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한국의 언론중재위원회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지양하도록 보도지침을 내렸다. “자살은 선택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언중위는 덧붙였다. 자살은 선택이 아니며, 생명은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다. 그리고 대체될 수 없다는 표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심적으로 부하를 견뎌낼 때 그는 자신이 대체될 수 없다는 걸 직감한다. 모든 카지노 쿠폰을 서서 마주해야 하는 게 바로 생존이다. 기쁨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기쁨은 자신이 대체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주변에 사랑받는다는 건 그들 관계 안에서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경우 우리는 나 하나쯤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걸 깨닫는다. 시스템은 한 개인이 사라져도 일상을 유지하도록 설계됐다. 물론 아주 중대한 사건이나 핵심인물이라면 상황은 좀 다를 수 있겠다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다음과 같다. 만약 나 자신이 대체될 수 없는 존재라면,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할 방법이란 없는 게 아닐까? 그 점에서 언중위가 보기에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이들이 특정한 상황이나 감정을 회피하려 했다는 점을 감추고, 그걸 ‘선택’해서 맞서 싸웠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극단적 선택’은 단순히 자기 살해를 선택의 권리로 해석하는 일뿐만 아니라 패배의 일종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문제가 됐다. 자기 살해는 선택의 대상이나 결과가 아니다.
우울함을 겪는 이가 영화에 빠져드는 일은 그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시네필 중에 우울감을 겪는 이들이 있다면, 내가 없어도 여전히 영화가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일 테다. 영화는 그 세계가 여전히 유지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토대가 되어주지만 반대로 세계 내에서 자기 존재를 지우기에 문제가 된다. 전통적으로 영화에서 관객의 지위는 관찰자로,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는 자였다. 관객은 화면 너머 모두를 목격할 수 있었으나 반대로 아무런 것도 바꾸지 못했다. 심지어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영화는 관객에게 도망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혹자는 이런 환경이 도리어 자신이 선택한 결과이기에 ‘맞서 싸울 용기’와 ‘능력’을 키워준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떠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 태엽 오렌지는 폭력을 교정하기 위해 강제로 무언가를 목격하게 하는 어느 치료 프로그램을 묘사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모든 것에 앞서 있다는 점을 깨닫고는 이내 폭력을 행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영화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재현할수록 관객이 이를 모방할 우려가 있다고도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에 앞서 있는 존재이기에 도리어 그런 것에 무기력한 자신을 더 두려워하게 된다. 영화의 충격경험은 영화가 현실의 비-경험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맞닥트릴지도 모를 ‘예비’를 두려워하게 했다. 무언가를 스스로 재현해낼지도 모른다고 보았던 이 감정에서 관객은 그런 미래 안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존재함에 두려워했다.
김홍중은 이를 두고서 ‘영화-환자(Cine-Patient)’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영화를 겪는 자’라는 이 표현에서 우리는 우리가 카지노 쿠폰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소위 ‘영화 같다’고 사용하는 말이 단순한 ‘사건’의 발생만이 아니라 그런 사건의 중심에 선 ‘나’를 가리킴을 알게 된다. ‘예측가능성’을 두고서 사람들은 10년 뒤의 자신에서 50년 뒤의 자신까지를 상상하지만, 반대로 보면 그 모든 미래는 생각하는 ‘나’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를 따라 생명은 사유의 후발주자가 된다. 스스로를 판단할 수 없는 생명은 얼마나 비참한가. 우리는 어떤 카지노 쿠폰스러운 미래가 눈앞에 기다릴지를 전혀 알 수 없다. 그저 지금 여기에 영화가 펼쳐지고 있음을 후회할 뿐이다. 영화에 푹 빠졌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영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뜻한다. 영화에 귀속되어서 다른 선택지 없이 영화만을 사랑해야 하는 게 바로 영화-환자의 처지다. 우리가 자살을 선택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세계-신체에서 카지노 쿠폰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신체는 끊임없이 주어지는 것을 체현한다는 점에서 자기 발언권이 없다. 어쩌면 영화-환자들에게 영화는 선택지가 없는 현실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무언가였을지도 모르겠다. 입을 닫고, 거대한 오션블루 그 스크린 아래로 침잠하는 일 말이다. 물론 한 인간의 감정이나 사연을 멋대로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틀잡기(framing)로서 그걸 해낸다.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긍정적인 점은 감정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일 테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도리어 자기 존재의 고유함이 카지노 쿠폰을 마주해야 한다고 보는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의심해볼 수 있다. ‘안전하게 아프기’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처음 들으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 살해는 아픔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안전함을 확보한다. 