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생이 국제개발 NGO에 취업한 건에 대하여
미대 졸업 후 나는 국제개발협력 NGO 단체에 취업을 했다.
정확히는 4학년에 취업카지노 쿠폰 졸업 후에는 현장근무로 인도네시아에 파견근무를 나섰다.
어딘가라도 취업을 하기가 요원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서 그나마의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학점보다는예술대학의 낭만에 충실카지노 쿠폰 그다지 미래에 대한 불안만 가득한 채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다만 낭만에 충실하느라 술값이 늘 부족카지노 쿠폰 과제를 해 낼 재료비도 만만치 않았기에 공부 아닌 것으로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장학금과 상금이 걸린 온갖 공모전에 빠삭카지노 쿠폰 대부분의 해외여행도 봉사활동으로 다녀왔다.
이런 점으로 국제개발 ngo 중에서도 단기봉사활동을 운영하는 팀으로 안착카지노 쿠폰 이건 내 오랜 컴플렉스(그다지 쓸모가 없느라 값비싼 취미를 이고 지고 사는 것 같은 나의 전공)를 물리치는데도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늘 세상에 쓸모 있는 일 대신 (무책임하게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 어딘가에 조금 빚을 지고 있는 듯한 마음으로 살고 있었기에 이렇게 세상에 기여하고 헌신할 수 있는 일이야 말로 내가 언젠가 달성해야 할 숙제 혹은 과업처럼 느껴졌었다.
그렇게 컴플렉스와 사명감을 적절히 버무려세계평화에 헌신하는 일꾼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원대한 꿈과 함께 국제개발 NGO의 세상에 러브다이브 해버렸다.
그렇다고 그림을 포기하기에 나는 여전히 진지하게 그리는 일을 포기하고 살아갈 자신은 없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합리화가 길을 안내할 때도 카지노 쿠폰)
그림은 평생에 걸쳐 언제든 할 수 있으니 나에게 쌓는 여러 경험이 작업에도 좋은 재료가 되어 줄 거야
더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은 취업일 거야.언제든 그만두고 다시 대학원을 가든 레지던시에 지원을 하든 할 수 있지만 직장인으로 살아보는 건 대학을 마친 후 지금 아니면 못해.신입사원이라는 걸 30대에 하기는 어렵겠지.
이걸 포기하고 저걸 선택하는 기회비용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써먹을 카드가 하나 더 생기는 거 아닐까?
그 후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강력한터닝포인트이자 가장 카지노 쿠폰한 시절을 살게 되었다.
본디 3명이 근무하는 현장이었으나 선발 된 다른 간사님은 출국을 포기카지노 쿠폰 도착 후 지부장은 성추문으로 파면되었다. 그렇게 25살의 나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 떨어져 연간 2억의 예산(당시 현지 공립교사의 월급이 20만 원 정도였다)을 어깨에 얹고 무려 학교 운영을 총괄했다.
정말 바빴다. 당연히 현장은 빈민가였기에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회계 장부를 만드느라 영수증으로 단어를 외웠다. 학교 앞 와룽의 5살짜리 아이가 가장 좋은 인니어 선생님이었다.
1-10을 제대로 못 외면 아가에게서 혼도 나고 그 아이가 하는 말은 모두 그대로 따라 했다.
사택이 있었지만 학교 학생들이 사는 기숙사 한 칸에 같이 살았고, 월급은 그냥 한국 통장에 쌓이도록 두고 매달 체제비 30만 원 정도로 생활했다.
학교는 코이카와 기업의 사회공헌 협력 프로젝트로설립되었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한국 기업으로 취업을 연결하는 직업학교였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 재학하고 같이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소년소녀가장이기도 카지노 쿠폰, 마을버스에서 동전을 구걸하기도 카지노 쿠폰, 지붕이 없는 집에 살기도 했다.
나는 그 아이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놀면서 같이 살았다. 그곳에서의 친구이고 가족이었다.
손으로 밥을 먹는 게 더 익숙해졌고 늘 맨발로 뛰어다녔다.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샤워장에는차갑고 연한 녹물만 나왔다. 기숙사에 나오는 급식이 내 밥이었기에 급식비는 자꾸 올려 받으면서 반찬은 부실해지는 업체와 여러 번 싸우고 양질의 급식을 쟁취했다.
대부분의 외식은 학생들과 먹느라 50-100원 정도의 와룽(이동식 노점식당) 음식들이었는데 그렇게 물조심하라 교육을 받아 놓고도 몇 번 먹어보니 괜찮아서 마음 놓고 신나게 먹다가장티푸스도 앓았다.
그 열악함 속에서도 정말,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카지노 쿠폰한 시절이었다.
이후 미국에 건너가 외국인 노동자로 LA다운타운을 누비며 살아도 보고, 이 전에도늘 재미만 보고 살았던 사람이면서도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했던 시절의 충만감은 전에 없던카지노 쿠폰이었다.
이 격정적인 한 해를 보내면서 선이라고 믿는 것과 악이라고 믿은 것들이 뒤바뀌는 여러 모순과 이치를 경험하고 세상을 보는 깊은 관점들을 배웠다. 1년 간 내가 나에게 가장 크게 남긴 두 문장은내가 성인에서 어른이 되고자 하는 첫 영감이 되었다.
나는 나를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이미 그대로도 나보다 훨씬 나은 아이들인데 가난만을 이유로 감히 내가 돕는다 생각했다. 나는 그 친구들에게 고난에서도 황폐해지지 않는 살아감을 배웠고, 나는 여전히 그들과 같은 상황에서 그만큼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나는 누군가를 도울 만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고 그럴 자격도 없었으며 그저 그 일이 좋았을 뿐이고 나를 위해 일했을 뿐이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모르는 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애송이가 너무 많은 이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책임 덕에 강제로 많이 성장해졌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경영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한 사람의 실수에서부터 어떤 위기에서도 시스템만을 점검카지노 쿠폰, 내가 얼마나 모르는 지를 늘 상기해야 했다.
늘 그러했듯 이 일에도 너무 몰입한 나머지일과 삶의 적당한 거리를 두지 못해 감정적인 실수들이 있었고 후로도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너무 많이 웃은 만큼 너무 많이 울어야 카지노 쿠폰 그건 일이 아니라사랑을 한 대가였다.
다만 이 열악한 천국에서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나에게 진정한 카지노 쿠폰을 줄 수 있었다.
나는 환경과 돈에 상관없이 진정으로 카지노 쿠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평생 그림을 그려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