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경남도립미술관/비추천
불쑥 카지노 게임 걸 수는 없어서
경남도립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명백하다.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도 간절하게.
개관시간만 맞춘다면
카지노 게임 앞에 섰을 때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언제라도 환대받는 기분이 든다.
그가 지금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그의 컨디션은 어떠한지에 대한 고려 없이
카지노 게임 찾아가도 반기는 작품들이 있다.
카지노 게임은 태생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다.
누군가 찾아와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희뿌연 먼지는 있지만 햇빛은 좋고
평일에는 소음 많은 건물 안에 갇혀 지내므로
트인, 조용한, 공간을 찾게 된다.
전시 기획은 아쉬운 측면이 있다.
전시 프로그램의 네이밍이 ... 크게 아쉽다.
차라리 소장 카지노 게임전이라고 할 것을
<더하고 나누고라는 것이 너무나 유치하고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는 만남이라는 것의 의미에 주목한다면 괜찮아 보이지만,
전시 기획의도와 실제 전시의 구성 내용이 다소 동떨어져 보이며, 그러한 유격에서 오는 이질감이 전시에 대한 실망감을 더하는 요소가 되었다.
지역 미술관의 수준인가, 지역에 인재가 없는 것인가.
하나 더.
휴게공간이리고는 하지만 테이블과 책이 놓인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의 공간에서 유튜브를 크게 틀어놓고 뱃살을 노출시킨 채 반쯤 누워 있는 남성을 그대로 두는 지역 미술관의 수준.
그럴 거면 곳곳에 cctv는 왜 있는 것인지.
표제와 카지노 게임설명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위치가 매우 낮았다.
허벅지위치쯤.
마침 도슨트가 옆에 있어 물어보니 어린이와 장애인을 위한 것이라 했다.
의도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들이 어린이가 이해할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으며
위치도 낮은데 조명까지 카지노 게임 일반인이 읽기에는 무척 불편했다.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2층 전시실은 조명이 좀 더 밝아 낮은 위치에 있어도 읽을 만했다.
이연숙,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카지노 게임에 대해서는 좀 더 친절했어야했다.
저 큐알에는 카지노 게임과 연관된 16분 길이 정도의 춤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유투브가 연결된다.
유투브 계정에 저 카지노 게임에 대한 설명이 없다.
전시공간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흰색 벽면에 빔으로 동영상을 보여줘도 좋았을 법했다.
전시 키달로그에는 저 큐알이 제시되어 있지도 않다.
내가 작가라면 미술관 측에 유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일반 관람객들은 저 큐알이 단지 카지노 게임 설명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큐알이 어떤 내용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안내가 없다. 저 카지노 게임 설명은 카지노 게임에 대한 설명을 충분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문장도 매끄럽지 못하다.
송성진, 1평 조차
- 집을 짓고 온전하게 존속시키는 과정....생존투쟁
사상누각.. 삶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물속에 집을 짓는 고됨과 겨우 지은 집을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보는 것이 힘들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짓든 물속에 집을 짓든
어느 누가 지켜보아 준다면
그건 말이 달라질 수 있다.
몇 걸음 떨어져서라도 지켜보아 준다면.
이우환, 조응(1993) Correspondance
"텅 빈 화면 속 대조적인 두 대상"은 조용한 긴장감 속에서 만남과 조화를 이뤄낸다.
'대조적인 두 대상'이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었을까.
유사한 두 대상.
형태성에 있어 크게 다르지않은두 대상이
각각에서 분열된 자아상들이
서로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려는 듯이 보인다.
물론 긴장은 존재한다.
우하단과 좌상단이라는 위치와
둘 사이의 간격이 주는 얼마간의 긴장은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선 듯 자기의 전부가 나아가지는 않지만
자신의 일부를, 자신의 대리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자신의 일부를 통해 서로에 나아가려는 노력이 보인다.
반가움과 조심스러움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끌림을 외면할 카지노 게임 없을 것이다.
'조용한 긴장감'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과연 조용한가에 대하여서는 이견을 가진다.
종이에 콘테로 표현된 저 카지노 게임에서
어쩌면 손으로 문질러 표현한 듯 보이는 콘테의 흔적은
동적인 느낌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반가움에 대하여 서둘러 배웅을 나가는 듯한 느낌,
약간은 거친 호흡이 느껴지는 듯한,
서로의 방향을 향해 문질러진 것을 보았을 때
상대 존재를 향한 열망과 같은 것.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의 발견에 의한 설렘 같은 것.
