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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Apr 06. 2025

파리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집수리 해드립니다.


경상남도 사천의 깡시골에서 나고 자라 진주를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도시로 여기며 대구에서 처음으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만났었다. 30년 전의 일이다. 그땐 뭐랄까, 시골의 이웃과 다를 바 없는 그들이 그저 중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프랑스 외인부대 제대 후, 파리에서 거의 20년을 살았던 나는, 파리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처음 군대 생활을 할 때, 휴가를 나오면 불법체류자로 체포되어 감금된 사람의 통역을 해주러 천금 같은 휴가를 이용해 발 벗고 도와주러 갔고 이런저런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 제대를 한 뒤로 그들이 북한 난민으로 영주권을 얻으려 경시청을 다니며 통역을 해주면서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몇 년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이 중국인이란 자부심과 정체성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어도 환경 때문이겠거니 생각했다. 지금은 중국 땅, 중국에서 나고 자라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성장한 그들이 중국어를 사용할 때면 괜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들은 한국인 학생들을 상대로 민박을 운영했다. 저렴한 가격에도 돈을 벌 수 있었던 이유는 파리 시내 한가운데 차지한 차이나타운에 쉽게 집을 구할 수 있었고 배추와 무 같은 채소를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요리실력도 뛰어났다. 한국인 민박집이나 호텔에서 비싸게 먹거나 많이 먹는다는 잔소리 없이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로 환대하는 그들과 한인들은 경쟁이 되지 않았다. 또한 그들에게서 우리나라에서 잃어버린 상부상조의 전통이라든가, 품앗이의 연대의식을 느껴 마음이 흐뭇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중국인으로써의 자긍심 강한 민족이라는 것에 별다른 악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이 핵심 거점이었던 곳,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을 피해 피난 오지 못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중국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민족의 주체성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위대한 중국에 동화되어 자랑스러운 중국 인민이 되었더라도 순박한 그들의 노력과 열정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최소한 돈을 위해 양심을 잃어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온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6.25를 얘기할 때면중국의 영웅을 줄줄이 꿰고 한국군과 대치해서 이룬 성과를 자랑할 때면 본질적인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점점 성장했다.

파리 조선족 협회를 만들어 파티를 할 때면 나를 초대했고 기쁘게 그 초대를 즐겼다. 나는 그들의 시골스러운 순박한 모습과 동네 아저씨 같은 다정한 모습에 반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면서 파벌이 생기고 언제나처럼 싸움이 일어났지만 결국 믿고 의지할 사람들은 그들뿐이었기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한인회의 한 축으로 노동절이 되면 팀을 만들어 축구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골키퍼로서 참여하기도 했다. 어느 날 강기갑 의원이 미쿡 광우병 소고기 등급 판정 결정을 위한 국제수역사무국(OIE) 총회에 참석하고 샤뜰레레알에서 시위를 할 때, 대사관에서 나온 직원 하나가 시비 걸듯 비웃으면서 물었다.


"조선족 팀에서 골키퍼 잘하시던데, 프랑스 온 지는 좀 됐습니까?"


그의 질문에 저간의 얘기를 하다 보니 고등학교 한 해 후배였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인 줄 알았던 대사관 직원은 고교 선배라는 사실을 알고 자세를 고쳐 잡고 인사를 했다. 대사관 직원의 삐딱한 시선에 어린 인식이 그 후로 오래 남았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파리 퐁피두센터 광장, 포부르그 거리


