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깊은 사유와 성찰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작품입니다. 도쿄의 평범한 화장실 청소노동자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저는 예기치 못한 삶의 아름다움과 존재의 무게, 그리고 예술의 의미를 발견하며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행복 강박 시대’, 우리에게 던져진 낯선 질문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 흐르는 새벽 도로를 달리며 눈물과 미소를 동시에 머금던 히라야마의 마지막 얼굴은 강렬한 잔상으로 남아 저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복잡하고도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은, 어쩌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가닿고자 하는 지점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일 겁니다. 그것은 단순한 행복이나 슬픔이 아닌, 살아있기에 온몸으로 겪어내는 모든 감정의 총체,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단어, ‘감동(感動)’ 그 자체의 얼굴 아니었을까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
이 마지막 장면의 강렬한 인상으로부터 저는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행복 강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또 나 자신에게 “행복한가?”를 묻지만, 과연 그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객관적 ‘인증 수단’이나 ‘경쟁적으로 획득해야 할 상품’처럼 행복의 본질이 흐려진 것은 아닐까요? 오히려 ‘행복해야 한다’라는 강박 자체가 우리를 옭아매며 우리 스스로를 오히려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닐까요?
저는 10년 전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어 한국을, 그리고 서울을 떠났습니다.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또 표류하다 마침내 닿은 ‘나만의 위도에 꼭 맞는 섬’에서 저는 마침내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 자체를 놓아버릴 수 있었죠. 제 책에도 썼지만, 우리에겐 ‘행복하지 않을 권리’도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각자의 고유한 좌표 위에 자신만의 작은 섬을 발견하고 가꾸어 갈 수 있다고, 저는 제 삶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잡지사카지노 게임 피처 에디터로 일할 때 제 인생 첫 인터뷰이였던 광고인이자 인문학자, 박웅현 선생님의 통찰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은 인터뷰에서 행복은 목표나 결괏값이 아닌 “찬란한 순간의 합”이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삶에서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본질’과 단단한 ‘자존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인문학의 힘이 절실하다며, 인문학이란 ‘많이 느끼고 반응하는 것’, 즉 ‘감동’하는 능력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영화의 엔딩 씬에서 히라야마의 마지막 표정은 저에게 바로 이 지점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행복’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경험, 외부에 전시하거나 점수 매길 수 없는, 살아있기에 마주하게 되는 모든 순간의 복합적인 울림, 바로 ‘감동’의 본질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감동은 성취하거나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마주하는’ 것이기에, 행복을 도구화하고 상품화하려는 현대 사회의 논리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습니다. 히라야마는 스스로 ‘나는 행복한가?’를 묻는 대신 ‘나는 매 순간 감동하며 살 수 있는 삶인가?’라는 질문에 온몸으로 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일랜더 여러분과 함께 바로 그 ‘감동’의 실체를 찾아 영화의 면면을 탐색하는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빔 벤더스, 오즈의 도쿄카지노 게임 ‘코모레비’를 만나다
독일 ‘뉴 저먼 시네마’의 거장인 빔 벤더스 감독은 여전히 세상을 향한 따뜻하고 깊은 시선을 잃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서 인간의 삶을 천사의 눈으로 멀찍이 관조하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땅으로 내려와, 히라야마라는 한 인간의 숨결과 체온을 고스란히 느끼게 합니다. 극적인 사건이나 설명을 최대한 배제하고,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행위와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인내심 있게 따라가는 연출 방식은 그가 오랫동안 깊은 존경심을 표해 온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세계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합니다. 빔 벤더스는 자신의 초기 다큐멘터리 <도쿄가(1985)를 통해 오즈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와 애정을 이미 증명한 바 있지요.
