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과 무신경의 경지에 다다른 카지노 게임의 일거수일투족...
“나(카지노 게임)는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정보 기술자로, 잘 나가는 회사 직원. 취미는 동물 소설 쓰기. 애인과 헤어진 지 2년. 지금은 여자 없음. 앞으로도 희망이 없어 보임. 나의 문제점은 빈틈없음, 예민함. 나에게 필요한 요소는 가벼움, 무심함, 약간의 어리석음. 대부분의 시간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지냄. 육체적 노력을 위한 모든 능력과 취미 상실. 우울증 초기 증상. 사회에 대한 부적응적 단절 상태. 2개월 간의 병가는 곧 해고로 이어질 전망. 현재 정신과 치료 중. 내 인생은 오후 2시...”
옮긴이가 적은 주인공의 프로필이다. 현대적 삶 속의 우리들에게 한 해 두 해 세상살이를 거듭해 간다는 것은 어쩌면 카지노 게임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지만 난 그런 카지노 게임 영역이 확장되어 가는 것이 불편하고 싫어, 라고 말하는 듯한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은 불평불만을 넘어 무관심과 무신경의 경지에 다다른 듯하다.
“...우리 눈앞에서 세상은 획일화된다. 원거리 통신 수단은 점점 발달하고, 아파트 내부는 편리한 기구들로 나날이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차츰 불가능해지고, 그런 만큼 인생을 구성카지노 게임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줄어 간다. 온갖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
카지노 게임과 비슷한 의식의 지층 속에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가 서른 즈음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난 나와 세상을 극명하게 분리시켰고, 군중 속의 고독을 넘어 군중 속의 그림자처럼 살아가자, 라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혼잣말을 했다. 그닥 희망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삶에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주변인들을 담벼락 쳐다보듯 했고, 간혹 그 담벼락을 뛰어 넘으면서 홀로 키득거렸다.
“...나는 심연의 한복판에 있다. 나의 피부가 나와 세상의 경계선이다. 외부 세계는 나를 짓누르는 압력이다. 이렇게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절대적이다. 이후 나는 나 자신 속에 갇힌다. 자기 희생적인 융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목표가 없어졌다. 오후 2시다.”
정말이지 오후 2시의 나른함으로(위에 옮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오후 2시가 뜻하는 또다른 의미가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오후 2시는 절체절명의 나른함을 표상한다) 하루하루를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카지노 게임은 자신의 무미건조 오리무중 절대추상인 삶을 오후 2시로 떠나보낼 작정인지도 모른다.
“이따금 나는 결핍된 삶 속에 영원히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비교적 통증이 없는 권태가 나에게 일상적인 삶을 계속 살게 할 것이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착각이다. 지속되는 권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만간 확실한 통증이라는 고통스러운 깨달음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권태와 착각의 지속과 이로 인한 통증이라는 삶의 악순환에 대한 깨달음이 도사리고 있다. 희망은 존재하지 않고, 노력은 무의미할 따름이며, 문명은 올바르지 않은 길을 택하고, 인간은 문명의 고속도로를 영문도 모른 체 질주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카지노 게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카지노 게임 영역의 무한한 확장은 오히려 카지노 게임의 의지를 꺾어 버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규칙의 영역에서 벗어나 카지노 게임의 영역으로 들어서야만 하는 성장을 의례적으로 거쳐야 하는 현대인의 고단함과 무한한 선택의 확장 속에서 보장되는 자유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구별이라는 딜레마를 아이템으로 삼고 있지만 그닥 재미는 없다. 『소립자』가 보여주던 무지몽매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쳐주는 통찰의 묘미는 사라지고, 그럭저럭 독자로 하여금 뒤통수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게 하는 고단함 정도만 제공한다.
미셸 우엘벡 / 용경식 역 / 카지노 게임 영역의 확장 (Extension du domaine de la lutte) / 열린책들 / 2003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