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사랑"
깨달음과 사랑, 사실 이런 제목은 아무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그냥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적 사유는 사랑 같은 것을 취급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애착이라고 부르는 집착의 한 종류. 오히려 벗어나야 할 것이다. 애착으로부터 벗어나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참자유를 얻은 그것이 참나이며, 그 참나는 세상에 났기에 필멸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유한자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초월했기에 불멸이라고 간주된다.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갖는다. 그것은 불멸자가 오히려 유한자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다. 그리고 그 운동을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대승불교도 유사한 방향성 속에 있다. 정말로 초월한 자가 된다는 것은 중생이 되는 것이다. 중생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다. 이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보살은 단순히 눈을 뜬 이보다 위에 있다. 그는 눈을 뜨고 본 그 세상에 기쁘게 몸을 던진다. 니체라면 이를 아모르 파티, 바로 삶의 운명에의 사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아주 멋진 인간의 모습으로 떠올리는 이유는 바로 이 함께하는 사랑 때문이다. 허공에 붕뜬 초월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유한자가 되어 그 운명을 함께했기에 그는 누구보다 초월적인 면모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정말로 초월적인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과 함께하겠다고 청한다.
그래서 사랑은 프로포즈다. 존재하는 것을 향해 내딛는 동반의 용기다.
나는 이런 입장에서 깨달음을 묘사하고 있다. 깨달음은 사랑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라고. 선불교에 사랑이라는 말이 없는 이유는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禪)이 바로 그 존재의 상태다.
사랑은 존재하게 하는 힘. 우리가 오롯하게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실체가 대체 무엇인지 알 필요는 없다. 그게 실제로 경험되고 있다는 이 분명한 사실만을 알면 된다. 그리고 '그것'에게 이제 다 맡기고 살면 된다. 깨달음은 이렇게 사랑의 강물 속에 몸을 던져 그 절대적 신뢰의 흐름에 맡긴 채 사는 방식이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 중 '사랑에 대하여'라는 노래에서 이 과정을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해낸다.
깨달음은 그것을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곧 그것이 그것일 자유를 실현하는 사랑의 힘.
그것을 없애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배운다고 표현하지만, 실은 다시 기억하는 것이고, 원래 그랬던 것을 다시 찾는 것이다.
사랑은 처음부터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힘. 아주 본원적인 우리의 역량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의 속성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의 결여자인 것처럼 간주하려 하는 것은 분명 사랑에 대한 치명적 오해다. 이 오해는 사랑을 낭만적인 어떤 감정으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했다.
이를테면, 낭만은 자신에게 우연히 제공된 기적적인 상황들에 대한 감상이다. 스스로는 만들 수 없던 어떤 기대 이상의 것이 자신에게 돌진하고 임박해올 때 우리는 낭만적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통해 자기도취를 이룬다. 이제야 용서받고 구원된 어떤 이인 것처럼, 이제는 자기를 구해준 이 사랑을 통해 진정한 존재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 낭만적 감정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견해는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양육의 경험으로부터 야기되었다.
춥고, 배고프고, 체온이 필요해 울던 아이의 상황 속으로 양육자가 입장한다. 아이를 들어올리고는 따듯하게 안아주며 젖을 물린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구원되었다, 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찾아와서 자기 혼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낸 것이다.
이 지옥와 천국을 오가는 짜릿한 롤러코스터와 같은 경험이 너무 좋아 아이는 이에 도취된다. 더 지적으로 발달하게 된 아이는 이제 스스로를 방치해두고 양육자가 허둥지둥 자기를 찾아오게 만드는 상황을 조작해내기까지 한다. 그렇게 아이는 자기가 사랑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사랑을 늘 조작과 통제의 방식으로 얻어내려는 습성이 생겨난다. 성인이 되어 힘겨운 연애를 하거나, 연애로 인한 비극의 주인공이 곧잘 되곤 하는 이들은 이러한 습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원천이 부모와 같은 양육적 주체라는 착각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의 결여자이자, 나아가 사랑에 병든 이가 되도록 만들었다. 유교주의 문화권에서는 특히나 이 착각이 구조적으로 지지되어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그리스도교적 상황에 대입해보면 어떤가?
예수는 사랑을 마리아에게서 배운 것인가?
오늘날의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갖는 대표적인 착각의 내용처럼, 예수는 마리아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 그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인가? 마리아로부터 건강한 애착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말하는 대신 망치로 사람들의 대가리를 깨고 다녔을까?
그럴리가 없을 것이다.
사랑은 부모가 아니라, 비유적 존재의 표현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또는 틸리히의 표현으로는, 사랑은 존재 그 자체에서 기원한 것이다.
