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자가 조화롭게 돌아가는 사회가 되길
이 책은 카밀은 7살 시각장애인이다. 누나 주지아와 엄마, 아빠와 살고 있다. 시각장애가 있지만, 자전거를 타고, 축구를 하고 수영을 한다. 여느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 또한, 부모 역시 장애가 있기에 제한을 두기보다는 가족원으로 역할을 주고 한계를 알려주는 대신에 할 수 있도록기회를 준다. 식당에서 선글라스 쓴 카밀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아저씨에게 누나인 주지아가 아저씨에게 창피함을 주는 행동 등 카밀은 시각장애인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맞서준다. 그런 가족들이 있기에 카밀은 장애인이지만 당당하게 살아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가 장애 유무를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사회는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상적인 모습, 마치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긴 책 같다. (어쩌면 작가가 사는 나라는 책에서 나오는 대로 현실이 그럴 수 있다) 여전히 사회는 카밀의 고모, 괴롭히는 친구들이 더 많다는 것이 현실이다. 책처럼 ‘한국이라는 나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까?’라는 기대감보다는 허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도 이 책은 아이들은 반에 장애인 친구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지하철, 식당 등 공공시설에서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 카지노 게임이 엄마와 함께 미술관을 가는 장면이 나온다. 카지노 게임은 보이지 않기에 전시품을 만지다가 관계자로부터 제지를 당한다. 책에서는 관장이 미술품을 만지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 제지하는 직원의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된다. 그러나 '미술관 직원이 규정대로 제지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는 자신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에 비난할 수 없다. 카밀 엄마가 미술관 측에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다양한 종별의 장애가 있는 장애인 관람객에게 적용하는 매뉴얼이 미술관에서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온전히 차렉씨의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다. 당사자의 노력, 주최 측은 준비, 고용된 자의 사전 교육이 다 필요했다.
이처럼 카밀 부모님이 카밀을 장애에 대해 한계를 두지 않고 키우더라도 사회는 카밀의 고모같이 장애인이라는 프레임을 씌어 본다면 카밀은 당당히 살아가기가 힘들 수 있다. 장애인이 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장애당사자, 양육자. 사회적인 분위기 삼박자가 잘 맞아 들어가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