나는 외인부대를 제대하고 퐁피두 센터 앞, 포부르그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그땐 13구 차이나 타운에서 중국인들과 같이 생활했다. 중국인들의 게으르고 지저분한 생활이 내게 잘 맞았다. 그들은 관광으로 왔다가 차이나타운으로 흘러 들어 닥치는 대로 일하려 했지만 일자리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일할 수 있는 체류증을 얻는 것도 소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그들의 마음이 만만디의 중국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족끼리 모여 사는 곳은 깊은 침묵과 한숨, 자주 다투면서 서로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가지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우후죽순으로 민박집을 만들었고 나도 파리 근교에 민박집을 차렸다. 남자들은 집수리 업체를 냈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한국인들을 담당하는 조선족도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학하러 온 젊은 친구들은 주말이면 샹젤리제 거리로 나가 루이뷔똥 가방을 사는 불법 알바를 했고 어떤 이들은 미용실 알바를 하기도 했다. 그들의 정체성을 알기 전에, 설령 안다 하더라도 순박하고 정겨운 모습이었다.


나는 여러 민박집을 전전했다. 처음엔 역과 꽤 먼 거리였어도 밀려드는 여행객들 덕분에 넘쳐났던 민박집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여행사 가이드를 겸하면서 어렵지 않게 제법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고 오를 대로 오른 환율에 여름에도 여행객은 오지 않았다. 잘 나가던 여행사 가이드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여러 식당들이 문을 닫고 여행사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목을 차지하던 카지노 게임 사이트들 대부분이 차지한 민박집 덕에, 나는 허탕을 치고 쫄딱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 장점이 많았던 나의 민박집은 성수기를 피해 갔어도 무료 시내 투어를 진행과 푸짐한 정보, 삼겹살 파티 등과 같은 이벤트를 진행했기 때문에 가을엔 간간히 손님이 있었다.


나는 집수리를 조선족에게 맡겼다. 이웃사촌 같이 서로 상부상조하면 좋을 것 같았고 프랑스인들의 터무니없는 수리 가격에 비해 저렴한 이유도 있었다. 프랑스에 살면 웬만한 집수리는 혼자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런 이유로 집수리를 직접 할 수 있는 자재들을 살 수 있는 대형 마트가 곳곳에 존재했으므로 스스로 웬만큼 집수리를 했다. 그러나 어느 날, 화장실과 욕실 확장을 위해 오랫동안 친했던 회장에게 집수리를 요청했다. 회장은 새로 온 친구라며 집수리를 책임지는 친구에게 위임했다. 회장으로부터 민박 일을 볼 아줌마도 소개받았던 터였다. 모든 일은 조선족 협회로부터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주일간 5천 유로에 자재는 직접 사는 것으로 협의를 보았다. 싸게 해준다며 사람 좋게 웃었다. 내겐 상부상조와 이웃간의 정이 더 중요했다.집수리를 진중국인들댓을진두진휘하며이틀 만에 끝냈다. 하루일당이5만원정도 됐다.자재는 내가 산 것이니 아무리 좋게 따져도 이틀 공사에 4백을 챙긴그들의실력은 믿을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수정작업을 요청했더니 지방 출장을 다녀야 한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나중엔 아주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들은 계속 한인지 프랑스존을 통해 자신들의 업체를 홍보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프랑스존에 올라온 그 집수리


하루는 집에서 일하던 알바가 차 사고를 냈다. 임신한 부부가 타고 있던 차와 꽤 심각하게 사고를 낸 거였다.근처 조선족이 있는 수리센터를 찾아갔다. 수리 비용이 천 오백만원이었다. 수리 청구서와 내역을 요청하고 수리를 맡겼다. 조선족과 같이 일하는 중국인 직원들이 조선족은 차 수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고자질했다. 설령, 모른다 해도 그가 모은 고객으로 돈을 벌 수 있으면 그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므로 무시했다. 차는 고쳤지만 고장은 수시로 났고 수리 영수증과 명세서는 주지 않았다. 조선족은 사라졌다.


