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이야기와 먹방의 공통점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은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책 읽는 이야기다. 책 읽기 시작한 계기, 책 고르는 법과 읽는 법, 좋아하는 책… 그러니까 온통 책 이야기다. 책 읽는 사람의 책 읽는 이야기 속에 눈을 뗄 수 없는 서사가 있을 리 없고 지금껏 몰랐던 엄청난 정보가 있을 리 없건만 이상하게도 발견하는 족족 집어 들어 읽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책 읽는 사람의 책 읽는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먹방을 보는 이유와 비슷한 것 같다.
“다른 사람 먹는 걸 봐서 뭐 해? 내가 먹으면 또 모를까”
수많은 케이블 채널을 넘기다 ‘맛있는녀석들 시즌1’을 보기 전까지, 유튜브 알고리즘이 ‘입짧은햇님’을 소환하기 전까지 나는 먹방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현란한 밥상머리 기술과 기발한 메뉴 조합으로 테이블 위를 장악하는 그들을 보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잘 아는 바로 ‘그 맛’을 입안 가득 채워 넣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만족감이 느껴진다. ‘쌀국수에 고수 넣으면 향긋하지!’ ‘후라이드 치킨 바로 먹으면 엄청 바삭하지!’ ‘요즘 참외 달달하지!’ 하고. 내가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음식을 먹을 때는 뭔데 저렇게까지 맛있게 먹나 호기심이 동하기도 한다. 입짧은햇님 덕분에 나는 넓적 당면이 올라간 족발을 처음 먹어 보았고 파파존스 브라우니에도 맛을 들였다.
《미스 함무라비》와 《개인주의자 선언》을 쓴 전직 판사 문유석 작가는 독서 에세이 《쾌락독서》에서 재미있는 텍스트라면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고백했다. 제목에 이미 ‘닥치는 대로’가 들어가 있는 이 책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에서 이동진 평론가 역시 구미가 당기는 대로 자유롭게 읽는다고 했다.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 할 필요도 없고 잘 읽히지 않는 책은 읽히지 않는 대로, 느긋하게 읽어도 좋다고도 했다. 이런 글을 읽으면 해방감을 느낀다. 나도 잘 아는 바로 그 ‘책 읽는 맛’을 함께 공유하는 느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준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는 양서를 엄선해 읽지 않아도 되고 손에 쥔 모든 책을 일정한 시간 안에, 반드시 다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저 내게 재미있는 책을 마냥 읽으면 되는 것이다. 독서의 목적은 그것이 지적이든 오락적이든 결국은 유희다.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먹는 게 최고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챕터에는 책에 관한 저자의 단상을 모았다. 두 번째 챕터는 《씨네21》 이다혜 기자와의 인터뷰로 채웠다.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저자의 독서는 초등학교 3, 4학년 때 본 어린이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고. 저자의 인터뷰를 읽다 보니 까마득한 책 추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독후감 숙제 없이 내가 스스로 골라 읽은 책은 아마 《15 소년 표류기》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집 책꽂이에 꽂혀 있던 소년 소녀 어쩌고 전집 중 한 권이었는데 어린 생각에도 ‘15 소년’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어색해서 오히려 호기심이 동했다. 책장을 펼친 뒤로는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아마 ‘백골’, ‘총’ 이런 단어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이를 악물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중학생 시절에는 어쩌다 학교 도서실 관리를 맡았는데 그때 내 생애 처음으로 단행본을 독파했다. 어느 일본 여성이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점을 적은 에세이였는데 목욕탕에서 정성스레 때를 미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충격적이면서도 인상적이었다고 서술한 부분이 아직도 기억난다. 한창 ‘삼국지’라는 게임에 빠져 있을 때는 《삼국지》를 읽으며 난관을 헤쳐나갔다. 말이 학생 도서실이지 실제로 찾아와서 책을 빌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껏 대여 기간을 연장하며 레벨업 해 나갈 수 있었다.
책의 세 번째 챕터에는 추천 도서 800권의 목록이 실려 있다. 다른 책이라면 이런 목록은 그냥 넘겨 버렸을 테지만 책 읽는 사람의 추천 도서 목록은 그럴 수 없다. 한 줄 한 줄 정독하며 내가 읽은 책이 있으면 ‘오!’ 하고 반가워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책은 읽을 책 목록에 정리해 둔다. 넓적 당면이 올라간 족발이나 파파존스 브라우니처럼 실제로 맛을 봐야 하니까.
푸짐한 한 상이 먹방 두 시간 만에 깔끔하게 비워지듯 이 책도 순식간에 읽혔다. 대리 만족으로 마음이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