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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문다 Jul 22. 2024

사무실에 카지노 가입 쿠폰 두고 퇴근하겠습니다.

디지'탈' 디톡스

복잡하디 복잡한 이 세상의 유행과 잠시 멀어지고 싶은 것도 디지털 디톡스를 하는 이유이자 목표 중 하나인데,

그러기엔 디지털 디톡스 자체가 하나의 유행이(었)다.

벌써 약간 찝찝한 시작을 나는 디지'탈' 디톡스 정도로 명명하며 그 워딩에서나마 한 발짝 달아나본다.


디지'탈'로 약간은 구수해진 워딩처럼 나의 디지탈 디톡스 첫 경험은 10년 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스레 스마트폰을 처음 구매했던 시기를 돌이켜보자니 (조금 놀랍게도)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병 말쯤에 군대에 반입했던 핸드폰 ¹⁾이카지노 가입 쿠폰은 아니었던 것 같고,

아마도 제대 ²⁾하면서샀던 노트1 ³⁾인것 같다.


핸드폰과 스마트폰의 극명한 차이는 내가 제대했던 2011년 즈음을 기점으로 시작되었고,

그 기폭제가 된 것은 카카오톡이었다.

당시 카톡이라는 신세계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등장했다.

첫 째는 무료라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읽음 유무를 표시하는 숫자였다.

(메시지의 옆에 숫자가 읽음 유무를 알려주는 기능이라는 것도 나는 카톡을 제법 쓰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메일에도 수신 확인 기능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편지의 개념에 가까웠기에,

적어도 한 문단 이상의 글이 오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로 인해 오가는 시간에는 자연스레 시간의 공백과기다림이 존재했다.

이메일보다는 오히려 빠르고 짧은 메시지를 나누던 문자 메시지가 지금의 카톡에 가깝다.

그렇지만 문자 메시지에 없던 수신 확인 기능이 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상대에게 내 메시지를 발신하고, 상대방의 답신을 받는 단순했던 두 가지 형태에서

상대가 내 메시지를 읽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한 기능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단계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수많은 상상과 의도와 복잡한 감정들을 만들어냈다.

카톡이 세상에 나온 지 십수 년이 지난 현재, 카톡의 수신확인 기능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은 디지털 세상이 사람들의 삶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였고, 그 말인즉슨 지금처럼 디지털에 잠식당해버린 세상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현대 사회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술에 취해 계단을 굴러버린 여자가 넘어진 자세 그대로 핸드폰을 확인하는 인터넷 짤이다.

이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핸드폰을 놓지 않는 여자들의 사진과 함께 여자들이 시간이 없어서 카톡 확인을 못 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냥 너와 연락하기 싫은 것이다)는 우스개(=Fact) 소리가 있다.

누구나 공감하는 저런 현상들의 이면에는 현대인들이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것은 특정 지점 화할 수 있는 점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선 4) (평균적으로 우리는 하루 2600번 핸드폰을 확인하며 깨어있는 동안에는 10분에 한 번씩 확인한다고 한다)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닐 경우 몇 시간 동안 카톡에서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 건 확인하지 않겠다는 의도나 회피가 더 짙게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읽씹'이라는 단어만 있던 시대에서 '안읽씹'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것이 시류를 잘 말해주는 듯하다.


일상에서 자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공백들.

선택적으로 그 무료함을 채워주며 시작된 카톡이 이제는 오히려 시간의 공백을 빼앗는 스트레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시작은 자의적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타의적으로 카톡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20대 초중반 무렵 느닷없이 디지털 디톡스를 마음먹었는데, 그 이유가 카톡이 전부는 아니었다.

당시 한창 빠져 있던 커뮤니티가 있는데 네이트 판이었다.

지금이야 네이트판은 (20대 초반 여성들의 시기를 지나) 10대들의 차지가 되었고 커뮤니티라는 것 자체가 각각의 고유한 가치관과 정치색 마저 뚜렷해졌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가 올라오는 곳에 불과했다.