주저하지 않는. 감출 수 없는. 강한 이끌림의 역동을 읽는다.
(개인적인 상황이 깊게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 문장은 아무리 봐도 내용에도 동의하지 못하겠고, 어딘가 어색하다.
이우환의 카지노 게임 액자 유리 왼쪽 아래 모서리 부분이다. 실금이 가 있다. 미술관측에서 파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깊이가 깊진 않으나 유리가 깨어진다면 카지노 게임에 영향을 줄 것이다.
김주석, 설경(1958)
눈 내린,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뒤덮고 있는 마을 언 시내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뒷모습, 빨래 방망이를 들어 올린 상태, 곧 내려치고 말, 곧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고 말 시점에서의 정지상태가 주는 역동성과긴장감, 곧 닥쳐올 운명을 기다리며 있는 놓여있는 빨랫감.
환경에 굴하지 않고 지속되는 빨래라는 행위에 대하여.
눈은 세상의 오염을 뒤덮고 있으며
저 빨랫감은 곧 오염이 제거될 것이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자기 단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내리쳐야한다, 일정한 주기로.
주변을 탓하며 게을리하기에 우리가 매일 뒤집어쓰는 오염물들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며, 스스로 깨끗이 하기 위한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곧 본성을 잃고 말 것이다.
최운, 여인(1965)
뭉크의 카지노 게임 중에서 웅크린 여인을 표현한 카지노 게임이 떠올랐다.
그가 하는 말들 중에서 가장 좋은 말은
혼자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저 여자에게도 그를 잠시 빌려주고 싶다.
앙드레 코타보, 마로니에 아래서 오찬(연도미상)
음식을 둔 하나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관계를 갖기란 쉽지 않다.
食口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에 대하여.
이성자, 귀천(2008)
도립미술관에서도 인근 지역의 미술관에서도 이성자의 카지노 게임을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나는 아직 그의 카지노 게임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백순공, 무제(2006)
여운을 즐기는 여자와
본인의 부족감을 느끼고 물러서는 남자.
심문섭, 무제(1981)
녹이 슬 지언정
형태를 허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그리워할 것입니다.
이만익, 여인(1989)
과연 이 카지노 게임이 여러 매체에서 말하듯 전통적인 요소를 통해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낸 걸까?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인 이만익의 <정읍사와 유사한 구도라고 말하면서, 행상인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산에 올라 걱정하는 마음을 노래한 가요라며,
누군가의 안녕과 무탈을 기원하는 모습일까?
나는 왜 해와 달, 음양의 배치와 양쪽 해와 달 아래 초록 바탕의 여성의 음순과 질구의 모습과 까치는 하필이면 여성의 음부 앞에 놓여있는지가 보일까.
불순해서.
문신, 무제(1990)
나는 우리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누가 누구에 기대지 않은 채 완전하며
또한 완벽한 대칭을 이루어 안정적이기를,
함께하여도 충분히 완전한 하나를 이루는.
이두옥, 디지털이미지(2003)
살이 빠져서 A컵 브라를 샀을 뿐인데
A컵에는 모두가 뽕이 가득 들어있는지
뭔가 세상을 속이는 듯한 찜찜함이 매일 따라다닌다
정상돌, 마산항(1990)
요즘 깊고 푸른색에 끌린다.
이상갑, 무제(연도미상)
지친 여자
모성이 언제나 위대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주절거림의 뒤에는
홀로 보내게 된 토요일의 시간에
그에게 카지노 게임라도 해볼 걸 그랬나 하는 아주 약간의 후회와
나는 이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라는 마음과
그에게 보일만한 카지노 게임이 없음에 대한 아쉬움과
전시 내용에 대한 아쉬움과
배고픔과
미술관의 소란함에 대한 아쉬움
빈백에 드러누워 애정행각을 하는 어린 연인들에 대하여 제지하지 않는 미술관 측의 관리 불성실에 대한 아쉬움.
소장카지노 게임전이라 하여 은근히 기대한 카지노 게임이 있었다.
허황 작가님의 단색화 카지노 게임.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을 접고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