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카지노 게임이 생각난다. 그 카지노 게임을 수십 권은 족히 썼던 것 같다. 내구성이 꽤 좋았다. 단단하게 묶어 쓰기 편하고 돈도 들지 않아 좋았던 그 카지노 게임은 방학 때마다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 카지노 게임에 오로지 한자만 썼다. 한자가 아닌 한글이나 영어를 써본 적이 없으며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한 적도 없었다. 그 카지노 게임은 오직 한자를 연습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졌기에 어린 나는 미처 다른 용도로 써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카지노 게임을 싫어했다. 내가 원해서 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쓰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카지노 게임을 다 쓰는 것뿐이었다. 카지노 게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열심히 꽉꽉 채워 한자를 썼지만 매번 새 카지노 게임이 내 앞에 도착했다. 한 권을 넘기고 두 권, 세 권을 넘겨도 내 앞엔 늘 새로운 카지노 게임이 놓여있었다.
매일 새벽 집 앞으로 신문이 도착했다. 회색빛 갱지 같은 종이에 글씨와 사진이 꽉꽉 채워져 현관문 바닥에 놓여있던 종이 신문은 어린 시절 내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할아버지는 동아일보를 구독하셨다. 그리고 두툼한 신문지 사이 늘 광고지가 서너 장씩 끼워져 있었다. 병원, 학원, 학습지 등 다양한 광고가 쓰여있는 광고지였다. 요즘 같았으면 양면을 꽉 채워 광고했을 텐데 광고지는 늘 한 쪽 면만 인쇄되어 있었다. 이면지로 쓰기 좋은 그 광고지는 할아버지가 카지노 게임을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매일 서너 장씩 생기는 광고지를 차곡차곡 모아두셨다가 내 카지노 게임으로 만들어주셨다. 맨 위 가운데쯤 두 곳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붉은 노끈으로 묶으면 완성되는 카지노 게임이었다. 한 장씩 넘겨가며 세로로 쓰기에 좋은 카지노 게임이었다.
나는 방학 때마다 할아버지한테서 천자문을 배웠다. 빨간색 표지로 되어 있던 천자문을 펼치면 큰 글씨의 한자들이 빼곡히 쓰여있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으로 시작되는 바로 그 천자문. 할아버지 앞에 교자상을 가져다 놓고 광고지 카지노 게임에 한자를 썼다. 한 장에 여덟 자씩 쓰여있는 한자를 보고 그대로 따라 쓰며 연습을 한 후 받아쓰기를 해서 통과를 하면 수업이 끝났다. 어떤 날은 수업이 금세 끝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발이 저릴 때까지 써도 받아쓰기를 통과하기 어려운 날도 있었다. 가끔은 할아버지가 들고 계신 천자문 책을 곁눈질로 몰래 훔쳐보고 쓴 적도 있다. 여덟, 아홉 살 때의 기억이다.
말끔하고 예쁜 공책을 두고 못생긴 노끈으로 묶은 광고지 카지노 게임을 쓰는 게 싫었다.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하시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와의 수업 시간이 끝나면 천자문 책과 광고지 카지노 게임을 들고 내 방에 들어가 책장에 끼워 넣었다. 교과서와 공책 사이에 광고지 카지노 게임이 끼어있는 것이 은근히 눈에 거슬렸다. 어려운 한자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한테 단 한 번 불평불만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유난히 엄하신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런 말을 해볼 생각조차 못 했다. 할아버지가 날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만 알았다. 그래서 그 마음을 군말 없이 다 받았다. 싫어했던 그 카지노 게임도.
광고지를 보면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할아버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좋으면서도 싫었던 어린 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할아버지가 카지노 게임을 만들어주셨던 이유는 지금의 내가 환경을 생각해서 실천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할아버지는 1919년생이셨다. 할아버지가 살았던 그 시절 자원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종이 한 장, 밥솥에 밥 한 톨 허투루 버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였다. 종이컵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걸 한 번 쓰고 버리는게 낯설어 여러 번 썼었다고 한다. 지금보다 부족하고 불편했다고 여겨지는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많은 것들이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요즘, 넘쳐나는 풍요로 살아가는 지금을 과연 과거보다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 조금 더 많은 것들을 헤아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광고지 카지노 게임을 기쁜 마음으로 더 재미있게 써볼 수도 있었을 텐데. 종이접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나만의 상상력을 펼쳐볼 수도 있었을 텐데. 어린이였던 난 그 소중함을 몰랐다.
우리 며느리가요, 환경 운동가에요.
마트에서 일하시던 시어머니가 다 쓴 광고지를 모아 내게 주셨다. 제로웨이스트샵이란 단어가 어른들에겐 너무 생소하고 낯선 것이라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어머니는 ‘환경운동가‘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마트에서 다 쓰고 버려지는 광고지는 한 뭉치 모아놓으셨다가 내게 주시며 옆에 계신 동료분에게 나를 소개하셨다.
“우리 며느리가요, 환경 운동가라서요. 이런 거 그냥 버리면 큰일 나요.”
이제는 광고지를 기쁘게 받는 내가 되었다.
시어머니한테 받아서 가지고 온 광고지를 아이 책상 위에 말없이 올려두었다. 광고지는 한창 그림 그리기와 낙서를 많이 하는 여섯 살 아이가 쓰기에 딱 좋은 카지노 게임이 되었다. 한 장씩 가져가 쓰기에 편하고 스케치북처럼 스프링을 분리하지 않아도 되니 버리기도 편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아이가 광고지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가감 없이 자유롭게 하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광고지에 비친 글씨를 따라 써보기도 하고 잘라서 만들기 놀이를 하며 광고지의 장점을 모두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스케치북보다 학습 효과가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버려지는 자원을 활용해 친환경을 실천한다는 뿌듯함도 좋았지만 아이가 이면지를 가지고 노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거리낌이 조금도 없다는 게 더 좋았다. 가족 안에서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며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환경이든, 생활의 규칙이든 이해와 공감 없이 부모의 지시를 따르다 보면 아이는 자라면서 마음속에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릇된 결핍감과 집착을 키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다. 언제나 아이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 물티슈를 쓰지 않고 손수건을 쓰는 이유, 대나무 칫솔을 쓰는 이유, 종이컵을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아이에게 말해주고 아이의 의견도 묻는다. 아이는 우리 가족의 생활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며 따르고 있다. 어느 날 구멍이 크게 난 잠옷 바지를 이제 그만 버리자고 했더니 아이가 되려 쓰레기가 돼서 싫다고 거절해 여태껏 입고 있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종이컵을 쓰고 싶어 하는 날도 있다. 아이는 바이오리듬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광고지는 친환경적인 실천도 아니고 쓰기 싫은 카지노 게임을 억지로 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재미있는 놀이 도구일 뿐이다. 어느 날 아이는 친구들이랑 가지고 놀겠다며 자신이 잘라둔 광고지 몇 장을 접어 유치원에 가지고 갔다. 그저 책상 위에 광고지를 쌓아두었을 뿐인데 자신의 세계에 들어온 이 장난감을 마음껏 자유롭게 가지고 놀아주는 아이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