빔 벤더스 감독
고전적 프레임과 음악을 빚어내는 일상의 연금술
<퍼펙트 데이즈에서 일관되게 사용된 1.33:1의 고전적인 아카데미 화면 비율은 오즈에 대한 명백한 경의의 표현입니다. 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프레임은 시선을 화면 중앙으로 모아 히라야마의 고요하고 응축된 세계에 집중하게 만드는 동시에 오즈 영화 특유의 안정감과 관조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그 친밀한 거리감 속에서 관객이 히라야마의 감정에 조용히 동참하도록 이끕니다.
이는 감정의 폭발과 함께 프레임을 확장하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던 자비에 돌란 감독의 <마미와는 정반대의 접근입니다. <마미가 화면 비율의 ‘변화’를 통해 감정의 해방을 극적으로 표현했다면, <퍼펙트 데이즈는 ‘일관성’을 통해 히라야마의 꾸준하고 안정적인, 그러나 결코 정체되어 있지 않은 내면의 리듬, 그 성실한 시간의 결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냅니다.
영화 <마미
벤더스 감독은 오즈의 정적인 세계에 ‘음악’이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역동성을 부여합니다. 히라야마의 낡은 승합차 안은 카세트테이프가 재생되는 순간, 60~70년대 록과 소울이 울려 퍼지는 이동식 콘서트홀이자 그만의 극장이 됩니다. 도쿄의 평범한 도로는 그의 음악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지닌 풍경으로 변모하며, 이는 평범한 일상을 예술적 순간으로 승화시키는 벤더스만의 놀라운 ‘일상의 연금술’입니다.
공중화장실카지노 게임 길어 올린 존엄과 아름다움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이라는 실제 공공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16명이 참여해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17개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였죠. 이 프로젝트의 다큐멘터리 감독을 제안받은 벤더스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시부야의 공공 화장실 소개 제안을 넘어, 이 공간들과 그 이면에 담긴 일본 특유의 ‘공공 정신’과 ‘책임감’에 매료되어 장편 극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공중 화장실’이라는 아주 일상적이고 어쩌면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공간에서 이런 아름다운 영화가 탄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있죠.
영화 <퍼펙트 데이즈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의 존재 자체에 벤더스가 감탄한 것 또한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의 아름다움에 이름을 붙이는 그 섬세한 감수성이, 바로 히라야마가 매 순간 발견하고 느끼는 ‘감동’의 원천과 깊이 공명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보편적인 주제, 즉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감동’의 가능성을 길어 올린 것입니다. 일본인 공동 각본가와의 협업은 이러한 문화적 디테일을 존중하려는 벤더스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도쿄 스카이트리는 히라야마의 삶과 흥미로운 대비를 이룹니다. 하늘 높이 솟은 이 거대한 인공 구조물은 현대 기술의 집약체이자 수직적 상승 욕망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이는 땅에 발을 딛고 소박하며 수평적이고 순환적인 리듬 속에서 ‘텅 빈 충만함’을 찾는 히라야마의 삶과 대조를 이루며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진정한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 스카이트리가 아무리 높아도, 히라야마가 땅을 밟고서, 나뭇잎 사이 햇살 속에서, 낡은 카세트테이프 음악 속에서 느끼는 내면의 고요한 감동과 평온함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배우 야쿠쇼 코지. 극도로 절제된 대사 속에서도 그는 눈빛과 표정, 미세한 몸짓만으로 히라야마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완벽하게 그려내며, 과묵한 인물의 삶에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그의 연기 자체가 또 하나의 깊은 ‘감동’입니다.
‘자기만의 섬’을 가꾸는 ‘생활 철학자’의 초상
히라야마는 누구일까요? 그는 현대 사회의 소음과 욕망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도시의 은둔자’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와 충만함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생활 철학자’이자, 매 순간을 정성껏 대하는 ‘시간의 장인’입니다.
그는 ‘땅보다 하늘을 더 자주 보는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은 땅의 더러움을 향해 있지만, 그의 영혼은 끊임없이 하늘, 빛, 나무와 같은 더 높고 본질적인 가치를 향하죠.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습관은,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경이로움을 느끼려는 ‘감동’을 향한 의지이자, 하루를 축복하는 경건한 의식처럼 보입니다.
