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Nell
군복무시절, (모든 게 다 싫었지만) 가장 싫었던 건 기상시간이었다. 아침 6시가 되면 생활관 스피커로아쿠아의 <Barbie girl이 흘러나왔다. (난 지금도 이 노래만 들으면 PTSD가 온다.) 방송이 나와도 모포를 덮어쓰고 잘 수 있는 특권은 병장에게만 주어졌다.일병과 이등병은 얄짤 없이 <Barbie girl음악에 맞춰 기상 체조를 해야 했다. 그것도 누워서. (일어나자마자 누워서 하는 체조는 유일무이할 듯)방송에서는 친절하게 기상 체조 동작을 설명해 줬다.
"1번 동작입니다. 누운 상태에서 몸을 왼쪽으로 돌리고, 허리를 바닥을 향해 최대한비트세요." (네?일어나자마자?)
더 싫었던 건, 상병들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말했지만,병장은 이때도 잠을 자고 있다. 잠자는 병장은 간부들도 쉽게 못 건드렸다.) 동작을 제대로 따라 하지 않거나, 눈감고 동작을 따라 하다 걸리면 바로 베개가 날아왔다. 쌍욕과 함께.(푹신한 베개가 아니었다. 플라스틱 덩어리가 가득 든 딱딱한 베개) 10분 후엔 다 같이 앉아 웃음체조라는 걸 했다. 방송에서 '웃음체조 시작'이라고 하면 다 같이 손뼉 치면서 '하하하' 웃었다.살면서 그때만큼 현타 왔던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나이 스물다섯에 군대에 들어가 스무 살 애들한테 베개 맞고 나서웃음체조를 하고 있다니. 풋!
그러나 해야 했다. 웃음 체조를 성의 없게 하면선임에게 끌려가 울음체조를 당해야 했으니까. 겉으로는 웃음체조를 하며 억지웃음을 지어보였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던 어느 날,이등병P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한량 일병님, 군대는 훈련병부터 시작해서 계급이올라갈수록 편해지잖습니까?이게 참다행인 것 같습니다. 만약 병장으로 시작해서 훈련병으로 제대하면 자살률이 급증할것 같지 않습니까?저도 오늘 버티면 내일 나아질 거라는 희망으로 버티는 거지. 그 반대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너무 맞는 말이어서 반박을못했다. 버티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희망. 나도이 희망 하나로 구질구질한그시기를 버텼다.
그 희망의 리스트 중 날 가장 설레게 하는 희망은 계급장이 아니었다. 리모컨, 나는 생활관 오디오의리모컨을 손에 쥐고 싶었다. 쉬는 시간에 생활관의 오디오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 수 있는 특권.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 나는 음악이 고팠다. 그 좋아하던 음악을 군대 들어가고 나서부터 듣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CD를 반입해서 컴퓨터로 몰래 듣다가 하필 CD가 바이러스를 먹은 CD였던 바람에(아니면 우리나라의 보안 기술이 뛰어나서) 보안 감사에 걸린적이 있었다.보안감사 기간,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로 사령부 파견 장교가 나를 찾아왔다.
"이 컴퓨터로 바비킴 노래 들은 게 자넨가?"
살면서 이 질문만큼핑계꺼리를 찾을 수 없는 질문도 없었던 것 같다.
"제가 아닌데요." (그럼 누구?)
"바비킴이 아니고 바비김인데요?" (장난하냐?)
"CD만 틀어놓고, 듣지는 않았는데요?"(영창 갈래?)
"사무실에서 음악 들은 제가 잘못이 아니고, 바이러스 먹은 CD가 잘못입니다."(나랑 해보자는 거야?)
