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이번 전시에서 에곤 카지노 쿠폰 앞에 "파격과 본능, 욕망을 그린 화가"라는 수식이 붙어있다. 당시 세기말 또는 세기전환기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파격'이라는 수식을 할 수는 있겠으나 욕망을 그린 화가인가에 대하여서는 회의적이다. 실레의 작품에서 나는 욕망을 읽을 수 없었다. 욕망은 생에 대한 의지를 전제한다.
사실, 이번 전시에 기대했던 것은 실레와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의 작품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었다. 실레의 작품들이 주는 전반적인 느낌이 어두운 것이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한 줄의 설명을 어디선가 읽고 더욱 흥미가 생겼다. 母-子 관계에서 모성의 부재가 한 인간(의 예술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동시에 모성의 부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에 관한 이론들은 있으나 '부성의 부재'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문이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카지노 쿠폰가 15세 때 매독으로 인한 광증으로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어머니가 무덤덤한 태도인 것을 보고 이때부터 아버지를 우상화하고 어머니에게는 냉담했다고 한다. 소년에게 아버지는, 더욱이 그 아버지가 철도청 고급 관료였다면, 그래서 유복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아버지는 어린 카지노 쿠폰에게 이미 우상이었을 것이다. 비록 카지노 쿠폰가 그림 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 때로 카지노 쿠폰가 그린 그림을 찢어버렸다고는 해도 그것과는 별개로 동성인남성으로서 충분히 동경할 만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과 동일시하며바라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냉담하였다면, 그 냉담한 태도가 마치 자신에게 대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수 있다. 더욱이 당시 사회가매춘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났었다고는 하나 매독 감염 사실을 숨기고 결혼을 한 남편에 대해서 이 부인은 결코 다정하게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불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정이었다면, 아이들과도 따뜻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딸 둘을 출산한 후, 아들인 카지노 쿠폰가 태어나고, 이후로 다시 딸이 태어난 가족관계의 형성을 보았을 때, 이 부인이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왜곡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들의 모습에 남편이 투사되어 자신보다 강자의 위치에 있는 남편에 대하여서는 최소한의 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을 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보다 약자인 아들에 대하여서는 본인이 가진 남편에 대한 불신과 원망 등의 감정을 투사하여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이러한 모-자 관계가 이후 카지노 쿠폰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계시!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빛을 일평생 소비하며 살아갈 뿐이다. 빛이 모두 소진되면 더 이상 빛나지 못한다. 뒤돌아선 사람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됐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들이 발하는 넘치도록 충분한 빛은 무릎 꿇은 작은 인물과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상징한다.”-카지노 쿠폰
눈을 감고 창백하게 누워 있는 여성과 가늘게 눈을 뜨고 혈기가 도는 붉은 입술을 가진 남성이 나란히 누워있다. 여성이 더 위쪽에 배치되어 있고 남성이 상대적으로 아래쪽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은 둘 사이의 힘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인가 생각되는데, 특이할만한 점은 여성에게는 신체의 일부 중 발이 강조되어 있고, 남성에게는 손-정확히 표현하자면 손가락이 소매 끝에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인 구성은 실레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클림트의 작품 '키스(1907)'와 유사한 배치를 보이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바뀐 것, '키스'에서 여성의 발이 간절하고 황홀함이 표현되고 있는 것과 달리 욕망이나 의지가 배제되어 창백하게 늘어져 있다는 것, 남성의 손이 여성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이 제작된 년도를 비교하고 작품의 구성을 고려해 보았을 때 클림트의 작품 '키스'를 반영했다고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하다. 다만 여기에 더하여 한 아이가 남성-아마도 실레의 아버지로 생각되는 남성의 위에 한 소년이 엎드려 있다는 점도 클림트의 작품과 다른 점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고 남성-아버지와 소년과의 관계가 강조되는 작품이다.
위에서 인용한 카지노 쿠폰의 말을 고려해 보면, 카지노 쿠폰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나아가 카지노 쿠폰에게 클림트는 예술 동지나 스승의 관계를 너머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일정한 정도 작용했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이 카지노 쿠폰은 성화인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공간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어머니와 아이가 두꺼운 붓질로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점잖은 표정으로 아이를 보고 있으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의 손은 어머니와 아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한다.
위의 작품설명을 봐주길 바란다. 과연 그러한가? 과연 저 아이의 눈을 "반짝이는"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번역을 잘못한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 '반짝이다'의 의미가 달라진 걸까? 겁에 질려 공포스러워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을 '반짝이는 눈'이라고 진정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가? 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 빛나는 것을 표현할 때 '반짝이다'라고 표현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작품 설명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 전시를 주최한 측에 상당한 불신과 전시에 대한 실망을 안겨주는 요소가 되었다.
