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 책상이다》 (페터 빅셀/예담)
엘리베이터에서 아래층 카지노 게임을 만나 나눈 스몰토크.
카지노 게임 : 여전히 너무 춥죠? 겨울옷 도로 꺼내 입었잖아요.
나 : 그러게요. 기온은 안 높은데, 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춥게 느껴져요.
카지노 게임 : 맞아요, 그런가 봐요. 봄바람이 아주 차요.
인사를 하고 헤어지는데, 느낌이 싸하다. ‘기온은 안 낮은데’라 해야 할 걸 ‘기온은 안 높은데’라고 했다. 사실 나에게 이런 실수는 흔한 일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대립되는 단어들을 혼동해서 사용하곤 했다. 그냥 ’혼동했다‘라 말하지 않고 ’혼동해서 사용했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의미를 헷갈린 적은 맹세코 없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 말하고 나니 또 살짝 의심이 든다. ’왼쪽‘과 ’오른쪽‘의 구별이 꽤 커서까지 어려웠던 걸로 보아 나는 그 부분에 취약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내 머릿속 언어 구조에선 아직도 ‘높다’와 ‘낮다’, ‘끄다’와 ‘켜다‘가 혼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 말고도 의도와는 다른 단어가 튀어나올 때가 많다. 어떤 아주머니가 택시를 타고 ‘전설의 고향’에 가자고 했는데 택시 기사가 말없이 ‘예술의 전당’에 잘 데려다줬다는 우스갯소리에 작은 감동을 느꼈던 건, 그게 나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실수들을 너그럽게 받아 준 모든 카지노 게임들에게 감사를! 그리고 그런 카지노 게임을 두지 못한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가령 페터 빅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말이다.
페터 빅셀의 단편집, 《카지노 게임은 카지노 게임이다》에는 세상에 단 한 명만 있을 법한 사람들이 나온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다 지구가 정말 둥근지 알아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남자, 언제나 똑같은 생활에 지쳐 사물의 이름을 바꿔 부르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게 된 남자, 평생 발명하는 일에만 집중하지만 매번 이미 존재하는 물건들만 발명하는 남자,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증명하기 위해 열차 시간표를 모조리 외우는 남자, 대화할 때 언제나 ‘요도크 아저씨’로 시작하다 결국 조사를 뺀 나머지 단어를 ‘요도크’로 바꾸어 버린 할아버지,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아서 무엇을 모르는지 알려고 온갖 공부를 하는 남자.
왕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대륙을 발견했다고 거짓말 한 꼬마 콜롬빈 이야기를 제외하고 모두 나이 든 남자가 주인공이다. 충분히 사회화 됐을 법한 사람들이 마치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처럼 행동카지노 게임 모습이 흥미롭다. 뒤집어 생각하면 중년에 맞이카지노 게임 대전환의 과정일 수도 있겠다. 지금껏 받아들였던 지식이 과연 참인지 의심하고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확인해 보려는 태도나, 무심코 불러왔던 이름과 그 이름으로 불리는 사물의 관계를 재구성해 보는 시도는 한 세계를 부정카지노 게임 일을 동반하므로 자기 극복의 한 과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요도크 아저씨의 안부인사는 나이 드신 분들에 대한 헌사로 보인다.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늘 ‘요도크 아저씨가 살아 계실 때’, ‘내가 요도크 아저씨를 뵈러 갔을 때’로 시작카지노 게임데, 그러다 나중에는 ‘요도크 요일에 요도크 근교의 요도크라는 곳에서 요도크 하나가 발생하여 두 요도크를 앗아갔다.’처럼 요도크로만 이루어진 문장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아주 오래 사시다 돌아가셨다고 마무리되는데, 화자는 이게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고백한다. 사실 할아버지는 ‘요도크’라는 말을 듣기 싫어카지노 게임 할머니 때문에 그 말을 못 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실 수 있었다면 어쩌면 더 오래 사셨을 거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괴짜이기도 하고 아웃사이더면서 편집증 환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누구나 때로는 그 범주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귀 기울여 들으면 ‘요도크’에 담긴 수만 가지 뜻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 ‘카지노 게임’을 ‘양탄자’라고 불러도 그것이 ‘카지노 게임’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각자 나름의 삶을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일이다. 다음 문장에서 ‘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따금 나는 대문 밖으로 나가 서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가 어느 날엔가 지쳐 느릿하게, 그러나 웃음을 띠며 숲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본다면, 그리고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해 준다면 나는 정말 기쁠 것이다.
“이젠 정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네.”
-<지구는 둥글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