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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와 카지노 게임

함께 거주가능성과 거주 불가능성

원수와 함께 거주할 수 있다


우리는 원수와 거주할 수 있을까?삶을 살아가다 보면 원수와 함께 살아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심지어 원수와 한 지붕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예수께서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 10:36)


원수는 가족이며, 가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원수는 늘 가까이 있다.가족 안에서,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우리는 미움과 상처, 분노와 실망 같은 감정을 경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죽도록 미운’ 사람은 ‘죽도록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아무리 미운 원수라고 해도 그 미움의 이면에는 사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원수는 그림자이며, 거울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사랑과 미움, 긍정적 전이와 부정적 전이를 따로 구분하여 다룬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멜라니 클라인은 사랑과 미움은 함께 통합되어야 한다고 본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미움까지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아버지가 죽도록 밉고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그를 분석해 보면, 심층적 정서는 정반대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토록 미운 아버지는 미움의 대상이 아니고 사실상 사랑하는 대상이고,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는 미움의 대상임이 밝혀질 때, 이제 그 가족은 새로운 역동이 시작되어 새로운 가족관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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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할 때,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그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워해야 원수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원수가 그토록 미운가를 파헤쳐보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수 같은 대상에 대해 사랑과 미움을 통합해 내지 않아도, 칼 융은 그 원수는 곧 자신의 <그림자 임을 언급한다. 그 사람을 원수 되게 만드는 그 요소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에 미움이 솟구쳐 나오는 것이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원수는 이처럼 자기 내면의 불안과 수치심, 시기심이 투사된 존재다. 그렇기에 미워하면서도 끌리고, 집요하게 얽히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원수는 나를 성장시키는 존재가 되고, 내 인격의 그릇을 키워내기도 한다. 원수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 원수를 통해 내 인격의 깊이가 달라지고, 관계의 수준이 높아진다. 원수를 사랑하려는 노력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내면의 작업이기도 하다.


카지노 게임는 함께 거주할 수 없다


카지노 게임는 다른 차원의 존재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는 원수와는 전혀 다르다. 원수는 내 그림자지만, 카지노 게임는 그 존재의 코드 자체가 다르다. 그는 단순히 갈등을 일으키는 상대가 아니라, 근본적인 신뢰를 깨뜨린 존재다. 원수는 천사로 바뀔 수 있지만,카지노 게임는사탄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다.

카지노 게임에 대한 경계는 성경도 다음과 같이 매우 단호하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타락한 경우에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브리서 6:4~6)


이 구절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가장 엄중하고 두려운 경고 중 하나다. 이 구절은 단지 신앙을 잠시 흔들리는 자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사람들은 단순한 초신자나 연약한 자들이 아니라,빛을 받고, 성령에 참여하며, 하늘의 은혜를 맛본 자들, 즉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실제로 경험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이의도적이고 반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돌아서는 경우, 성경은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공개적으로 욕되게 하는 배교로 간주된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끝내신다는 뜻이 아니라,배교한 자의 마음이 완고해져 회개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는 영적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언제나 회개의 문을 여시지만, 이런 사람은 자발적으로 그 문을 영원히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한번 배신한 적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배신한다.

미국의 어느 기업의 CEO가 자기 지위와 권력을 믿고 여비서와 외도를 한 사실이 발각되자, 이사회는 그 CEO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자기 아내를 카지노 게임하는 자는 회사도 카지노 게임한다'는 합리적 귀결 때문이었다.


가정에서의 카지노 게임은 치명적인 상처다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카지노 게임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결혼은 ‘이 사람만이 내 사람’이라는 절대적인 신뢰 위에서 맺어진 관계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의 코드가 작동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줄 수 있어도 그 사람에게만은 줄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 마음이 떠나면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의 외도에 대한 인식 차이도 있다. 남성의 외도는 마음 없이 육체적으로만 일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여성의 외도는 육체와 마음이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남성은 외도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성의 외도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관계의 해체로 여겨진다. 이 차이는 배신의 본질에 대한 문화적, 심리적 시선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외도에 관한 유명한 공식이 있다.남자가 외도할 때, '아내는 남편이 여자에게 마음을 줬는지' 확인하지만, 여자가 외도하면 남편은 '아내가 몸을 줬는지를 확인한다'라고 한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남자는 몸과 마음이 분열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아도 성관계를 할 수 있지만, 여자는 몸과 마음이 통합된 존재이기에 몸을 주는 동시에 마음도 주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남자의 외도가 반드시 가족해체를 가져오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의 외도는 가족해체를 의미한다.