사랑의 원천이 부모가 아니라는 이 사실을 이해해야, 그것이 정말로 사실임을 이해해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양육의 낭만적 경험을, 그 격동적 감정을 사랑이라는 정답으로 채택하고 있다면 우리는 계속 사랑에 대해 망각하게 된다.
한개인을존재하게만드는힘은부모가아니어도, 또부모가없었어도, 그자신의존재에작용하고있는사랑의힘이다. 만약부모가자기자신을사랑의원천인것처럼주장하고있다면그는오히려그의자식이사랑으로부터분리되도록시도하고있는중이다.
"하나님 그까짓 것 믿지 마라. 너에게 젖을 물리며 진짜 사랑을 준 건 나야."
이렇게 말하는 마리아가 있었다면 예수는 늘 사생아라는 열등감에 살다간 히브리의 비루한 목수였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원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사랑은 참칭되지 않았다.
인간에게있어언제나가장궁극적인물음은"왜사는가?"이다. 이것은"왜존재하는가?"의물음이자"어떻게존재하는가?"의물음이다. 또는"존재한다는것은무엇인가?"의철학적물음인동시에, 저유명한물리학적물음의형태인"왜아무것도없지 않고무엇인가가있는가?"의물음이다.
이처럼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궁금히 여기며 거기에 관심을 갖는 이는 결국 사랑에 관심을 갖게 된 이와 같다. 사랑의 탐구자로 드러나게 된 이러한 이들에게서 이제 상기한 물음들은 다음과 같이 변주된다. 이 또한 궁극적 형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랑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랑의 원천인 존재 그 자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바로 내가 나인 사실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어디 저 멀고 심오한 차원에 있는 초현실적인 실체로서의 진정한 나를 희구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런 추상을 추구하고 있는 한 나의 존재는 점점 더 멀어진다.
나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에 한 번 났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지금의 이 유한자, 바로 이 삶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그 경험들에 대해, 바로 마음에 대해.
나는 마음을 사는 존재. 산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에 대한 관심이란 마음에 대한 관심일 수밖에 없다. 마음을 올바른 생각이나 도덕율에 따라 임의적으로 조작하거나 통제하거나 거세하려는 일을 멈추고, 마음이라는 것을 한번 정말로 이해해보고자 할 때 이 관심의 역사는 시작된다.
우리는 지금 선택한 것이다.
마음을 없애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바로 사랑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선택된다. 사랑으로부터.
그리스도교적 비유로부터 다시 한 번 도움을 받아보자. 찬송들에는 이러한 가사가 자주 나온다.
네가 얼마나 힘들고 아팠는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는, 다 보고 계셨다는, 그러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우리가 마음과 함께 살아가고자 마음을 새롭게 다시 봐보려고 한 그 관심의 시선이, 그대로 우리 자신이 바라봐지는 시선으로 똑같이 돌아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자 이 유한자의 몸으로 육화되었던 바로 그 몸짓이 경험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창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시선을 빌려,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함께 살고자 하는 그 운동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분명 사랑이었다. 찰나지만 분명했다. 잊을 수가 없으리라.
내가 나에게 관심갖는 일이 사랑의 원형이다.
나라고 하는 것을 어떤 층위, 어떤 차원으로 묘사한다 해도, 이것은 어느 경우에나 사실이다.
불교는 조금 덜 헷갈리게 언어를 마련해주었다.
내가 내 마음에 관심갖는 일이, 곧 나를 향해 돌아오는 나에게의 관심이 된다. 이것이 사랑의 운동이다.
이 사랑의 운동 속에서는 '바라보는 주체'와 '바라보이는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다. 동일하다. 동시에 일어난다. '그것'이 나다.
그리스도교는 얼마나 지혜로운가. 하나님은 우리를 아래의 것으로 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우리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이, 전지하고 또 전능한 그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다 물리고 완전히 처음으로, 나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나님은 늘 배우는 분이다. 초월자가 유한자의 몸이 되어 유한성을 배운다는 것은 그 초월성을 더욱 뜻깊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에 맡기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속에 몸을 던져 그 방식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배우는 그 방식으로, 인간인 우리도 인간 자신을 배운다.
나는 나에게 관심을 가지며 나를 배워간다. 그렇게 나로 성숙해져간다. 사랑이 잘 무르익게 만든 것이다.
배움과 사랑이 거의 동의어라는 사실을 나는 충분히 드러냈는가.
하루하루 나로 경험하고 있는 내 마음을 배워가는 일이, 하루하루 나를 향해서만 오롯한 그 사랑이 실현되게 하는 일이다.
그렇게 나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큰 사랑, 어떠한 낭만적 대상에 기인하지 않은 절대적 사랑이다.
깨달음은 이 절대성을 자신의 본성으로 실감하고 살아가는 인간존재에 관한, 바로 나에 관한 묘사다. 나는 깨달음 속에서 나로 사는 법[나와 함께 사는 법]을, 바로 사랑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