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가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듣는다’기보다는 ‘본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웹서핑을 하다 보면 ‘비평이나 평론 같은 걸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다. 이 고민의 특징은 글쓰기가 접근성이 높은 행위임에도 그걸 ‘어렵다’고 본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개 두 가지로 패턴으로 나뉜다. 하나는 뭔가 멋진 작품을 봤는데 그걸 글로 풀어내보고 싶다, 즉 ‘해소’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이들은 좋아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서 글을 배우려 한다. 이 경우는 자신의 마음에 다가서는 법을 배우는 쪽이어서, 결국 방법의 차이일 뿐 어떻게든 그 마음에 닿게 돼 있다. 한편 다른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대한 동경심을 품는 경우가 있다. 어느 멋진 글을 읽고 나서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고 마음먹는 게 이 부류다. 누군가 영화를 보고서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마음먹듯, 좋은 글은 읽는 이가 글을 써보고 싶게 한다.
그렇다면 둘 중 뭐가 더 좋은 글이라 할 수 있을까. 글을 읽고 나서 생각에 잠기게 하는 글이 있다. 글을 읽고 나서 행동하게 하는 글이 있다. 이 둘이 서로 중첩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자리를 나설 때 시작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면, 마찬가지로 좋은 글은 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글을 쓰고 싶게 해야 마땅하다. 단지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액팅’ 말고도 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활동’하게 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방향을 틀어 이런 얘기를 해보려 한다.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란 무엇인가? 나 자신도 다른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 받은 마음을 돌려줘야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일? 무언가를 두고서 ‘좋다’고 말하는 건 다른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남들도 충분히 좋아할 법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스스로가 그걸 ‘좋아한다’고 믿기 힘들어진다.
가령 세간의 시선을 따라 아무도 이걸 좋아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걸 선호하는 자신도 뭔가 자신이 없어진다. 이 글이 남들보다 잘났다고, 그렇게만 믿으라는 게 아니다. 자신이 쓴 글이 자신의 생각임을 부정하지는 않아야 한다. 자기가 쓴 글이 못나 보이면, 아무래도 그 글을 있는 그대로 담은 나 자신도 못나 보이기 마련이다. 바꾸어 말해 글쟁이가 우울감에 시달리는 건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되고 싶다’는 마음 탓일 공산이 크다. 좋은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될 수 없다는 말로 바뀐다. 나쁜 글을 쓰는 게 아니니까 나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되는 건 아니지만,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될 수 없는 건 정말 크다. 아무리 해도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 닿지 못한다. ‘좋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럭저럭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 뿐인 게 된다. 더 나아가 ‘좋다’라는 말이 ‘좋아한다’의 완결형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
무언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걸 두고서 ‘좋다’고 표현하기를 망설인다. 결말에 이르는 일을 싫어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 점에서 글쓰기는 한 세계의 종말을 상상카지노 게임 사이트 감각과 깊숙하게 맞닿는다. 무언가를 좋아카지노 게임 사이트 이 마음을 끝내고 싶지 않다. 연애물에서 사귀기 전이 가장 재미있는 흐름인 것처럼 사랑이 맺어지면 세상이 끝나기라도 카지노 게임 사이트 듯 행동한다. 이는 소위 말카지노 게임 사이트 덕후들이 남들에 질문받았을 때 ‘제가요?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말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과 관련 있다. 이들은 자신을 숨기거나 겸손을 표카지노 게임 사이트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이 현실을 끝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현재의 나’가 현실감을 담보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나’의 비현실감”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자신을 과거로 적는 ‘글쓰기’는 비현실이 돼야만 했다.
