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에 무신사 스탠다드가 들어선 건 작년 즈음이었다. 몇 번 들러보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그곳에서 무언가를 사본 기억은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유리문을 지나 곧장 계단을 올랐다. 2층, 남성복 코너가 목적지였다. 1층에도 괜찮은 물건들이 많았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 방문했다는 생각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계단을 네 번 올라 2층에 도착했다. 일반적으로 빌딩은 층마다 계단이 두 번 오가며 이어지는 구조인데, 이곳은 1층 층고가 유난히 높아서인지 계단 풍경이 달랐다. 오고 가고 오고 가고, 그래서 더 높고 힘들게 느껴졌다.
2층 남성복 코너에 도착하자마자 데님 카지노 게임들을 손끝으로 만져봤다. 여름용으로 입을 얇고 검은 데님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꼭 검정일 필요는 없었다. 감촉만 괜찮다면, 색은 조금 달라도 좋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온라인 스토어에 있는 상품을 모두 둘 수 없겠는걸?' 생각보다 공간이 협소해서 한 바퀴를 금세 돌았다. 수많은 옷들 사이를 지나쳤지만 내 손에 남은 건 한 벌뿐이었다. 그마저도 검은색이 아닌 진한 청색, 일단 사이즈만 보려는 요량이었다.
피팅룸 안에서 조용히 옷을 입어보았다 오프라인에서 입어보고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일이 얌체 같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편이 가격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퇴근길에 옷 봉투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평소 옷을 잘 사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그 한 벌이 이상하게 마중물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서둘러 씻은 뒤 책상 앞에 앉아서 알리 앱을 켰다. ‘냉장고 카지노 게임’라는 검색어를 입력했다. 언젠가 태국에서 사 온, 카지노 게임 패턴이 인쇄된 얇고 시원한 그 카지노 게임에 요즘 나는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서울에서도 여름만 되면 그 카지노 게임를 찾게 되었는데, 올해도 그럴 것 같았다. 하나쯤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여벌을 몇 개 두고 세탁하며 돌려 입으면 좋을 것 같았다.
국내 쇼핑몰에도 비슷한 카지노 게임가 있었지만, 내가 가진 것과 정확히 닮은 건 없었다. 소재가 맞으면 사이즈가 어긋났고, 사이즈가 있으면 재질이 맞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번 고르며 시간을 허비하다 결국 해외 쇼핑몰로 눈을 돌렸다. 오랜만에 쇼핑에 열을 올리는 내 모습이 반가웠는지, 아니면 안쓰러웠는지, 아내가 내 옆에 바싹 붙어 자기가 찾은 상품을 내게 쓱 보여줬다. 딱 내가 찾던 상품이었다.
인고의 시간을 마치고 드디어 결제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카지노 게임였다.
“지금 전화 괜찮니? 집에는 들어갔고? 쉬고 있는데 카지노 게임가 미안. 학교에 낼 유인물 인쇄가 잘 안돼서 그러는데 원격으로 도와줄 수 있겠니?”
“어휴~~ 그래, 알겠어! 내가 컴퓨터 켜볼게!”
입가로 길게 한숨이 흘렀다. 카지노 게임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직전까지 이어졌던 쇼핑의 끈이 뚝 끊긴 게 아쉬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이쪽 상황을 모르는 카지노 게임는 자신의 탓으로 그러는 줄 오해했다. 연거푸 미안하다 말하며 민망해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거 또 왜 안 되냐”, “원격 좀 켜봐라”, “컴퓨터가 망가졌나 보다”라며 당연한 일처럼 내게 도움을 요청했을 텐데, 오늘의 카지노 게임는 자꾸만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을 못 내줄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는 마치 큰 빚이라도 지은 듯, 거듭 사과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게 보따리를 맡겨놓은 양 당연한 요구를 할 때는 그 무례함이 싫고, 지금처럼 자세를 낮춰서 요청하면 그런 약한 모습이 또 싫다. 어쩌란 말인 건지. 결국 싫은 건 그 둘보다, 우유부단한 내 마음 아닐는지.
불편한 마음이 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카지노 게임에게 많은 걸 못해주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이겠다. 자식 된 입장에서 못할 짓을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한 일도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여행 한 번 제대로 보내드린 적 없고, 좋은 옷 하나 넉넉히 사드린 기억도 없다. 어릴 적 내게 무던히 주던 정이, 어느 순간 뒤집혀 내가 카지노 게임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조금만 더 다정히 말할 걸 그랬다. 전화라도 한 통 드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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