저는 그를 ‘자기만의 위도에 꼭 맞는 섬을 찾아 정성껏 가꾸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제가 운영하는 이 채널 ‘조하나의 아일랜드’와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죠. 우리 모두 제각각 따로 떨어진 고독한 섬이지만, 때로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고 잠시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히라야마는 바로 그 자신만의 섬을 건강하게 가꾸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부유해 보이는 여동생과의 냉랭한 관계는 그가 어떤 세계로부터, 어떤 상처를 안고 떠나왔는지를 암시하며, 그 섬에 도달하기까지 쉽지 않은 ‘영혼의 항해’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진정한 미니멀리즘: ‘본질’만 남긴 ‘텅 빈 충만함’
그렇게 어렵게 찾은 ‘자신만의 섬’이기에, 그는 ‘버릴 건 다 버리고, 챙길 것만 챙기며’ 그 섬을 가꿉니다. 이것이 그의 진정한 미니멀리즘입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마저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 본질이 없는 미니멀리즘은 지속되지 못합니다. 유행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은 공허하며 결국 다시 채우려는 욕망으로 회귀하기 쉽죠. 하지만 히라야마의 미니멀리즘은 그의 ‘본질’, 음악과 책, 자연과의 교감, 노동의 가치, 조용한 사색 등에 집중한 결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의 삶은 물질적 부족함이 아닌 ‘텅 빈 충만함’, 즉 내면의 울림과 순간의 경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영화는 허세를 부리거나 즉흥적인 만족을 쫓는 동료 타카시, 혹은 어딘가 결핍되어 보이는 도시의 사람들과 히라야마를 대비시키며, 외적인 조건이나 순간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매일 아침, 성실함으로 가꾸는 ‘내면의 정원’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는 어떻게 권태에 빠지지 않고 매 순간 ‘감동’의 가능성을 발견할까요? 그 답은 바로 ‘보통의 삶을 견지하는 성실함(誠實함)’에 있을 것입니다. 그의 성실함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매 순간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고, 그 과정 자체에 온전히 몰입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마치 선(禪) 수행자가 호흡에 집중하듯,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매일 아침, 그는 알람 소리 대신 이른 새벽을 여는 이웃의 비질 소리 같은 세상의 자연스러운 소리에 조용히 눈 뜨고 옅은 미소를 짓습니다. 자신이 선택하고 가꾸어 온 현재의 삶에 대한 깊은 긍정의 증표입니다. 반복되는 하루가 지겨움이 아닌 예측 가능한 안정감과 소소한 기쁨, 즉 매일 새롭게 마주하는 ‘감동’의 시간임을 알기에, 그는 새로운 아침을 평온과 기대로 맞이합니다. 그의 평온함은 타고난 무던함이라기보다는 외부 환경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오랜 시간 정성껏 가꾸어 온 ‘내면의 정원’에서 비롯된 단단한 자존감의 발현일 것입니다. 이 ‘성실함’이야말로 그가 권태를 이겨내고 평범함 속에서 끊임없이 순간의 경이로움을 길어 올리는 힘의 원천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세상을 닦으며 나를 세우는 ‘청소’라는 의식
히라야마가 노동하는 모습은 그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존엄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는 마치 장인이 작품을 다루듯 맡은 공간 하나하나를 존중하며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쓸고 닦습니다. 그의 효율적이면서도 정갈한 움직임, 오염을 찾아내는 집중된 눈빛, 완벽하게 정돈된 도구들은 그가 자신의 일에 얼마나 깊은 ‘성실함’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죠. 사회가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노동에 임하는 이 존엄한 태도는, 그의 ‘성실함’이 단지 내면의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로 발현됨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세상을 정돈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능동적인 충만감이자 ‘감동’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태도에서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세상을 정갈하게 만드는 행위에 대한 어떤 ‘신성함’마저 느껴집니다. 