오늘이 있는 건 어제가 끝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좋다’라는 말이 있어서 지금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글쓰기가 세계의 종말을 상상한다면 글쓰기는 우리를 대신해 과거가 되어주는 셈이다. 문제는 글쓰기를 과거로 여길수록 그걸 하는 자신은 과거에만 몰두하는 게 돼버린다는 점이다. 현실이 아니니까 아무런 현실도 바꾸지 못한다. 단지 과거에만 매몰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인 것만 같다. 하지만 죽음이 존재 방식 중 하나라면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과거를 ‘맺음’하고 이를 ‘죽음’으로써 마주하는 것이다. 우치다는 이를 “‘자신의 미완료를 끝까지 살아야 해서’ 자살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반대로 우리는 한 세계를 과거로 둘 수 있다. 즉 글쓰기의 참된 능력은 우리가 한 세계를 오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죽음과 삶, 과거와 현재, 글쓰기의 본질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치다는 바깥으로 나가자고 말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이다. "‘나를 수신인으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 메시지’라는 것에 확신은 있지만, 그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카지노 게임 사이트지를 모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다”고. 우리가 글쓰기를 카지노 게임 사이트 건 내가 보낸 메시지에 응답하기 위함이다. 글쓰기는 분명 비현실적인 행위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글쓰기는 완결되지 않는다. 완료되지 않음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 글을 적는 일과도 같다. 완성되지 않는 ‘나’라는 마음이 우리를 어떠한 결말로 데려간다.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과거로 새겨보지만 그렇게 해도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담보카지노 게임 사이트 ‘비현실’은 우리가 뒤를 돌아보기 위해 설정된 가상 변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가 될 수 없는 건 반대로 항상 무언가가 되어가는 도중인 탓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존재지만 반대로 그걸 ‘맞이’할 수는 없다.
이따금 살아서 자신의 죽음을 목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벌써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됐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서만 글을 적을 수 있다.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될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문자 하나하나를 적는다. 여기서 무언가를 끝내는 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글이지 한 세계를 끝내는 글이 아니다. 자신을 과거로 적는 ‘글쓰기’는 ‘바깥’으로 나아가 무언가에 대답하는 태도, 질문에 응하는 자세를 만들어준다. 즉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에 안는 건 좋은 세계를 갖고 싶다는 열망과도 같다. “너는 지금 잘살고 있는가” 하는 그런 물음으로써 ‘비현실’은 우리가 ‘바깥’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글쓰기를 계속하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항상 내부로 지향되기에 우리가 이 땅에 서게 해준다. 글을 쓰는 건 매순간 바깥을 의식하는 일과도 같다.
주변에서 평론 상을 받았다고 하면,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상을 받은 거니까 대단한 것 같다”는 말이 많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뭔지 모를 인간이다. 밖에 잘 나가지 않으니까 소위 말하는 ‘업계’ 카지노 게임 사이트들이 어디에서 뭘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른다.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소식을 건너 주워들을 뿐, 좋은 것을 판가름할 안목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하필 글쓰기였던걸까? 돌아보면 글쓰기는 무언가 무기력함을 해소하는 수단이었던 것 같다. 다들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자기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쓴 글을 다른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읽어주기를 바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도 여겼다. 어린 나이에 이런 수준의 글을 쓰는 게 멋있다고 생각해서 나도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바라는 좋은 모습에는 끝내 닿지 못했다.
남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할 입장은 아니지만, 글쓰기는 결국 행동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카지노 게임 사이트들에 행동을 촉구하는 방식 중 하나지만, 글쓰기만이 갖는 매력도 분명 있다. 아마도 글쓰기는 가장 사적인 면을 드러낼 수 있는 예술 형식이다. ‘에세이’의 의미처럼, ‘나’를 있는 그대로 표면에 닿게 하는 게 바로 글쓰기의 매력이다. 문자를 적을 때마다 우리는 글자의 매 표면에 닿게 된다. 노래를 부르는 게 한 세계에 잠기는 일이라면, 문자를 적는 일은 한 세계를 걷는 것과 같다. 세계를 산책하며 이 감정들에 관해 생각하는 나 자신이 있다. 즉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한 세계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한다. 거기서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낄 수도 있고, 아니면 적당히 자아를 챙겨둘 수 있어서 좋다고 볼 수도 있다. 걷기는 짧은 순간 중력을 이겨내는 일과 그런 저항의 무수한 반복이다.
물론 인간이 걸을 수 있다고 해서 마라톤에서 기록을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가 접근성이 높다고 해서 뭔가를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글을 쓰는 일에서 가장 고민되는 순간은 자신이 뭔가를 쓰고 있음을 깨닫는 일일 것이다. 세상에는 삼키려 한들 삼켜지지 않는 일이 많은데 그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글을 씀으로써 마음이 홀가분해지기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글을 쓰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다. 당신은 왜 글을 쓰는가?하는 간단한 물음에 제대로 답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좋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되고 싶다거나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도리어 완성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매순간 바깥에 나서기 때문에 ‘나’ 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다른 누군가인 ‘나’에 생각을 촉구하는 방식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