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중이었다. 흐느적거리는 문어 한 마리가 내 오른발을 스치는 듯한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테이블 밑을 내려다봤다.
"아 뭐야!"
범인은 문어가 아닌 반대편에 앉아 밥을 먹고 있던, 멀대같이 키만 큰 카지노 게임의 발이었다.
“너 발에 땀이 그렇게 많이 나서 어떡해?”
"언제부터 그랬대? 어렸을 땐 안 그랬잖아"
“손에 물고기 한 마리 키우면 되겠다"
익숙해지면 괜찮단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더운 한여름 빼고는 핫팩을 달고 사는 나와 달리 동생은 자주 손발에 땀이 나는 바람에 동생의 손이 몸에 닿기라도 하면 축축한 기운이 피부로 스며드는 듯했다. 차라리 수족냉증이 낫지 너처럼 손에 땀이 나서 연애는 어떻게 한대 하며, 그런 손을 놓지 않는 건 정말 찐사랑일 거라며 그런 사람 있으면 놓치지 말라고 동생을 걱정하는 척 놀렸다. 그리고 동생은 정말로 그의 손을 놓지 않는 여자와 연애를 했고 긴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다. 동생과 결혼이라는 두 단어가 마냥 멀게 느껴졌던 터라 누군가의 남편이 된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카지노 게임이 여자친구를 집에 처음 데리고 온 날, 내게는 무한정 티발넘인 카지노 게임이 여자친구에게는 너무나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보며 이상한 질투심을 느꼈다. 순간 드라마에서나 보던 못된 시누이가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놀랐다. 내가 보낸 문자에는 모든 대답이 “굿” 한 마디로 통일되면서, 여자친구에게는 세상 다정하게 이모티콘과 하트 뿅뿅으로 붙여 보내는 카지노 게임이 왠지 모르게 얄미웠다. 별게 다 서운했지만 주책이라는 것을 나도 알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여자친구 편을 들며 같이 카지노 게임을 욕했다. 처음 겪어 보는 낯선 감정과 이 당황스러운 질투심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게 아들 둔 시어머니의 마음인가, 아무튼 못났다 못났어.
어릴 적 우리는 안 해본 놀이가 없었다. 로봇과 인형놀이는 물론이고 소꿉놀이, 버스놀이, 병원놀이, 고치는 아저씨 놀이, 서점 놀이, 비디오가게 놀이까지,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우리는 열심히 어른들을 흉내 내며 놀았다. 당시 장래희망이 버스기사였던 카지노 게임 장난감통 뚜껑을 운전대삼아 양팔을 뻗고 좌우로 돌리며 운전하는 시늉을 했는데, 어느 날은 팔이 아팠는지, 저절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며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차가 움직인다고 했다. 이십 년도 전에 이미 자율주행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나름 훌륭한 아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무던한 성격의 동생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귀신이었다. 같은 방 각자의 침대가 있었음에도 밤이 되면 귀신이 무섭다며 좁은 이불틈을 비집고 들어와 곁에 누웠다. 침실 천장은 별이 가득한 야광 벽지로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이 별이 더 빛나네 저 별이 더 빛나네 하며 우리만의 우주 속에서 같이 잠들었다.
한 번은 카지노 게임이 훌쩍거리며 집에 들어왔던 날이 있었다. 동네 아이 하나가 괴롭혔다며 울먹거리는 카지노 게임을 본 나는 울그락불그락 씩씩거리며 카지노 게임을 괴롭힌 아이를 찾아가 “너 몇 학년 몇 반이야?” “한 번만 더 내 카지노 게임 건드렸다가 혼쭐날 줄 알아!” 하며 허리에 양손을 올려붙이고 으름장을 놓았다. 내 뒤에 쫄래쫄래 따라오던 카지노 게임 앞으로 기세등등하게 걸으며 모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지켜줘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용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하지만 Y염색체의 힘은 생각보다 컸다. 훌쩍 커져버린 동생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고 어느 순간 우리의 모든 놀이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우리의 우애는 서서히 갈라졌다.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도 만들어 놓았지만, 카지노 게임 하던 게임을 중단할 수 없었고 나는 한참 재밌어지는 친구들과의 채팅을 갑자기 끊을 수가 없었다. 사춘기의 예민함까지 더해져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말로 상처 주고 다투었다. 컴퓨터가 뭐라고. 그러다 가끔 찾아오는 휴전의 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전이었다. 캐나다에서는 한 번 전기가 나가면 몇 시간 동안 들어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나는 사실 그 시간이 반가웠다. 손전등을 들고 내 방으로 찾아와 같이 놀자고 하는 동생이 좋았다. 누나 이거 할래 저거 할래 묻는 동생이 좋았다. 이미 건너버린 한 시절이 내게 잠시 스쳐 돌아왔을 때, 다시 사라질 그 시간을 최선을 다해서 가두어두고 싶었다.
