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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TCH Feb 13. 2025

퇴근 후에 만난 카지노 게임.


정말 추웠습니다. 한동안 그다지 춥지 않아서 이제 봄이 될 준비를 하려나보다 했는데, 정말 추웠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오랜만에 야근하지 않는 금요일이니까요. 그리고 토요일도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6시 반이 되어 퇴근 시간이 되자 다들 움직임이 부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그렇게 큰 소리로 인사한 것은 아니었는데, 사무실이 조용했기 때문일까요. 꽤 인사 소리가 커져 버렸습니다. 이영씨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다 씩 웃어주며 말없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상당히 친절합니다. 내가 이 회사에 다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영씨가 없다면 이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삭막하겠죠.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얼굴로 한없이 불어왔습니다. 으으으-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목도리를 한 바퀴 더 돌려 감았습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이대로 집을 가야 할까,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야 할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몹시 피곤했지만 집에 그냥 간다는 것이 뭔가 굉장히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혼자인 사람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둘이 있거나 여럿이 무리를 지어 환하게 웃으며 이 얘기 저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띠리리리리리리리”

사람들을 향하던 시선을 들어오는 지하철로 돌렸습니다. 투명문이 생기면서 더 이상 지하철이 들어올 때 바람이 불지는 않지만, 바람이 분다는 느낌을 받으며 투명문을 바라보았습니다.

“철컹!”

투명문에 비친 몸 위로 지하철이 지나갔습니다. 순간 지하철에 치인 줄 알고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습니다. 지하철이 섰고,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난 반대방향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지하철에 올라탔습니다.

모두들 무표정으로 공허한 시선을 내뱉고 있거나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뭔가 폐쇄된 공간이라 그런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어느새 비슷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재미가 없어져 넋을 놓고 지하철 창문 밖으로 보이는 어둠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에게 휩쓸려 어느 역에서 내리게 됐습니다.

사실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역에서 내려, 길을 잃은 척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이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내린 그곳은 시내였습니다. 시내였으니 사람들이 많이 내렸겠죠.

지하철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왔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또 한 번 얼굴을 쓸고 지나갔습니다. 코 끝이 시큰해졌습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넓은 카페가 보였습니다. 통유리로 되어 있어 그 안에 아기자기하게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조명들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책을 보거나 노트북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누군가와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왠지 나도 그 안에 들어가 누군가의 테이블에 앉아, 얘기에 동참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운 바람 속에서 잠시 그렇게 서서 그들의 입모양을 읽으려 애를 썼습니다.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걷다 보니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작은 관 두어 개를 갖고 있는 극장이 보였습니다. 추운데 이렇게 마냥 걷느니 영화라도 한 편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장에 들어가 티켓박스 앞에 서서 상영시간표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어 현재 시간을 확인한 후 가장 빨리 시작하는 영화를 골랐습니다-라고는 해도 관이 두 개라 선택은 1관 아니면 2관의 영화였을 뿐이지만요.

영화 티켓을 들여다봤습니다. 요즘은 티켓이 이렇게 영수증처럼 나오는군요. 그때 한 카지노 게임가 나와 같은 시간에 같은 영화를 말하며 돈을 건네는 것을 보았습니다.

"1장이요."

그 카지노 게임도 혼자 온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카지노 게임도 표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요, 영화가 시작하기까지는 48분이 남았습니다. 난 그 48분 동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당신은 그 48분을, 아니 이젠 47분이네요. 47분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이 있습니까?

그때 카지노 게임가 나를 봤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 손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손이 아니라 손에 들린 티켓을 본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카지노 게임는 다시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녁 드셨어요?"

말해놓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 저 카지노 게임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지도 몰라. 뺨이라도 때리면 어쩌지?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런데 그때 카지노 게임가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 먹을래요?"

"40분 안에 먹을 수 있는 게 뭐죠?"

극장에 들어오는 길에 봤던 국숫집이 생각났습니다. 손가락으로 젓가락 모양을 만들어 국수 먹는 시늉을 했습니다. 아, 벙어리도 아닌데 이게 뭐 하는 걸까요, 가족오락관의 고요 속의 외침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카지노 게임가 손가락으로 ok사인을 보냈습니다.

국숫집에 들어서자 안경에 김이 서려 뿌옇게 보였습니다. 안경을 벗고 카지노 게임와 빈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누가 보면 이런 우리가 아는 사이이거나 어쩌면, 어쩌면 연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잔치국수와 냄비국수를 시킨 후 기다리는 동안 천장만 본 것 같습니다. 카지노 게임가 뭘 보고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국수가 나왔고, 뜨거운 국수를 후후- 불어가며 먹기 시작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소리도 내지 않고 먹고 있었습니다. 내 입에는 맛있는데, 카지노 게임의 입에도 맛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냥 코를 처박고 국수만 먹었습니다. 카지노 게임가 국수를 안 먹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국물을 마시는 척하며 카지노 게임를 봤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소리도 내지 않고 국수를 잘 도 먹고 있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까만 코트에 갈색 가죽가방을 옆으로 메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국수를 다 먹고 각자의 국수값을 낸 뒤 다시 극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적당히 앉아 있다가 입장할 시간이 되어 극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F열에 앉은 카지노 게임의 머리 위가 살짝 보였습니다.

영화는 생각보다 재미났습니다. 이런 재미난 영화가 어째서 큰 극장에서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생각하며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회사원이 꼭 나 같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극장에 불이 켜졌습니다. 순간 F열을 봤지만 카지노 게임는 없었습니다. 어느샌가 나가버린 모양이었습니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 찬 바람이 굉장하게 불어왔습니다. 찬바람에 눈이 시려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쓰윽 눈물을 닦고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을 찾아 버스노선표를 확인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확인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어디 갔을까요.

(칼퇴근하시고 뭐 했어요?)

이영씨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모르는 카지노 게임랑 밥 먹고 영화 봤어요)

(와! 대단해요! 헌팅했나요?)

(훗 아니요 그냥 별거 없었어요)

또 한 번 찬바람에 눈이 시려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눈물이 고인 터라 도로의 차들과 거리의 빛들이 모두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버스가 왔습니다. 쓰윽 눈물을 닦고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예뻤어요?)

(검은 코트에 갈색 가죽가방을 옆으로 메고 국수를 소리 없이 먹는 카지노 게임였어요)

그래요. 오늘 내가 같이 저녁 먹고 영화 본 카지노 게임는 검은 코트에 갈색 가죽가방을 옆으로 메고 국수를 소리 없이 먹는 카지노 게임였어요. 예뻤다던지 나이가 몇 살이었다던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사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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