 속의 기억을. 아마도 나는 무겁게 박제된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갈 거야. 나의 안전한 절망이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이 되어 날카롭게 나를 베어버리면 그 상처는 박제가 되어 내 몸 한편에 자리 잡을 테니까.그렇다고 내 삶이 더 많은 중량을 가지진 못할 거야. 왜냐하면 나는 이미 달콤한 죽음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너는 선홍빛 혀로 하얀 백설기 조각을 올려놓으면서 말했어. 언니가 참 부러워요. 너의 그 말은 잘 벼린 칼날이 되어 내 안에 어떤 여린 부분을 깊숙이 찔렀어. 나는 무뎌진 칼날로 백설기를 썰면서 씁쓸하게 웃었지. 생각 없이 뱉은 너의 그 말에 나는 당혹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꼈어. 하지만 내가 카지노 게임 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기억할 수 없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 백설기처럼 무표정하게 백설기를 씹어댔어. 나도 조각난 백설기를 한 조각 입에 넣었지. 차가운 백설기는 입 안에서 버석거리면서 녹아내렸고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그 하얀 덩어리는 아주 천천히 부서져갔어. 그렇게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서 거친 모래 알갱이 같은 백설기를 오랫동안 나누어 먹었어.
6.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너의 집에서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 집안에 물건들이 과격하게 부서지고 파괴되고 해체되는 소음들. 그리고 그 소음들 사이로 너의 비명도 들렸어. 너의 비명은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타고 나의 어두운 공간으로 소리 없이 넘어와 나의 어두운 공간에서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춤을 추었어. 그리고 나는 교활하게 웃으며 소리 없이 흘리는 너의 눈물을 읽었지. 두꺼운 콘크리트 벽은 너의 집에서 퍼져나가는 시끄러운 소음들을 희석해주지 못했지만 나는 차라리 그것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너의 불행이 곧 나의 구원이었으니까. 네가 소리를 지르며 온몸으로 불행을 받아들일 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희열이 번지고 기쁨이 맥박처럼 고동을 쳤어. 내 안에서 거세게 요동치는 기괴한 환희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때도 있었지. 그렇게 불행이 너를 좀먹은 밤이면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잠자리에 들었어. 너에게는 악몽 같은 밤. 나에게는 사춘기의 남자아이의몽정 같은 달콤한 밤. 그런 밤이 지나면 너는 우리 집 초인종을 눌러댔어. 나는 점점 시들며 메말라가는 너의 얼굴과 몸을 맞이하면서 네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기만을 기다렸던 거야.그래야 영원히 구제받을 것 같았거든. 이 지옥에서 말이야. 그날도 너는 폭력으로 물든 너의 육신을 힘겹게 데리고 우리 집을 찾아왔어. 한 손에 커다란 종이를 말아 쥐고서. 너는 선물이라며 그것을 나에게 넘겨주었어. 동그랗게 돌돌 말려진 그 종이를 펼쳐보았어. 그것은 모딜리아니의 그림이었지. 목이 길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여 멍하니 정면을 쳐다보고 있는 여인들. 익숙하게도 그대들은 모두 눈동자가 없었어. 너는 그 그림이 내가 그린 그림을 닮았다며 선물이라고 내게 준거야. 너는 뚱한 내 표정을 억지로 읽어보려고 애쓰면서 말했어. 언니가 저번에 말했잖아요.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마음이 가려져 있으니 아무리 쳐다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되려 쳐다보는 상대방이 긴장하게 되고 당황하게 돼요. 그러다 왠지 나 자신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침묵에 이상하게 평안해져요. 그래서 그때 언니가 그린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편안했나 봐요. 언니가 카지노 게임 안 그려 넣길래. 그런 그림이 또 있나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언니 주고 싶어서 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바보처럼 해맑게 웃었어. 앞니 하나가 부러진 너는 정말 순진한 동네 꼬마처럼 보였지. 인간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나 봐. 네 얼굴에 남겨진 서늘한 폭력의 흔적들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지.그때마다 나는 나의 지옥으로부터 한걸음 멀어져 가고 있다고 느꼈어. 불행에 잠식되어 무너져가는 너보다는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거야. 나 따위 인간보다 미련하고 더욱더 한심하게 이 지옥에서 버티는 인간이 있구나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로였고 구원이라고 생각했어. 너의 집에서 날카로운 파열음들이 들릴 때마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이면서 너의 불행을 포식할 준비를 했지. 화평을 침범하는 악랄한 파괴자처럼 나는 숨죽여서 교활하게 웃음 지었어. 네가 모르는 나만의 어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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