이는 그의 삶이 결코 수동적이거나 현실 도피적이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저 역시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스쿠버다이빙 일을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잘 나가던 잡지사 기자 일 그만두고 그렇게 힘든 일을 왜 하냐” “몸으로 때우는 일은 하는 게 아니다” 하며 말리더군요. 20킬로쯤 되는 스쿠버 장비를 장착한 채 하루에도 서너 번씩 바닷속에 뛰어들고, 사람들에게 다이빙을 가르치는 일은 화려한 도시 서울에서 저 자신을 속이며 사는 것보다 훨씬 멋졌어요. 매일매일 시간이 쌓이며 스쿠버 탱크를 나르고 밸브를 열고 잠그느라 손에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했는데 저는 그때만큼 저 자신이 자랑스럽고 떳떳하고 뿌듯했던 적이 없습니다. 손님 중에는 가끔 다이빙 강사라고 무시하거나 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는 화가 나기보단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또 앞으로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경험할 일이 없을 사람들이 오히려 안타까웠지요. 자존감과 자존심은 분명히 다르다는 걸 저는 그때, 그 섬에서 깨달았습니다. 다이빙 일,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진중하게 하냐고, 그냥 재미로 대충 하라고 말하는 외국인 동료 강사들도 있었는데, 저에게는 바닷속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특별했습니다. 저에게 다이빙은 히라야마가 청소일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닦아내는, 저만의 신성한 의식이었습니다. 1년 내내 티셔츠와 반바지 몇 벌, 플리플랍 한 켤레만으로 살았지만 제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여백이 많고, 또 풍요로웠습니다.
과거의 그림자를 품은 현재의 빛
하지만 히라야마를 너무 이상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는 그의 삶을 매력적으로 그리지만, 노동의 고됨이나 경제적 상황, 이따금 찾아오는 외로움 등 현실의 어려움은 분명 있으니까요. 벤더스 감독은 자신이 히라야마의 삶과 도쿄라는 도시를 다소 미화시킨 측면이 있지 않을까, 카지노 게임 고민을 했었다고 해요. 당연히 히라야마의 완벽해 보이는 루틴 이면에는 감춰진 내면의 갈등이나 어두운 면도 있었겠죠. 그의 극단적인 과묵함이나 과거를 외면카지노 게임 듯한 태도는 평온함의 증거일 수도 있지만, 어떤 상처나 회피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의 현재 중심적 삶은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도피라기보다는, 과거의 무게를 인정하고 현재를 긍정하며 살아가려는 스토아 철학적인 ‘아모르파티(Amor Fati)’ 혹은 실존주의적 결단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조카 니코와 여동생과의 만남 후 그가 흘리는 눈물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란 불가능하며 감정적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평온함이 모든 감정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있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의 과거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삶의 모호함과 인물의 입체성을 존중하며, 그의 평온이 상처와 고통을 딛고 피어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
그가 매일 아침 정성껏 돌보는 작은 새싹은 그의 시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물을 가꾸는 행위는 미래를 향해 있지만, 그의 핵심적인 동기는 ‘내일’의 결과 자체가 아닌 듯합니다. 그의 삶의 태도는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今度は今度、今は今)”이라는 말처럼 철저히 현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새싹에 물을 주고 들여다보는 그 순간, 그는 오롯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작은 생명과 교감하는 현재의 충만함, 그 자체로의 ‘감동’을 누립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도구화하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아냄으로써 자연스럽게 ‘내일’을 맞이하는 것이죠.
제가 에디터 시절 인터뷰했던 뮤지션 카지노 게임 사이트|카지노가 기억나는데요. 당시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 방황했던 저에게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살지 말자”라고 하시더군요. 선생님의 노래 중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라는 곡이 있어요. 가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리 알 수 있는 것 하나 없고 후회 없이 살 수 있지도 않아.’