아픔을 느끼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예측불가함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카지노 쿠폰을 숨죽여 인내하는 일은 카지노 쿠폰의 실제 길이를 늘인다. 카지노 쿠폰이 특정한 순간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이를 기다리며 몸을 떠는 순간이 바로 카지노 쿠폰의 길이가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카지노 쿠폰을 담보하고자 안전함에 머무를 공산이 있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 의해 아픔을 향유하는 일은 카지노 쿠폰의 강도와 주기를 통제할 수 있기에 예측가능성을 담보한다. 그러한 점에서 안전하게 아프다는 말은 영화에 투신하는 행위에 비견될 수 있다. 영화는 우연의 예술이지만, 반대로 그런 우연을 모두 안전하게 담아놓음으로써 마치 예측불허한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영화는 변인을 통제한 채 ‘안전하게 아플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셈이다. 즉 영화는 ‘안전하게 아프기’의 매체이며 동시에 진통의 역할조차 수행하지 못한다. 도리어 죽어가는 속도를 일시적으로 늦추기만 할 뿐, 근본적인 치료법이 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환자가 영화를 보는 건 영화가 일종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겨서다. 과격하게 말한다면, 이들에게 영화는 일종의 안락사 수단이다. 영화가 지닌 틀잡기의 기능은 떨쳐내고 싶은 감정에 ‘붙들리는’ 일에 사용된다.
영화가 현실을 편집하는 일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단순히 현실을 포착하던 게 뤼미에르였다면, 이후 멜리어스가 편집기술을 발명해냄으로써 비로소 대문자 ‘시네마’가 출발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마치 우리가 현실을 편집해서 의도적으로 보고 싶은 것만을 ‘환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편집증을 연상케 한다. 영화는 자신이 어느 한 현실에 관계돼있다고 착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편집증이다. 영화는 자신이 도망치고 싶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전시한다는 점에서 영화-환자의 이목을 잡아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착오의 매체여서 함께 걸으려 할 때는 엇박자를, 눈으로 보려 할 때는 흐린 풍경을 자아낸다. 영화-환자가 영화에 느끼는 매혹이란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음이 반대로 그곳이야말로 유일한 도주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이 언젠가 죽는다는 게 명확한 사실이지만, 영화는 그걸 마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결말에서는 현실에 빠져나온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임사체험으로도 볼 수 있겠다. 영화가 체험의 매체라면 개중에 죽음이 포함되지 않을 리는 없다. 영화를 보며 마음을 치유 받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영화를 보며 마음을 다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안녕, 에리에서 “사람의 심금을 웃고 울리는 영화가 있다면 만드는 사람도 상처받아야 ‘공평’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화-환자는 분명 자신이 영화의 일원이 되어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상처받은 이들이 공동체를 만든다면, 이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건 ‘우리’였다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볼 때면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들어 우울함을 느낄 때가 있다. 더 나아가서 이따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히 도는 우울감에 관해 생각해보고는 한다. 남루한 생각이지만 뜻깊게 바라보는 구석은 있다. 아즈마 히로키를 비틀어서 말한다면, 관람객이 기본적으로 영화에 소속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영화도 관람객을 소유할 수 없다. 관람객은 그저 바깥에 서서 저 멀리 앞서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관(람)객은 영화의 영토에 앞서 대지가 파괴되어 유린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를 잊으려고 ‘정정 가능성의 철학’을 발휘해보지만, 이를 통해 죽는 건 카지노 쿠폰일 뿐 이 모든 걸 관망하는 자신이 아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흘러가는 한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든 일반론으로 흘러가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소위 말하는 ‘개연’이라는 게 존재하므로 아무리 해도 그렇게는 생각할 수 없다고 보는 쪽이 항상 존재한다. “카지노 쿠폰을 말한다”라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을 뜻한다. 아무리 해도 말이 될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보았을 때 우리는 이를 ‘카지노 쿠폰스럽다’고 말한다. 그 말인즉, 카지노 쿠폰을 겪는 당사자의 현실은 기본적으로 환상적이거나 허구주의에 가까우며 이런 상황에서 영화는 유일하게 판단가능한 현실지표가 된다. 그런 이유로 영화-환자는 도리어 판단가능한 지표로서 자신의 몸을, 그 세계-신체를 응용하는 자이다. 또한 시네필리아 중에서 타인의 카지노 쿠폰에 민감해지는 모종의 ‘현상’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식으로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찾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