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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Mar 21. 2025

카지노 게임 추천 마시던 그 시간

“어느새 9년이 되었어.”

다들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 끝에 D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친구는, 그때 타이완 여행 중에 부고를 들었기에 기억한다고 했다. 9년 전 사진입니다,라며 구글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다들 일찍 떠난 D를 떠올리며 잠시 침묵했다.


1987년에 다함께 입학한 열한 명의 여학생 중 우리 여섯은 꾸준히 모임을 이어왔다. 한창 바쁠 땐 몇 달에 한 번, 자주 모일 땐 한 달에 한 번도 모였다. 하지만 여자 여섯이 모이기엔 제약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제각각 근무 요일이 다르고, 퇴근 시간이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다르니 시간 맞추는 일부터가 난제였다. 우리들이 찾아낸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D의 집에서 모이는 거였다.

D의 집은 대치동이었는데, 강북에서 피자집을 함께 운영하는 남편은 거의 매장 근처 본가에서 지내는 일이 많이 우리가 집에 드나드는 일이 자유로웠다. 여섯 모두의 퇴근을 마치고 모이면 시간은 때로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기도 했다. 당연히 모임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밤에 시작하는 모임, 다음날 귀가해도 되는 여유,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 당연히 술이 함께 했다. 이런 우리 모임의 술은 언제나 산사춘이었다.


우리 모임에서 ‘무엇을 마실까’를 고민할 필요 없이 산사춘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건 한 친구 덕이었다. 다섯은 모두 적당히 술을 마실 줄 알았는데, 한 친구는 맥주 한잔에도 얼굴이 불타는 신호등으로 변하는 체질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산사춘을 한잔 두잔 홀짝이더니 그것이 입에도, 체질에도 맞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나머지 다섯은 그 친구까지 술자리에 동참시키기 위해 늘 산사춘을 마셨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여섯 명의 여자는 카지노 게임 추천과 함께 음식을 주문해 먹었다. 때로는 족발이나 보쌈이었고 중화요리일 때도 있었다. D의 집 6인용 식탁엔 카지노 게임 추천과 음식, 그리고 속 터지는 아이들, 불만이 없을 수 없는 남편들, 그리고 화가 치솟는 시댁이 함께 올라왔다. 늦은 밤까지 먹고 떠들다가 자고 일어나 D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집으로 돌아올 땐 적당히 가벼운 기분이 되어있곤 했다.


작은 체구의 D는 부잣집 도련님답게 집안이고 밖이고 간에 일이라면 손 하나 까딱 않으려는 남편 덕에 혼자 극성맞은 사람이 되었다고 늘 말했다. 이제 리어카 하나 쥐여주고 산꼭대기에 올려놔도 살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D는 학교 다닐 때는 그저 철없이 인생이 즐거운 여학생이었다. 나이를 먹으며 D는 여장부 스타일이 되어갔고, 눌 우리 모임을 주도하고, 장소를 제공하고, 넉넉하게 베풀었다. 우리는 그런 D 덕에 모임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창밖에 눈이 폴폴 내리고 있었다. 3월이면 봄인데, 눈이라니.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지난 모임에서 다 같이 D의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떠올랐고, D가 떠난 것이 아마도 이즈음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조문을 다녀오던 밤에 눈이 왔었다. 봄이 온 것 아니었어? 깊어진 밤에 용인서울고속도로를 달려 집에 돌아오며 그런 생각을 했던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남편의 외도와 이어진 이혼 재판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D의 얼굴은 많이 달라졌다. 그전까지 나는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일 년 넘게 만나지 못한 D를 오랜만에 봤을 때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구심점이었던 D가 떠난 후 우리 모임은 한동안 갈 길을 잃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모님들이 아프거나 돌아가시니 우리들이 만나는 건 주로 장례식장이었다. 다시 모임을 갖자고 이야기가 나올 때쯤 팬데믹이 세상을 덮쳤다. 우리들은 또다시 만남을 미뤘다. 여전히 마스크를 써야 했지만 일년도 넘은 시간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리들이 다시 모였을 때, 한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우리들은 집에서 모이지 않는다. 늘 제일 늦게 끝나던 나와 또 한 친구가 현업을 놓았기에 굳이 1박 2일의 모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도 주말이면 쉬므로 이제 우리 다섯은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도 모인다. 다만 늘 ‘어디에서 모일까’는 변함없는 난제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D가 있었으면 무조건 대치동인데….’하며 떠난 친구를 그리워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제 산사춘을 마시지 않는다. 밖에서 모이는 그 어떤 곳도 D의 집처럼 편할 리가 없으므로 예전처럼 빈 산사춘 병을 열몇 개씩 도열하듯 늘어놓고 즐거워하는 일은 없다. 모임이 끝나면 집에 가야 하나 이제 우리들은 그저 소주나 맥주 한두 잔씩을 마실 뿐이다. 하긴, 장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두 병이 아니라 한두 잔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아니 그게 적당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가끔 떠난 D를 생각한다. ‘세실리아’라는 동명의 세례명을 접할 때, 지나가다가 우연히 ‘미스터 피자’ 체인점을 만날 때,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대치동 엄마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한 번씩 D를 생각한다. 얼굴이 그악스럽게 변해버렸던 D,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데 수전증 환자처럼 손을 달달 떨던 D. 그런 D의 모습 대신 신입생 때 빨강 초록의 짝짝이 양말에 귀여운 치마를 입고 다니던, 해맑게 웃던, 여장부처럼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으던 D의 모습만을 기억하려 한다.

지나고 보니 우리 여섯이 함께 카지노 게임 추천 마시던 그 시간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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