민박집에서 일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아줌마는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짜증을 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그녀를 해고했다. 채용 공고에 순박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여인이 또 왔다. 그녀는 완벽하게 일했다. 아침이면 요리를 준비하는 그녀에게 내려가 백허그를 하면서 양볼에 뽀뽀하는 시늉을 했다. 학생들이 너무 살갑고 보기 좋다고 우리를 부부라고 오해했다. 그녀는 너무나 완벽해서 주말에 쉬게 해 주고 다른 알바를 이틀씩 불러 집안일을 맡겼다. 성수기가 끝났을 때, 휴가비용을 주어 2주간 쉬게 하고 다른 카지노 게임 사이트 알바를 썼다. 그녀는 집에 기르던 강아지가 낑낑거린다고 내다 버렸다. 휴가에서 돌아온 그녀는 다시 열심히 일했고 겨울 성수기가 끝나자 당당하게 요구했다. 휴가비와 휴가를 달라고!


나는 그들이 집수리를 엉망으로 했으며 자신들의 상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프랑스존에 신고 글을 개제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집수리 공고 글 2


처음엔, 집수리를 엉망으로 하고 재수정을 요청하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물론, 답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차수리 센터 직원의 사기 행위와 여행객들에게 잔소리를 하던 직원과의 일화를 소개하며 그들이 후진타오가 연변을 방문했을 때, 모두들 한복일 입고 북한처럼 환영하는 인파를 이루어 중국의 동북공정에 앞장서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게시판이 난리가 났다. 원색적인 욕설과 더불어 그들의 중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작은 나라 한국이 왜 대한민국이라는 ‘대’ 자를 붙이냐고 공격했다.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들을 왜 못살게 구느냐고 원망했다. 무책임과 불성실함에 대한 사과는 하나도 없었다. 외인부대 출신인 내게까지 집단 공격을 하는 그들이 유학생이나 일반인들에게는 오죽하겠냐는 반문 글을 게시했다. 그런데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우리는 북한 난민입니다.


파리 15구에 모란이라는 진짜 북한 식당이 생겼다. 그는 처음 프랑스에 난민으로 왔으면서도 조선족들이 중국인으로 등록하면 단기 체류증을 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인 난민으로 신청했다고 했다. 이어,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농장에 들어가 거의 노예처럼 일하면서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니 조선족에게 속았다는 말을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10여 년 전에 몰골이 말이 아닌 그와 아내를 어떤 기자와 함께 만났던 기억이 났다.

조선족들이 북한 난민으로 쉽게 영주권을 얻는 것을 보았고 다시 진짜 북한 난민으로 신청하려 했더니 중국인으로 등록된 첫 신분으로 인해 서류 변경이 불가하다고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존 편집장과 한인 교회를 찾아가 그들의 도움을 받고서야 신분 변경이 가능했고 모란 식당까지 운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족들이 북한 난민 신분을 얻는 데는 교회가 그 뒷배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김책 공대를 다녔다고 자랑삼았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원래 모란 식당은, 교회에 다니는 잘 아는 동생이 ‘문’이란 이름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일부러 찾아와 자주 애용했던 곳, 그 동생은 내가 알제리에 프랑스어 통역과 코디네이터를 하며 한 번씩 파리로 들어올 때마다 찾던 곳이고 외인부대 동료 친구가 소개해주었던 곳이라 단골이었다. 프랑스 국적 신청을 위해 주소를 빌려달라고 하자, 가차 없이 거부하며 내 친구들 통해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던 정말 배은망덕한 친구였다. 한국 사람들,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특징이 그러했으므로 타국 사람들을 비난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모란 식당 사장은 중국인 농장에서 너무 고생했는 데다 조선족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해 이빨이 거의 빠져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파리 도착부터 자리를 잡은 현재까지 조선족의 집단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배경을 얘기할 때면 조선족들이 악마로 보였다. 조선족이 그에게 ‘너 뭐 하는 새끼야? 어디서 온 놈이야?’라고 말하며 다구리를 놓아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 난민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의 정보가 없으나 북한 사람으로 신고하는 조선족의 숫자는 늘어나는데도 프랑스 정부 당국은 부서 유지와 예산 지원을 위해, 그들이 조선족이든 진짜 북한 난민이든 상관없다고 그는 말했다.


