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다류는 20세기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여배우이다. 위대한 아가씨, 즉 그랑데임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그녀는 2차 세계 대전 중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스크린에 복귀하여 국제적 명성을 회복했다. 90대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80년이 넘는 예술 인생을 통해 프랑스 문화의 상징으로 남았다. 101세로 죽은 그녀의 장수와 열정은 영화계에서 전례 없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다니엘 다류는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많은 팬들에게 '그랑데임(위대한 아가씨)'이나 'DD'로 불렸다. 그녀는 1917년 5월 1일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와인 주생산지인 보르도에서 '다니엘 이본 마리 앙투아네트 다리외'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했던 안과 의사였던 아버지가 다니엘이 7살 때 사망하자, 그녀의 어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이주해 음악 학원에서 노래 수업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다니엘도 이 학원에서 첼로를 배웠다.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아역 배우를 모집한다는 정보를 듣고 딸에게 영화 오디션을 보라고 권했다. 이렇게 해서 1931년, 14살의 나이에 다니엘은 뮤지컬 영화 '르 발'로 데뷔하게 됐다. 어린 다니엘은 깜찍한 미모와 춤, 노래 솜씨 등으로 대중을 사로잡았고 단숨에 스타덤에 올라 영화감독들의 캐스팅 1순위가 되었다.
1934년 그녀는 첫 데뷔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헨리 데코인과 결혼해 딸 캐서린을 낳았다. 같은 해, 전설적인 감독 빌리 와일더의 첫 작품인 갱스터 영화 '나쁜 피'에 출연하며 흥행에 성공했다.1936년에는 영화 '비우'에서비극적인 사춘기 소녀 역을 맡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이 영화는 한국에도 개봉되어 잘 알려졌는데,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도 그녀의 사진을 벽에 붙이고 '스크린의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수필을 쓸 정도로 대단한 팬심을 드러냈다. 당시 한국의 모던 보이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서 그녀의 인기가 치솟자 할리우드에서도 그녀를 영입하려 했고, 1938년 다니엘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 함께 '파리의 분노'에 출연하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영어를 할 줄 몰랐고 할리우드 시스템에 적응하기 어려워 1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1940년에는 도미니카 출신으로 바람둥이로 소문난 외교관 루비로사와 사랑에 빠져 1941년 데코인과 이혼했다. 다니엘은 1942년 루비로사와 결혼했지만, 당시 프랑스는 독일 점령 하에 있었고 이 기간 동안 그녀에게 불행한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여배우였던 그녀는 괴벨스가 설립한 영화 스튜디오에서 나치 선전 프로그램의 일환인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내막을 보면 나치가 그녀의 남동생을 강제 노동자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해서 협력했다고 한다. 더구나 도미니카 공화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후, 도미니카 공화국 대사였던 다니엘의 남편 루비로 사가 게슈타포에 간첩으로 체포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그녀의 남편은 독일에 억류되어 있었고, 그의 석방을 위해 다니엘은 괴벨스와 계약을 맺어 프랑스 배우들의 베를린 선전 행사에 참여하고 독일군을 위한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남편이 석방된 후 부부는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그녀는 괴벨스 일당들과 연락을 끊었다.그러나 이래저래 양쪽에 우호적인 이미지를 주지 못했고, 이들 부부는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은둔해야 했다. 게다가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그녀가 나치에 협력했다고 보고 살해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다니엘은 다치지 않았지만, 그녀의 남편 루비로 사는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부부는 다양한 프랑스 정부 기관에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결국 나치 협력 혐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 추천의 이미지는 치명적으로 손상됐고, 그녀와 루비로사는 로마로 이주해 그곳에서 루비로사는 이탈리아 주재 도미니카 대사가 됐다. 그러나 루비로사는 사교계 명사 도리스 듀크와 바람을 피워 1947년에 카지노 게임 추천과 헤어지게 됐다. 에바 페론, 에바 가드너, 제인 맨스필드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여성들과 바람을 피운 희대의 카사노바였음에도 카지노 게임 추천은 그제야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바람둥이"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남편이 여자들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즉시 이혼을 요구해 약 백만 달러의 위자료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다니엘은 바람둥이 남편을 수호하느라 몇 년 동안 영화를 촬영하지 못하다가 1949년 영화 '아멜리 점령'으로 옛 명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1953년에는 영화 '마담 디'로 전 세계인을 매료시키며 오명을 씻었다. 당시 그녀만큼 압도적이며 대체 불가의 매력을 보여주는 배우는 없었다.특히 '적과 흑', '나폴레옹',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 주로 문학을 각색한 영화에 열연하며 '문학 영화의 아이콘'이란 별칭을 얻었을 뿐 아니라, 고전과 현대극을 넘나드는 문예물의 히로인으로 사랑받았다.
그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은 1951년 프랑스 영화 제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조르주 미친키데스와 이루어졌다. 이들은 197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다니엘 다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던 한국 배우 윤정희는 프랑스 배우 중 잔느 모로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지만, 가장 위대한 배우는 다니엘 다류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9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 '인글로리어스 버스터즈'를 만들면서 다니엘 다류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녀는 2017년 100세가 넘은 나이에도 건강했기에, 장수의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좋은 머리, 좋은 다리, 가끔 즐기는 약간의 위스키 그리고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101세에 자택에서 넘어진 후 몸이 불편해졌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그녀의 순자산은 2,500만 달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