히라야마는 삶의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함으로써 미래를 맞이합니다. 그의 삶은 별거 아닌 듯 보이는 작은 루틴이 모여 하루를 완성하고, 그 하루들이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는 삶의 근원적인 비밀을 체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아날로그 연가(戀歌): 삶은 여전히 ‘조용한 저항’이다
히라야마의 섬을 이루는 중요한 풍경 중 하나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입니다. 스마트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그의 세계는 디지털 소음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분리된 아날로그적인 섬처럼 느껴지죠. 그가 사용하는 카세트테이프, 필름 카메라, 헌책방에서 구해온 종이책들은 단순히 오래된 물건이 아니라 그의 삶의 철학을 반영하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사진 작업도 활발히 하는 빔 벤더스 감독 자신의 아날로그 매체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죠.
영화 <퍼펙트 데이즈
디지털 시대의 즉각성과 무한함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기 쉬운 가치들, 선택의 신중함, 기다림의 설렘, 과정의 즐거움, 물질과의 진정한 교감을 그는 아날로그적 실천을 통해 지켜나갑니다. 저 역시 카세트테이프부터 스트리밍까지 모든 시대를 경험한 세대로서 이 지점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찾기 위해 레코드점을 뒤지고, 누군가를 위해 한 곡 한 곡 녹음하던 시간과 정성. 그 ‘수고로움’과 ‘희소성’이 음악을 듣는 경험 자체를 특별한 감동으로 만들었지요. 그렇게 한겹, 한겹씩 알게 모르게 쌓여 취향이 됩니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듣기 위해 라이브클럽이나 콘서트장을 찾아가죠. 그리고 거기서 만나는 수많은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과 위로와 존중이 넘치는 순간이죠. 음악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이 없거든요.
하지만 지금, 언제든 세상의 모든 음악에 접근할 수 있는 이 ‘풍요’ 속에서, 역설적으로 저는 음악을 ‘지금, 이 순간’ 덜 절실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언제든 들을 수 있기에 감상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풍요 속의 빈곤’ ‘선택의 역설’을 느낍니다. 히라야마가 낡은 카세트테이프를 고르고 플레이어에 넣는 행위는 음악을 ‘지금, 이 순간’ 온전히 경험하려는, 시간과 기억이 각인된 ‘사물’과의 교감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적인 선택입니다. 그가 60~70년대 음악을 고집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역사와 기억이 그 음악들에 깊이 엉겨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스트리밍의 편리함 대신 시간의 무게가 담긴 감동을 현재로 불러오려는 그의 의지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그의 필름 카메라는 이러한 태도를 더욱 명확히 보여줍니다. 스마트폰으로 수백 장의 사진을 쉽게 찍고 지우는 시대에 제한된 필름은 매 순간 셔터를 누르는 행위에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그가 ‘코모레비’를 찍는 순간들은 그래서 더욱 밀도 높게 다가옵니다. 무수한 순간 속에서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 즉 순간의 경이로움과 존재의 충만함을 주는 ‘찰나’만을 길어 올리는 행위입니다. 또한 필름 사진은 ‘기다림’을 필요로 하죠. 현상과 인화라는 물리적인 시간은 결과물에 대한 설렘을 더하고, 과정 자체의 가치를 일깨웁니다. 현상된 필름과 인화된 사진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로서, 그의 시간과 시선이 담긴 물질적인 기억의 저장소이자 ‘감동’의 증거가 됩니다. 이는 쉽게 복제되고 휘발되는 디지털 데이터의 가상성과는 다른, 아날로그 매체가 지닌 ‘영속성’과 ‘존재의 무게감’을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그의 아날로그적 실천은 세상을 신중하게 인식하고, 기다림의 가치를 알며,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삶의 철학을 반영하는, 속도와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조용한 저항’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퍼펙트 데이즈의 여백을 채운 노래들
음악은 그의 가장 중요한 언어이자 동반자입니다. 그의 카세트테이프 컬렉션은 그의 정체성, 삶의 태도, 그리고 영화 전체의 정서를 형성하며, 각 곡의 선택과 배치는 영화의 주제 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내죠.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애니멀즈(The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은 파멸과 후회를 담고 있습니다. 히라야마의 평온한 일상과 대조를 이루며 역설적인 깊이를 더하죠. 어쩌면 그의 현재가 과거의 ‘무너진 집’으로부터의 극복임을 암시하거나 세상의 어둠을 노래하는 음악을 들으며 오히려 자신의 성실한 삶의 가치를 확인하는 복합적인 ‘감동’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영화 제목과 동명의 제목을 가진 루 리드(Lou Reed)의 ‘Perfect Day’는 표면적인 완벽함 이면에 어두운 해석도 가능하지만, 히라야마는 이를 자신의 소박하고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발견카지노 게임 ‘완벽함’, 즉 작은 순간들이 모여 이루는 충만한 합과 연결합니다.