남자는 아내를 전적으로 배신하지 않고 사랑하면서도 외도를 할 수 있다. 물론 남자들 중에는 배신하기 위해 외도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그러나 여자가 외도하는 경우는 마음에 배신이 일어났기 때문에 외도를 한다. 그래서 여자의 외도는 남자의 외도보다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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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는 품을 수 있지만, 배신자는 배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원수는 품고, 카지노 게임는 내쳐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원수는용서받을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카지노 게임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원수 됨'은 정서적 감정적 관계의 일이지만,배신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와 존재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원수와는 함께 싸우고 버티며 살아갈 수 있지만, 카지노 게임와의 동거는 내 존재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 배신은 결국 사람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치명적인 상처다.

공동체 안에서 원수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내 안의 미움과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는 그림자의 범주를 넘어선다. 원수는 나를 성숙하게 만들지만, 카지노 게임는 나를 파괴할 수 있다. 그래서 카지노 게임를 대할 때는 분별이 필요하다.


“용서는 하되, 신뢰는 회복의 조건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 말처럼, 사랑에는 분별이 따라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성숙이고, 자기 보호이며, 자유를 지키는 길이다.

이에 대한 중요한 에피소드가 다윗과 시므이 사이에 일어났다.


용서는 기억한다


다윗과 시므이, 은혜와 경계의 경계선

다윗은 인생의 정점에서 가장 쓰라리고 치명적인 배신을 경험한다. 그것은 바로 친아들 압살롬의 반란이었다. 왕궁을 떠나는 그 길은 피난의 행렬이었고, 백성은 혼란에 빠졌으며, 왕은 눈물을 흘렸다. 그 길목 어딘가, 한 사내가 돌을 던지며 저주한다. 사울 집안의 사람 시므이였다. 그는 다윗에게 '피의 사람'이라 외치며,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조롱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신하 아비새는 당장 그를 베어버리자 했다. 하지만 다윗은 말렸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내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고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 16:10)


억울하고 참담한 순간, 다윗은 신적 섭리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분노보다 겸손이 앞섰고, 저주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었고, 다윗은 다시 왕으로 돌아온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서 시므이는 가장 먼저 달려와 엎드린다. 그는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고,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많은 사람 앞에서, 공적인 자비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용서했다고 해서 신뢰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다윗의 마지막 유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시므이에 대한 것이었다. 죽이지는 않았으나, 분명한 조건을 걸어 경계했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왕상 2:6)


솔로몬은 다윗을 유언을 기억하여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는 조건을 준다. 그러나 시므이는 그 명령을 어기고 외출한다. 결과는 곧바로 집행된다. 시므이는 결국 그 대가를 치른다.

다윗의 태도는 복잡하고도 정교하다. 그는 순간의 분노로 사람을 베지 않았다. 정치적이었고, 영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위험한 사람을 결코 잊지 않았다. 용서는 마음으로 하되, 신중한 경계는 지혜로 남긴 것이다. 다윗에게 용서란, 감정의 해방일 뿐 무조건적인 신뢰 회복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므이를 살려두었지만, 그를 다시 무대로 돌아오게 하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는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우리의 삶 깊은 곳까지 다시 들이는 일은 아니다. 용서는 신의 일일 수 있으나, 경계는 인간의 책임이다.용서는 기억하지 않음이 아니라, 기억하고도 자비를 베푸는 선택이다. 그러나 자비를 악용하는 자에겐, 마땅한 책임이 따른다. 다윗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켰다. 그러므로 그의 용서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강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절제였고, 가장 슬픈 상처에서 배운 지혜였다. 그렇지만 다윗도 한번 배신한 자는 반드시 또다시 배신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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