파리 유일의 북한 식당 '모란' 12호선 Porte de Versailleㄴ 역 근처


나는 곧 한인회장이 되는 친구를 불러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좀 고집스러운 면이 있지만 모두를 잘 아우르는 포용력 있고 너그러운 친구였다. 혼자 업체도 차려 성공해서 제대한 외인부대원들을 고용해 번듯한 사장이 된 그에게 고마운 것이 많았다. 그의 아내는 후덕하고 넉넉한 성격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었다. 친구는 자신의 집에 외인부대 가족들을 초대해 푸짐한 파티를 벌이는가 하면 야외에서 행사를 할 때도 친구의 아내가 거의 모든 음식 준비를 했다. 둘은 너무 잘 어울렸다. 우리는 한번 파리 시내, 일본인 타운에 위치한 한국인 가라오케 바에서 싸운 적이 있었다. 친구는 술이 약해 취하면 추행을 부리는 단점이 있었는데 바에서 일하는 다른 카지노 게임 사이트 여성에게 추태를 부리자 데리고 나와 두들겨 패 버린 날, 친구의 입술이 찢어졌다. 악의가 없었지만 그날로부터 친구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안 마셔도 취한 것처럼 보였다) 성공한 길을 걸었으므로 농담 삼아 술을 마시다 자랑질을 했다. 친구는 열이 받았던 모양이다.

자신을 북한 식당에 초대한 것이 카지노 게임 사이트과 북한 사람들과 분리시키려는 의도라고 친구는 분석하곤 내게 화를 냈다. 내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 집수리를 이용하는 것은 단지, 값싸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며 그는 떠나버렸다. 그런 치명적인 단점이 있던 친구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어르신들과의 단합에 힘쓰겠다고 한인 회장이 되었고 연임되었다. 그와 같이 일하는 후배 하나는 아직 칼 맞지 않았냐고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공격했다. 모두들 자신들이 옳다고 믿으며 정의롭다고 생각했다.


파리는 작은 곳이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바라보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신도시 라데팡스와 몽마르뜨 뒤편으론 소외받은 듯 조용한, 그만그만한 지붕을 인 프랑스의 우범 지대 쌩드니와 쥬느빌리에, 오베르빌리에, 스타드 드 프랑스가 시골 같은 풍경으로 보일만큼 낮고 고즈넉했다. 실제로 그 거리들은 파리 시내와 풍경이 사뭇 다르게 삭막하고 부조화를 이루는 듯했다. 그곳엔 최근에 밀려든 중국인들로 인해 새로운 차이나타운이 생겼고 그 속에 스며든 조선족들도 여러 민박집들을 만들었다. 민박집이야 집주인의 허락만 받고서 등록하지 않아도 되지만 한 번씩 불시 검문이 있어 몇몇 조선족들이 문을 닫기도 했고 그들은 한국인이라고 우겼다. 내가 잘 아는 여자도 있었다.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악하여 사람들의 심리를 잘 이용했고 상대가 누구든 필요하면 쓰고 버렸다. 그녀는 결국 추방당했다. 그 마지막까지 변호사를 찾아가 도와주었다.


알제리 대도시 Batna 근처 Ain Touta. 북아프리카 아틀라스 산맥이 바트나에서 시작한다.


중국인들 밀집 지역은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안락함도 있었지만 위험도 감당해야 했다. 어느 날은 조선족 회장의 민박집에 중국 갱단 넷이 칼을 들고 찾아와 여행객들의 여권과 가방을 털어갔다. 그곳엔 똑똑하고 용기 있는 외인부대 출신도 있었지만 민박집이 털리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회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조선족과 결혼했다. 그렇게 조선족과 결혼한 친구들이 몇 됐다. 나고 자란 환경이 중국이라는 것만 제외하곤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그들중엔 북한 난민이 아닌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들도 꽤 됐다. 아직 이 작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지극히 사회적인 사람들은 이 논란 속에 휩쓸려 논란을 이어갔다. 선한 모습은 사라지고 앙칼진 칼날을 드러냈다. 나는 프랑스존에서 강퇴당했다. 그날 이후, 민박집도 망했고 나라도 망해 프랑스 생활을 완전히 접고 알제리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 통역 일에 뛰어들었다.