히라야마의 직장 동료 타카시가 공을 들이는 여자친구 아야와의 만남카지노 게임 흐르는 곡, 패티 스미스(Patti Smith)의 ‘Redondo Beach’에는 젊은이의 슬픔과 혼란, 불안정함이 담겨 있죠. 잡지사에 일할 때 저는 패티 스미스 내한 당시 독점 인터뷰를 했었는데요. 개인적으로 너무 팬이어서 인터뷰 전날 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그녀는 전설적인 뮤지션이자 시인이자 작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패티 스미스 인터뷰 사진 <아레나옴므플러스
패티 스미스|사랑을 위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우리 모두 제각각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힘을 강조하며, 물질주의를 비판하고, 과정의 진정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로큰롤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 저에게 저항하며 살라고 말해줬죠. 이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의 삶과 놀랍도록 공명합니다. 히라야마의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흐르던 패티 스미스의 목소리는 아야의 스포티파이 세상으로 이어지죠. 이 순간은 저에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 간의 ‘우발적인 공감’이 이루어지는 기적적이고도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광활한 세상 속 외딴섬 같은 우리가 예기치 않게 낯선 타인에게서 경험하는 깊은 이해와 연결의 순간이죠. 아야는 히라야마의 표면 너머 진실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공감합니다. 히라야마의 조용한 수용은 침묵으로 그 공감에 응답하죠. 이 우발적 교감은 언어와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의 힘과 희망의 씨앗을 보여줍니다. 패티 스미스의 담대한 저항 정신이 훗날 아야의 삶으로 이어지길 개인적으로 바라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 흐르는 마지막 씬은 압권이죠. 새로운 시작과 삶에 대한 긍정을 노래하지만, 니나 시몬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과 고통을 이겨낸 강인함이 담겨 있습니다. 히라야마가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과 미소를 동시에 보이는 것은, 그의 삶이 단순한 평온이 아니라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하고 쌓여 이루어진 것임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아있음’, 그 자체에, 즉 삶의 모든 빛과 그림자에 ‘감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표정은 이 노래의 복합적인 감정을 완벽하게 시각화하며, 영화 전체의 주제를 응축해 조용한 폭발로 보여주죠.
영화 <퍼펙트 데이즈
독일 감독이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일본어 영화에 서구 음악을 주로 사용한 것은 음악의 보편적인 힘을 보여주며, 히라야마의 독립적인 취향 세계를 드러내고, 벤더스 감독 자신의 영화 세계와의 연결성을 강화합니다. 히라야마는 의식적으로 현재의 문화적 흐름과 거리를 두고, 개인적인 역사와 기억이 각인된 과거의 음악 속에서 안식과 정체성, 즉 자신만의 고유한 ‘감동’의 원천을 찾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침내 사람을 향카지노 게임 렌즈
히라야마는 매일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코모레비(木漏れ日)’를 찍습니다. 이 덧없고 아름다운 빛의 현상은 ‘찰나의 아름다움’과 ‘순간의 유일함’을 상징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은 삶의 예측 불가능성과 그 속에서 찾는 자연이 주는 위안, 즉 순수한 감동을 의미하죠.