나는 어디에서나 무료할 때 네이트 판을 읽고, 여행을 가서도 잠들기 전에 읽으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스마트폰에 내 머릿속의 모든 부분을 빼앗겨버리고 있다는 자각을 했고, 곧장 스마트폰을 없앴다.

(내 기억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마침 스마트폰이 고장 났던 것 같기도 하다.)

스마트폰을 없앤 나는 대신 A3 사이즈의 작지 않은 스케치북을 들었다. 어딜 가도 항상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다니며 아이디어 스케치를 했다. 이동하는 지하철은 가장 좋은 아이디어 발산 장소였다.

멈췄던 두뇌가 다시 살아남을 느꼈고 즐거웠다. 정작 힘들었던 건 연락을 못 하는 주변 사람들이었다.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디지털 세상이 포화에 이름을 자각하는 순간은 그 이후로도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최소한 회사에 입사를 한 순간부터는 스마트폰을 멈추는 것이 더 이상 내 선택이 아닌 듯 보였다.

또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네이트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마트폰의 세계관은 확장되었다.

당시 내가 느꼈던 스마트폰의 폐해는 자극적인 내용과 문체로 쓰인 웹상의 글에 중독되어 책을 못 읽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고민이 귀엽게만 느껴진다. 왜냐하면 지금은 글 자체를 읽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정보를 찾아보려면 블로그의 글이라도 읽어야 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디지털 세상은 영상과 사진이 활자를 대신한다.

글의 공간을 시청각 자료들이 대체했다는 것은 그만큼 디지털 세상이 우리를 잠식하기 쉬워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읽는다는 능동적 행위를 통해서 나에게 입력이 되었던 글과 달리 시청각 자료는 그렇지 않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것들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이상 우리는 능동적, 자의적 선택이 아닌 수동적, 타의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환경에 가까워지고 있다.


참 거창하게도 써놨지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명쾌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다.

카지노 가입 쿠폰 손에서 놓으면 된다는 것.

게 중에는 스마트폰이 자기 삶의 주요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선을 그으며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물론 내가 그중 하나였다면 이렇게 장대한 서사의 글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의지만으로는 중독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디지털 디톡스를 결심했던 가장 최근의 기점은 작년이었다.

당시에는 명상, 불교 같은 내면적 경험을 위함이 그 시작이었고, 내가 세웠던 계획은 회사에서만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집에 와서는 스마트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을 제거함에 있어 발목을 잡는 것이 회사라면, 회사에서만 사용하자는 생각이었다.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단계적 혹은 디지털 기기를 분류하여 스마트폰만 하지 않는 일주일, OTT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는 일주일 등으로 나눠서 해볼까도 생각했다.

뭐 그때의 계획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유가 전혀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이번 계획 거의 동일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스마트폰과 나와의 거리다.

당시에도 스마트폰이 근처에 있으면 끊임없는 유혹을 할 테니 최대한 멀리 할 방법을 생각했다.

스마트폰을 침실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던가, 현관에 놓고 다음 날까지 안 쓴다거나, 스마트폰을 넣고 일정 시간 동안 잠가버릴 수 있는 박스도 알아봤다.

그렇지만 이 번에는 현관보다 더 멀리에 스마트폰을 둔다는 계획을 세웠다.

바로 회사에 놓고 퇴근하는 것.

열 걸음만 걸어가면 인스타를 할 수 있는 현관에서 피어나는 유혹의 기운을 하루 종일 받는 것보다는 사무실을 떠나는 퇴근 시간인 4시 30분 그 짧은 순간의 유혹만 참아내기를 택한 것이다.

(출근 시간이 즐거워지는 마법 같은 일도 기대해 본다)


어떻게 흘러갈지 얼마의 시간 동안 시도해 볼지 아직 전혀 모르겠다.

어쩌면 스마트폰 없는 날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 시작해서 한 달 단위로 좀 더 늘려가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주 구체적인 계획은 일부러 짜지 않으려고 한다.

결정된 것이 하나 있다면 일단 오늘은 스마트폰을 두고 사무실을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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