사하라의 나라, 프랑스가 132년간 식민지배 했던 나라, 외인부대 생활동안 한 번도 알제리인이라고 인식해 본 적이 없는 이 낯선 이슬람 국가, 외인부대 월간지 ‘케피 블랑’에 자주 등장하는 알제리는 글과 사진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나라, 이슬람 국가 챠드와 지부티를 경험했음에도 이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던 곳이 막상 현실이 되었다. 모두 영화 속 테러리스트의 모습을 한 사람들, 수염을 기르는 것이 남성적인 매력이 되고 멋지게 기른 수염을 칭찬하거나 만지면 좋아하는 사람들, 글 속에서, 영화 속에서 알아왔던 그들의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 70~80년대를 살고 있는 순박한 시골 사람들 같았다. 물론, 인종차별주의자도 있었고 오만하고 위험한 곳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가족과 같은 연대의식이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곳이라 믿었다. 가난한 국가의 경제력이 행복지수와 반비례한다는 것을 세계를 여행하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외국 유명 유튜버들이 한국의 시골에 가서 넘치는 정에 반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내가 보고 겪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마치 경험한 것이 모두인 것처럼 누구나 오만함을 가지고 자신을 잘못을 책망하는 사람에게 너는 그렇지 않느냐고 책망했다.


휴가로 파리에 귀환했다. 알제리에서 보안경〮비 관련일이나, 통역 관련 업무를 보기 위해 나름 금의환향하는 거였다. 나는 일부러 조선족이 운영하는 민박집을 잡았다. 며칠이 지나자 밤낮이 바뀐 나를 나무라며 내쫓았다. 두 번째 갔던 조선족 운영 민박집에서도 쫓겨났다.

자유와 방종이 가끔 혼동되는 프랑스의 자유는 다수의 평정심과 여유롭고 고요한 일상이 지배적이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멋져 보이던 파리는 어느 순간 먼지가 많고 거리가 지저분한 곳으로 재인식되는 것이 신기했다.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또한 어색하게 인식되었다. 서울에 비해, 거리 곳곳을 꿰고 있는 파리가 눈에 다시 들어오자 기억과 시야가 왜곡된다는 말이 이해됐다.

알제리는 오래된 대도시 외에 완성된 건축물이 거의 없다. 집을 지으면 완공하고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우리 인식에 비해 느긋하게 시작하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공사를 시작하는 알제리의 지붕들은 건물을 올리기 위한 철근이 흉측스럽게 옥상을 장식했다. 조그만 마을의 공터엔 비닐봉지가 날아다녔고 뜨거운 열기에 아지랑이가 불타오르듯 피어오르는 나라와 비교되고 옹기종기 형형색색 계획 없이 세워진 듯한 한국의 마을과도 비교되는 파리의 거리가 익숙해질 때 즘, 과거를 공유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일상이 바뀌지 않는 그들은 같은 일상을 공유하며 다른 세상을 보지 못했고 다른 세상에서 과거로 회귀한 나는 과거의 기억에서 현실이 익숙해질 때 즈음,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곤 했다.


프랑스존에 개시된 집수리 공고


조만간 알제리 국적의 아내와 서아프리카 세네갈로 갈 생각에 거제도 한화오션에서 조선소 노동자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내게 익숙하고 다정했던 조선족의 억양이 어느 순간 혐오의 대상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억양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카락이 쭈뼛이, 공포에 질린 것처럼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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