히라야마가 밤에 꾸는 흑백의 꿈결 같은 이미지들은 이 코모레비의 인상이 그의 내면에 깊이 새겨져 처리되는 과정, 바로 하루의 인상 깊었던 기억을 처리하고 기억을 추상화하는 언어화되지 않은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며, 시간의 순환을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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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니코의 등장은 그의 섬에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킵니다. ‘아직 자기만의 섬을 찾지 못한 채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젊은 그녀는 히라야마의 고요한 일상에 미세한 균열을 냅니다. 늘 세상을 ‘관찰’하던 히라야마가 니코의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서는 ‘피사체’가 되어 그녀의 호기심 어린 시선 아래 놓입니다. 이는 그가 유지하던 익숙한 거리감과 통제력의 변화를 의미하며, 그녀의 꾸밈없는 시선은 그에게 ‘관계의 거울’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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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카메라 렌즈가 마침내 니코, 즉 사람을 향카지노 게임 순간은,그가 인간적인 연결 또한 찰나의 소중한 아름다움, 즉 또 다른 형태의 ‘감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미세한 균열이자 변화입니다. 이는 자연만을 찍던 그의 경계를 허무는 순간이자, 니코와의 짧은 만남이 남긴 깊은 인상과 애틋함을 ‘기록하고 간직할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한 셈입니다. 코모레비처럼, 니코와의 시간 또한 그에게 특별하고 유한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 겁니다. 그의 ‘마음의 렌즈’가 니코에게로 열렸음을, 그의 ‘퍼펙트 데이즈’가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제게, 요즘 부쩍 봄꽃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는 아빠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아빠는 사진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 사진 너머에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딸아이와 함께 나누고자 했을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빠가 보낸 꽃 사진은 히라야마의 코모레비 사진처럼 세월이 내려앉은 시선으로 발견한 아빠의 ‘소중한 순간’이자 저에게 건네는 ‘소리 없는 대화’였습니다.
이 세상을 지탱카지노 게임 평범한 장인들
저는 영화 속 등장인물 중 히라야마가 단골로 들르는 헌책방 주인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녀 역시 히라야마의 섬을 풍성하게 만드는 인물이죠. 디지털 시대의 물결 속카지노 게임 동네 골목길의 작은 헌책방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히라야마처럼 아날로그 문화를 지키는 ‘수호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매력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히라야마가 고른 책을 보고 그녀는 무심하게 말합니다. “고다 아야는 너무 저평가되었어요. 같은 단어를 써도 이 분이 쓰면 완전 다른 느낌이 난다니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공포’와 ‘불안’이 다르다는 걸 나한테 알려줬어요.” 전문 평론가를 능가하는 그녀의 지적 깊이와 문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평범한 장인(Ordinary Master)’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분야에 깊이 천착하여 전문가적 식견과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 올린 ‘일상의 현자’이지요.
책방 주인과 히라야마 사이에 오가는 짧지만 함축적인 대화는 두 사람이 오래된 것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깊이 있는 사유를 즐기는 비슷한 영혼의 주파수를 가졌음을 느끼게 합니다. 이 헌책방 주인의 존재는 겉모습이나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일깨우며, 히라야마의 세계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조용한 교류를 통해 풍성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또한 이 세상을 지탱하는 건 바로 우리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평범한 장인’들 덕분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까요?
건강한 개인주의: ‘우발적 공감’에 열려있는 느슨한 연대
히라야마의 관계 방식을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 혹은 ‘열려있는 자립’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자신의 섬을 소중히 가꾸면서도 히라야마는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의 방, 항상 열려있는 창문처럼, 그는 자신만의 안정된 기반 위에서 세상을 향해 열린 태도를 유지합니다. 공원 옆 벤치에 앉은 여성이나 공원의 노숙인과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히라야마는 ‘고요한 증인’이 됩니다.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노숙인의 독특한 몸짓은 문명인이 잃어버린 자연과의 원초적인 교감을 상징하며, ‘반복 속의 미세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히라야마가 그와 나누는 짧은 눈 맞춤과 목례는 상황을 초월한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이며, 교감입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책과 음악,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다져온 깊은 내면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진정으로 성숙하고 ‘열려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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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겹쳐지면 더 어두워지나?
