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사랑
아버지는 과묵하셨다. 다정다감한 성정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전등을 끄라 하실 때도 "껏 버려", 식사 시간에 부르실 때도 "밥 먹어" 하시던 짧고 건조한 말씀이 전부였다. 크게 꾸짖지는 않으셨지만, 칭찬도 드물었다. 성적이 올라도, 상을 받아도, 대학에 합격해도 그저 "그래" 하며 슬쩍 웃으실 뿐이었다. 돌이켜보니 단 한 번도 자식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그 시절 아버지들은 다 그러셨으리라. 감정을 드러내고 격하게 표현하는 것은 나약한 남자나 하는 일이라 여기던 세대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분이셨다는 것을.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하셨는지를.
고등학생 시절, 독서실에서 밤늦게 공부하고 귀가하던 때가 있었다. 새벽에 내린 눈을 밟으며 집으로 향하는 길은 누군가 치워놓은 흔적이 있었다. 집에서 독서실까지 대략 오륙백 미터는 되는 길이었다. 빗자루를 든 아버지가 새벽에 하신 일이었다. 대학 4학년 때는 영어 공부를 위해 이른 아침 학교에 갔는데, 오랫동안 아버지는 먼 길을 돌아가며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시고 출근하셨다.
어느 날 대학 후배를 데려와 어머니가 담가 놓으신 과일주 한 통을 비우고 방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잠결에 아버지가 들어오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창문을 살짝 열어 환기시킨 후, 촛불을 켜놓고 나가셨다. 대학생인 내게 왜 담배를 피웠느냐, 술을 마셨느냐는 잔소리도 없으셨다.
출근길 동행은 아버지가 퇴직하신 후, 내가 드라마 PD가 되어서까지 이어졌다. 새벽에 들어와 한두 시간 눈을 붙이고 다시 촬영하러 나설 때면, 아버지는 따라 나오셔서 정신없는 나를 차에 태우셨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도움을 청하면 아버지는 말없이 손을 내미셨다. 그것은 도움이 아닌 당연한 것이었다. 그 당연함이 내 삶에 얼마나 큰 기둥이었고 자신감이었는지를 세월이 흘러서야 깨닫는다.
나는 아버지보다는 말이 많았다. 사랑한다는 표현도 했고, 아버지가 아프신 뒤로는 자주 안아드렸다. 하지만 과묵하셨던 분이 병환까지 얻으시니 더욱 말씀이 없으셨다. 대화가 부족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나눈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는 엄숙함에 짓눌리기 싫어 오히려 아버지와 농담 섞인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 우리 말고 다른 데서 자식 두셨어요?"
"미쳤어"
아버지의 대답이셨다. 다시 여쭈었다.
"아버지 혹시 우리 몰래 빚지신 것 있으세요?"
"없어"
그러던 아버지가 어느 날 새벽에 날 부르셨다. 동생과 번갈아 가며 부모님 댁에서 잠을 잘 때였다. 아버지가 부르시는 소리에 다가갔더니, 호흡을 가다듬고 길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형제들에게 그동안 잘 못해준 것 같다. 걔네들에게 돈을 좀 주고 싶어"
아버지는 8형제의 장남이셨다. 위로 누나가 한 분 계시고 아래로 동생이 여섯 분이 계셨다.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해서서히 멀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교류가 부쩍 줄어든 고모, 삼촌이셨다. 그날 새벽 아버지는 당신의 형제에게 어느 정도 상속할 것을 결심하신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동생과 상의한 후 아버지가 원하신 만큼 일곱 분의 형제들에게 송금했다. 세 분은 미국에, 나머지 네 분은 한국에 계셨다. 고액을 송금하니 은행 창구 직원이 이유를 물었다. 대충 설명드렸더니 '직계 상속인도 아닌데,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셨다.아버지의 결심도 대단했지만, 어머니의 허락도 담대하셨다. 어머니는 '자기가 번 돈, 자기가 쓴다는데 뭘...' 하시며 시댁 식구에게 돈을 보내는 것에 아무 말씀도 더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형제들과의 앙금을 다 풀고 가셨고, 기쁨과 사랑을 나눠주고 가셨다.
왜 아프시기 전에 더 많이 아버지께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을까? 좀 더 진지하고 경건하게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을까? 왜 아버지와의 시간이 앞으로도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을까?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나는 "아버지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이제 가셔도 된다고 아버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버지, 사랑해요"라는 말은 그날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말 대신 행동을 하신 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 아버지와의 대화가 그립다.
예전 미국에 유학 가있던 시절이 있었다. 1년여를 부모님을 뵙지 못했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다. 전화를 받자 이제 중년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용석, 아빠야".
아빠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