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내담자는 카지노 게임를 창조한다

권력자(?)로서의 카지노 게임


내가 초보 상담자 시절'오늘은 내담자에게 무슨 이야기해 줄까?' '오늘은 무슨 주제를 다룰까?' 생각했다. 내가 유능한 상담자라는 착각도 있었지만, 그것이 내담자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하는 대로만 따라오면 당신은 낫게 되어 있어.'


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던 초기 상담자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짜에 불과했다. 선무당 사람 잡는 기간이기도 하다.

요즘 TV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장면 중에 유능한 상담자가 나와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 듣고 상황을 정리해 주면서 솔루션을 주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을 종합한 결과 상황에 맞는 솔루션을 주는 방식에서 그런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유능한 상담자는 내담자가 처한 상황을 꿰뚫고 핵심을 제시하는 일에 매우 유능하다. 그렇게 제시된 솔루션을 해결해 내면 내담자는 아무 문제가 없어지는 것으로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

2000년대 넘어오면서 이런 말이 나왔다.

카지노 게임

'한 나라의 국민 소득이 15000불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샤람들은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이 말에 큰 소망 없이 상담을 공부해 오던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 그렇지만 오늘날 3만 불이 넘어가도 상담실을 찾는 사람을 그렇게 늘어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우리 사회에서는 국민소득 15000불이 아니라, 1000불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받아왔다. 바로 점쟁이를 찾아가서 자신의 문제, 집안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했다. 세상에 점쟁이만큼 강력한 솔루션, 단 한 번의 상담으로 문제를 해결해 내는 강력한 상담자는 없다.

그렇지만, 단회기적인 상담에서 솔루션을 제시하면서 큰돈을 요구하는 상담에서 상담자는 일종의 권력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내담자는 꼼짝없이 상담자가 제시하는 대로 이끌려서 따라가게 되어 있다. 솔루션을 향해 상담자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담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외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내면세계, 심층적인 문제는 일체 정리된 것 없이, 또 다른 형태의 문제가 발생하기를 기다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담을 받는 내담자가 주체가 되고 상담실에서 상담자를 리더해 가지 못하면, 자기 내면에 잠재된 형식으로 잠들어 있는 자기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남녀 관계

남자는 사랑하는 자요 여자는 사랑받는 자이다. 페미니스트라면 이런 표현을 불편해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남녀관계의 오묘한 진리를 폄하하여 그냥 평준화시켜서 남녀 간에 발생할 수 있는 신화를 비신화화하여 남녀 간의 신비를 제거한다. 그래서 요즘 젊은 남녀는 연애가 재미없어한다. 신화를 제거하고 신비를 깨버리는 데 어느 누구도 연애를 할 수 없게 된다.

여자가 사랑받는 자라는 표현에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유교에서는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양자미학을 가르치는 최광진 교수는 "여자는 하늘의 높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고, 남자는 땅의 낮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라고 피력한다. 오늘날같이 가부장적 권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명제는 각 가정의 부부관계에서 증명되고 있다.

남자는 한눈에 반한 여자라면, 목숨을 걸고 좇아 다니면서 구애를 하고, 결혼까지 골인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한다. 심지어 여자의 노예가 되고, 머슴이 되어도 좋다. 왜냐하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여자 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결혼하자마자 대부분의 남자는 태도를 급격하게 바꾸지만, 그 대가를 중년기 이후에 치르게 된다. 결혼 생활 중에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남자이지만, 결국 중년기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 남자는 여자에게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 받게 되고, 좋은 것을 가져오게 된다.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추앙 하면서까지 결혼하려는 것은,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로부터 받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자는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는 사람이다. 여자에게는 숭고미가 있지만 남자에게는 숭고미가 없다. 여자는 자신에게 그런 숭고미가 있는 줄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가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게 된다.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와 내담자

내담자는 상담자를 알아가는 만큼 자기를 알게 되고, 그렇게 알아가는 만큼 치료된다. 내담자가 사랑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면, 상담자는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 있다. 이것이 라캉이 플라톤의 [향연]에서 얻은 지혜를 상담상황에 적용한 구조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상담자는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내담자가 내게 물었다(그녀는 상담사로서 일하고 있으며, 자기 분석을 위해 나를 찾아왔다)


"2년 넘게 상담을 받았지만, 선생님은 아직 한계를 보이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제 말이 맞죠?"


그래서 나는 '그렇다'라고 답변했다. 사실상 내가 한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내담자가 보는 상담자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도 아직 내 한계를 모르겠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보통은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질문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내담자는 '질문하는 자'이다. 내담자가 꼭 정확한 언어적 질문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담자 자신이 혼돈스럽고 우울해지고, 분열적인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며, 상담자 앞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상담자로서 그 상황에 맞는 답변을, 또는 해석을 해 주게 된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답변을 내어 놓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집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상담실을 갔는데, 그날 온 내담자는 내가 아내와 갈등을 겪은 그 주제를 내담자의 부부관계 갈등의 주제로 끄집어내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하, 오늘 내가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면, 이 내담자의 상황을 제대로 도와줄 수 없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말을 좀 바꿔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낳는다.


'저 내담자의 부부가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 아침에 나로 하여금 아내와 싸우게 만들었구나'


어떤가? 비논리적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담자는 카지노 게임를 창조한다는 명제를 만들고자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내담자들이 나라는 카지노 게임를 창조했다.

내담자의 이러한 창조능력은 상담의 주체가 되어 자기 상담을 완성해 갈 때 나타난다. 내담자는 상담자를 창조해 가면서 자신의 증상을 치유해 가며 자신의 셀프를 발달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는 함께 성숙해 가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