선술집 마담의 전남편 토모야마와 히라야마가 강가에서 나눈 “그림자는 겹쳐지면 더 어두워지나?”라는 대화는 영화의 핵심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그림자’는 단순한 빛의 부재부터 우리 각자의 어두운 면과 슬픔, 과거의 상처 등을 의미하죠. 그것이 ‘겹쳐진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서로의 어둠이 만나 증폭되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서로의 존재가 만들어 내는 또 다른 형태의 그림자가 되는 걸까요? 히라야마가 토모야마와 그림자놀이를 하며 보여준 의미는 그림자들이 겹쳐지면 그 농도가 달라지고 형태가 변화한다는 단순한 물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히라야마가 여러 번 반복해 말하는 “변하지 않는 게 아니다”라는 독백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니죠.
영화 <퍼펙트 데이즈
이는 고통이나 슬픔 같은 인간의 ‘그림자’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혹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형태와 의미가 변화할 수 있다는 통찰과 낙관,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함께 있을 때 그림자는 더 짙어질 수도 있지만, 서로를 비추는 빛이 있다면 그 그림자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고통 속에서도 인간적인 연결을 통해 그 고통의 의미가 변화하고, 심지어는 어둠 속에서도 놀이와 유머, 즉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래서, ‘감동’하며 살아가기 위하여
<퍼펙트 데이즈는 결국 삶이라는 이름의, 가장 보통의 날들로 이루어진, 그러나 더없이 특별한 축제에 대한 영화입니다. 단순한 일상 예찬을 넘어 이 영화는 ‘삶,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거대하고도 조용한 찬사’이며, 동시에 ‘코모레비’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찬사’이기도 합니다. 이는 존재의 덧없음과 그 속에서도 순간의 의미와 ‘감동’을 찾으려는 의지가 만나는 소중한 철학적 접점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벤더스 감독은 히라야마를 통해 화려한 성공이나 외부의 인정이 아닌,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며 시간을 가꾸고, 아날로그적 감수성으로 찰나의 순간들에 감동하며, 느슨하지만 진실된 인간적 연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충만하고 완벽한 날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삶은 우리 시대의 ‘행복 강박’과 피상성, 그리고 ‘본질 없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대답입니다.
이 영화는 참으로 역설적인 매력을 지닙니다. 조용하지만 소란스럽고, 여백이 많지만 꽉 찬 영화죠. 겉으로는 고요하게 흘러가지만, 그 안에는 풍성한 음악과 미묘한 감정의 파동,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는 내면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또한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고 ‘여백’을 남겨두지만, 바로 그 여백 속에서 히라야마는 매 순간에 깊이 몰입하고 의미를 발견하며 자신의 삶을, 그리고 매 순간의 감동을 꽉 채워나갑니다. 비어 있기에 오히려 본질적인 것들로 가득 찰 수 있는, 채우기 위해 비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우리 안의 히라야마를, 혹은 자기만의 섬을 찾아가는 여정을 조용히 응원합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스쳐 지나가는 타인의 눈빛을, 그리고 내 마음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라고. 거기, 바로 지금 여기에, 당신의 ‘퍼펙트 데이즈’를 만드는 ‘감동’의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행복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순간들을 알아차리고, 느끼고, 온전히 감동하는 것이겠지요. 김창완 선생님의 노랫말처럼, ‘그날은 그날이었고 오늘은 오늘일 뿐’이며, 삶의 모든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겪어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고결하고, 아름답고, 또 완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