대답 못하고 꾸물대다 결국 보안위규자명단에올라갔다. 다행히 그때대대장님께 일일 마술강사 역할을 하며 친분을 쌓아둔 터라징계는 겨우 면했다. 아무튼, 그렇게 음악에 목말라했던 내가 짬밥이 차서 드디어 오디오 리모컨을 쥘 수 있게 되었으니,이렇게 감개무량할 수가.이말인즉슨, 우리 생활관 후임들은 내가 트는 노래를 별 수 없이 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때 무슨 카지노 쿠폰를 틀었는지 기억나는 카지노 쿠폰가 딱 2개 있다. 하나는 웃음체조 끝나고 '이불 개기 쏭'으로틀었던 MUSE의 <Starlight.(이불 개면서 <Starlight라니,이 무슨 조화?) 또 하나는,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 Top10'에 들어가는 명반, Nell의 <Healing process 앨범이었다.
내가 생활관의 실권을 장악하고부터우리 생활관에는 매일 아침Nell의 카지노 쿠폰가 울려 퍼졌다. 첫 곡 <현실의 현실은 제목부터 여기가 군대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해 줬고, 이어지는 노래들의 분위기는 기상 직후의 찝찝한 기분과잘 어우러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후임들은 당시 유행하던 원더걸스의 <텔 미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듣고 싶어 했을 것이다). 다만, 이 앨범은 뒤로 갈수록 우울톤이 짙어지기에 뒤에 있는 트랙은 가능한 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생활관에서는 절대 틀어선 안 되는 트랙이 있었다. 반드시 헤드폰을 끼고 혼자 들어야 했던,
Track 15.한계
이 노래는 가사 하나하나가 카지노 쿠폰였다. 노래 가사와 내가 처한 상황이 맞아떨어지면 카지노 쿠폰 돋친단어들이 폐부를 뚫고,심연을 훑고 지나갔다. 카지노 쿠폰가 끝날 때쯤, 마음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을카지노 쿠폰이 빗자루로 쓸고 내려갈 때까지,마음의 폐허엔 휭-휭-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내가 원하는 모습과
네가 필요로 하는 나의 모습이 같지가 않다는 것,
잘못된 건 아니지 않나요
미안할 일 아니지 않나요
그런데 왜 또 그렇게 자꾸 날 몰아세우는 건데
도대체 뭐를 더 어떻게 해
난 몇 마디의 말과 몇 번의 손짓에,
또 몇 개의 표정과 흐르는 마음에
울고 웃는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대체 내게서 뭐를 더 바라나요
내가 줄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줄 수 없음에
미안해해야 하는 건 이제 그만둘래요
- Nell의 <한계 중
나는 지금도 이 카지노 쿠폰를 신경안정제로 쓴다. 지금도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 땐이 노래를 듣는다. (이 노래로도 치유가 안되면 Radiohead의 <No surprise를 무한반복 해놓고 잠을 잔다. 이렇게까지 해서 상처가 회복이 되지 않은 적은 없다. 아직까지는.)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괜찮아진다.
'이런 감정을나만 느끼는 게 아니구나'하는생각은그 자체로 꽤위로가 된다. 노래 가사처럼 '내가 원하는 모습과 네가 필요로 하는 나의 모습이 같지가 않다는 게 잘못된 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몇 마디의 말과 몇 번의 손짓에, 또 몇 개의 표정과 흐르는 마음에,울고 웃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만 기억해도,세상의 상처는 꽤 많이 치유될 것이다.Nell이 이 앨범의 제목을 'Healing process(치유 과정)'이라 지은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아닐까. 우린 다거기서 거기라고, 그럴 땐 울어도 된다고, 다만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도록 서로조심하자고,말하고 싶어서.
내 마음에 박힌 카지노 쿠폰들과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박은 카지노 쿠폰들이 떠오른다. 그 카지노 쿠폰들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듣는 것은, 아니,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카지노 쿠폰들이 떠오르는 것은,그 카지노 쿠폰를없애는 방법이 카지노 쿠폰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 노래들을 들으며 카지노 쿠폰 흘릴 일이 여러 날있겠지만, 더 이상 나는대한민국에선 좋은 점수 못 받는,'카지노 쿠폰 많은 남자'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 카지노 쿠폰 박힌 말을 해놓고도 무감한 사람보다는, 카지노 쿠폰 박힌 말을 빼낼 줄 몰라 끙끙대는 사람보다는, 울고 싶을 때 울 줄 아는 사람이, 아니, 울어야 할 땐 우는 사람이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