이 세상에 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성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신을 창조했다. 이에 대한 글은 다음으로 미룬다. 이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있고 아이는 눈을 뜨고 있다. 그것도 아주 당황스러운 듯 공포에 질린 듯 눈을 뜨고 있다. 서로 향하는 곳이 다르다. 어머니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뿐 아이가 어떤 환경 속에 놓여있는지, 아이는 어떤 세상을 마주하고 있는지에 대하여서 관심이 없다. 함께의 세상을 공유하다가 눈을 깜박이는 순간의 잠시 감은 상태를 포착하여 그린 그림이 아니다. 이 여성은 꽤 오랜 시간 눈을 감아 왔고, 현재에도 감고 있다. 그리고 곧 뜰 것으로 보이지도 았는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눈을 감고 자기만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아이의 안전과 아이의 상태와는 별개의 세계에 있다. 다만 아이를 안고 있음으로써 물리적인 안전은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겉보기에는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적 소통은 부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그녀의 세계로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듯하다. 놀라움과 공포, 당혹, 어떤 두려움에 휩싸여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있지만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카지노 쿠폰의 작품에서 손은 의미를 가진 특별한 소재가 되고 있는데, 위 작품처럼 손바닥이 화면을 향해 펼쳐져 있는 손이 있고, 엄마의 손처럼 손등이 보이는 작품이 있다. 몸의 안쪽을 상대에게 개방한다는 것에는 항복의 의미, 구조 요청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화면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생각해 본 후에 다시 서술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
여성은 아이의 상태와 관계없이 눈 감은 채 비교적 편안한 표정으로 보인다. 눈썹이나 이마를 찡그리지 않고 있고, 얼굴의 표정을 보아도, 붉은 입술을 보아도 곤란하거나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이의 표정과 너무 동떨어져 보이도록 표현함으로써 같은 공간에 있어도 정서적 교감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이 카지노 쿠폰의 원작인 <개종 Ⅱ에는 가운데서 설교하는 인물을 열두 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지만, 현재는 사라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종교적 상징을 담은 <개종 II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주제로 하여 영적 각성이나 내적 갈등을 표현한 카지노 쿠폰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에 천을 두른 여성의 비틀거리는 듯한 뒷모습에서 고독과 불안함이 느껴진다.
작품 설명과 관계없이 작품만 먼저 보았을 때, 그러니까, 일반적인 누드화라 생각을 했을 때는 내적 갈등을 표현했다거나, 고독과 불안을 나타낸다거나 하는 표현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카지노 쿠폰의 작품 치고는 인물의 신체가 균형감 있게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체의 표현에 있어서 어떤 왜곡도 확인되지 않았고, 스케치 라인도 안정적으로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생명력을 품은 몸이다. 살아있는 몸이다. 양감이 충분이 표현되어 그 온기가, 탐스러운 육체의 온기가 전해지는 몸이다.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에 이르는 선도 그러하지만 특히 발목과 발 뒤꿈치의 표현이 상당히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랜 기간 모델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관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저 작품에서 고독과 불안을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랑을 읽었다. 애정, 피사체에 대한 애정, 어떤 확신, 어떤 믿음, 어떤 신념, 좀 더 나아가자면 꿈이나 희망 같은 것, 안정, 일관성, 존중, 인정과 같은 것. 쫓기지 않고, 불안 없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안정적인 심리상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 작품의 일부분이라고 하고, 그 원작의 제목이 '개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종교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고독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다. 물론 이건 현재 나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라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크루마우의 블타바강 가에 있는 마을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마을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카지노 쿠폰의 기억에 남은 풍경의 조각들을 자유롭게 조합하여 표현했다. 색색의 건물들이 어두운 강변을 따라 그려져 있어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서 건물들은 여러 색을 띠고 있지만 지붕과 길, 강은 검은 색조로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준다. 카지노 쿠폰는 자신이 머물렀던 도시의 암울한 분위기, 스스로 느꼈던 고립감과 소외감을 검은색으로 표현해 생명력을 잃은 죽은 도시를 그려 냈다.
명색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의 전시 작품 옆에 부착된 작품 설명인데 비전공자인 내가 있는 그대로 수긍하지 않고 무어라 소박한 감상을 말하는 것이 민망하기는 하지만, 과연 고립감과 소외감을 검은색으로 표현해 생명력 잃은 죽은 도시를 표현하려고만 했을까에 의문을 품는다.