우리 집 막내이자 두 살 터울의 하나뿐인 내 남동생. 겉으로는 누가 보아도 한 유전자를 나누어가진 두 사람이었지만 카지노 게임 나와 많은 면에서 정반대인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살았던 나와 달리 카지노 게임 언제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아이였고, 원하는 걸 사주지 않으면 길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기도 했다. 특히 한국을 떠나와 고생하는 부모님을 보며 어떻게든 잘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애쓰던 나와 달리 무엇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는 동생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 결국 동생 때문에 부모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동안의 나의 모든 노력까지 집어삼킬까 불안했다. 중간고사를 코앞에 둔 어느 날, 잘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눈감고 잠들면 마음이 편해진다며 저녁 아홉 시부터 드러누운 동생에게 잔소리를 잔뜩 퍼부은 날이 있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도 모자란 판에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저러나 한심해했다. 고작 열여덟 살인 내가 부모 마음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열여섯 살 애를 다그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야 그날의 모진 잔소리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드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다니던 고등학교는 유색인종이 거의 없는, 유독 백인 학생들이 많은 학교였다. 농구와 미식축구로 각종 상을 휩쓸 만큼 이미 건장한 체격의 남학생들이 많았는데 그 사이에서 동생은 아직 덜 자란 동양인의 왜소한 체격으로 무리에 끼는 일이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 폭력과 따돌림으로 하루하루가 괴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한참 친구들과 어깨동무하며 왁자지껄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도 신났어야 하는 찬란한 나이에 그런 현실을 감당하는 방법은 일찍 잠에 드는 것밖에는 없었다는 사실도 같이. 왜 그때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말에, 말해서 달라질 게 없었다는 동생 앞에서 마음이 몇 차례 무너졌다. 나는 제일 가까운 데서 제일 가까운 사람을 돕지 못했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나는 나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먼 땅에서 각자가 살아내야 할 몫을 각자가 견디느라 서로의 힘듦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을 두고두고 아프게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끝에 모두가 절뚝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카지노 게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졸업식도 불참한 채 둥지를 떠나 한국으로 가버렸다. 캐나다에서 사는 게 너무 외로웠다고, 가끔 다시 돌아가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깨는 날이면, 있는 곳이 한국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는 그의 말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둥지를 떠난 세상 밖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더럽고 치사한 일들에 치여 자존심이 상할 때마다 신기하게도 카지노 게임 나를 찾았다. 씩씩거리며 이야기하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속상한 마음이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그 옛날 괴롭힘 당한 동생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걸었던 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 마치 누구든 혼내줄 수 있는 몽둥이를 들은 것 마냥 동생을 감쌌다. 필요했던 것은 의로운 잔소리가 아니라 이로운 내 편이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은 만큼 더 열심히 너의 편에 서있고 싶었다. 너무 가까이서 걸으면 여자친구로 오해할 수 있으니 머리 떨어져 걸으라는 말에 어이가 없어도, 매번 돈 필요 할 때만 연락해서 조금 괘씸해도, 밤길이 무서우니 정류장으로 마중 나와 달라는 부탁에 누나 얼굴로는 절대 납치될 일 없으니 마음 편히 오라는 말에 잔뜩 약이 올라도, 그래도 내가 욕하는 것은 괜찮지만 남들이 욕하는 건 절대적으로 싫은 요상한 마음.
그리고 어느덧 삼십 대가 되어 술잔을 주고받던 어느 날, 카지노 게임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참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때, 그때는 누나가 알을 깨고 나오기 전이라 항상 엄마 아빠 편에서 답답하게 굴어서 밉고 서운했어. 그런데 돌아보니 그런 누나 덕분에 내가 더 마음 편히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아. 이제는 내가 그 역할을 할게, 누나는 마음 가는 대로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봐.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어쩌면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이웨이의 길을 걷는 카지노 게임이 많이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생각 많고 겁 많은 내게, 어쨌든 죽는 거 아니잖아라고 말해줘서, 가끔은 내가 반대로도 걸어 볼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나도 무서워서 그랬다고, 열심히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랬다고, 그걸 너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듯했다.
카지노 게임 꼭 '우리' 누나라고 부른다. 나는 그 말이 마치 영원히 내 편이 돼줄 것 같은, 변함없는 확신의 말처럼 들린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편일 거라는 말로 들린다. 이제는 누군가의 남편이 되는 네가 앞으로는 혼자 외로울 일이 없기를, 땀난 네 손을 놓지 않기를, 그리고 이 글이 축사 대신 말로 다 못 한 마음까지 전해주기를, 내 마음속 영원한 우리집 막내에게, 누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