전시실에서 저 작품 앞에 멈춰 선 이유는 작품이 유난히 안정적이 구도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색채도 다양하게 사용하였고, 강물을 검은색으로 표현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마을이 더욱 밝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강물은 검은색이지만 그와 이은 면인 땅은 흰색에 가까운 밝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고, 다채로운 색으로 집집마다를 표현했다. 이 시기에게 실레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실레에게 아무 일도 없어서 마음이 편안한 상태였을까를 생각하면서 작품설명을 읽다가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물론강물이 검은색으로 표현된 것은 고립과 단절을 의미할 수 있다. 강물은 흐르지 않으며 물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품고 있는 물의 특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다. 곧 죽어있는 강물이다. 강은 바다로 흘러가면서 육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육지의 물이 바다로 흘러갈 수 있도록 육지 내부에서도 이쪽과 저쪽의 물의 흐름을 도와준다. 그러나 강물의 존재가 지워져 있다는 것은 단절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관계의 부재인 것이다. 하나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지노 쿠폰의 좌측 뒤편에 있는 저 다리에서 어떤 희망을 본다. 이쪽 마을과 강 건너의 저쪽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가 비교적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다리'의 속성에도 주목할만하지만, 그 다리가 오래 관찰된 결과이고 소홀히 여기지 않고 저 정도로 표현했다는 것은 다리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반영된 결과라 본다.
또 하나는 집집마다 표현되어 있는 문과 창문이다. 문과 창문은 외부와 내부를 연결해 주는 장치이다.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저 집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올 수도 있다. 물론 창문이 검게 표현되어 실내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집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집들도 많이 있다. 집에서 빛이 새어나오지 않아 공허를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하기엔 마을에 애정을 가지고 다양한 색을 썼으며, 창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포기할 수 없는 희망, 좀 과장하자면 열망이 읽힌다.
마을의 표현에 있어 어색하게 느낄 만큼의 왜곡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어서 다른 시기보다 안정감을 느낄 때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약, 아마도 전문가 또는 전공자가 썼을, 전시실에 있던 작품설명처럼 스스로 느꼈던 고립감과 소외감을 표현한 것이라면, 그 고립감과 소외감에는 적어도 소속되고 싶고 고립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반영이 상당 부분 담겨있을 것이다.
MZ세대들이 좋아하는 작가라고 한다. 카지노 쿠폰의 여러 작품들이 고독과 방황에 대한 표현들이 공감을 이끈다고 서술한 기사를 보았다. 이 글은 주로 개인적으로 메모해두고 싶은 작품들을 위주로 서술되었고, 어머니와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들은 살피지는 않았다.
나는, 감히 '모성의 상실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공감하는 카지노 쿠폰들일 것이라고 말하겠다. 고독과 방황이 시대상이나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울분이나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나 발달 단계에서 누구나 겪는 개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모성과의 관계가 결핍한 결과로써의 흔들리는 정체성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문학카지노 쿠폰에서 뿐만 아니라 미술카지노 쿠폰에서도 모성은 대개 거룩하게 표현된다. 마치 신성 모독과 같은 종류의 엄숙주의가 발동되어 모성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카지노 쿠폰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현대에서의 모성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교육받은 모성의 형태와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행해진다. 여성이 가정 내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위주로 하고, 자녀를 양육하던 시기에 자식들이 느꼈던 모성과, 현대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이 사회생활-경제 활동을 하면서 자녀를 양육하는 지금의 자식들이 느끼는 모성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응당 그러하다고 믿고 있는 모성의 모습과 현재 노동의 영역이 여성들에게 깊이 들어와 버린 시기의 모성의 표현이 다른 것에 대하여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생명을 잉태한 자가 잉태한 생명에 대하여 느끼는 본능적인 이끌림에 대한 근본은 바뀌지 않겠지만, 표현 양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또한 母-子관계에서의 관계 맺음의 밀도, 표현 방식, 태도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아마도 이전 시대, 이전 사회보다 더 바빠진 엄마들과 맺는 관계에 대하여 결핍이라고 확정 지어버린다면, 아마도 카지노 쿠폰가 어머니에 대하여 표현한 작품들에 대하여 차마 동의하지 못하지만 내면 어딘가에서는 깊은 동의를 보내는 감상자들이 더욱 많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결론이 다소 성급하고, 위에서 말한 작품들을 보는 관점과는 일정 거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를 처음 선택했을 때의 문제의식에 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해두고 싶었다. 누가 보는 글도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