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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가용 Apr 24. 2025

낭만에 대하여 7

물리학의 낭만

옛날 일이다. 휴일 새벽 갑자기 아내가 진통을 시작했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놓고 부랴부랴 아내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우리 차 앞에 대형 SUV 차량이 주차돼 있었다. 지하 주차장 없는 오래된 아파트라 원래 그 시간대에는 차들이 겹겹이 서있긴 했다. 다만 그날은 밤새 눈이 내렸었다. 바퀴가 눈 속에 파묻힌 채 얼어 있었다. 혼자 얼어붙은 SUV를 밀었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내를 차 안에 두고 경비실로 달려갔다.


“아저씨! 아내가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차가 안 밀려요. 좀 도와주세요.”

졸고 계시던 카지노 게임는 눈도 비비지 않고 용수철처럼 튕겨 나오셨다. 그리고 벽에 세워져 있던 대비를 들고, 목장갑을 끼셨다. 대비로는 SUV의 바퀴 근처의 눈을 먼저 다 쓸어 내셨다. 나는 차주의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으나 아무 데도 붙어 있지 않았다. 눈을 다 쓸어내신 카지노 게임는 같이 밀자고 하셨다. 평소 인사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시고 약간 수줍게 시선을 피하실 정도로 조용조용한 카지노 게임인지라 구령도 조용조용 붙이셨다.

“하나, 둘, 셋. 끄응. 하나, 둘, 셋. 끄응.”


그러나 차는 아주 미세하게 들썩일 뿐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아저씨가 급히 다시 경비실 쪽으로 달리셨다. 차주 전화번호 책을 찾으러 가신 듯했다. 반대로 나는 아저씨가 놓고 간 빗자루를 집어 들고 차의 앞유리를 급하게 쓸어내렸다. 혹시 그 차가 등록되어 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아까 찾으려던 번호를 마저 찾아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경비실을 지나 아파트 지하로 섬벙섬벙 내려가시더니 큰 자루를 낑낑 메고 올라오셨다. 눈 녹이는 그 하얀 소금 같은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거 뿌린다고 눈이 순간적으로 녹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차주를 부르는 게 더 빠르지 싶어 살짝 조급증이 왔다.


그런데 그 속에는 검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흙이었다. 카지노 게임는 차를 밀 때 발을 디디는 곳에 널찍하게, 그러나 급하게 그 흙을 흩뿌리셨다. 차를 더 힘주어 밀기 위한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조급증이 얼음보다 먼저 녹아 사라졌다. 과연 흙 위에 발을 디디니 차를 밀기가 더 수월했다. 자세를 잡고, 다시 카지노 게임가 조용히 구령을 넣으셨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차는 아까보다 조금 더 들썩거리긴 했지만 여전히 붙박이인 채였다. 이건 사이드브레이크가 걸려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번호는 도대체 보이질 않고, 차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주차하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러다 땡땡 얼어붙은 차 안에서 아이를 낳게 되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택시를 불러야 하나, 아내를 둘러업고 뛰어야 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조용한 경비 아저씨 뭐라고 조용히 저한테 중얼중얼거리셨다.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워 아저씨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았다.


“네?”

“한 번에 밀려니까 안 된다고. 나랑 같이 밀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카지노 게임구령에 맞춰 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거들었다. 그런데 카지노 게임가 또 뭐라고 뭐라고 말씀을 이으셨다.


“네?”

“살짝 밀었다가 놓고, 살짝 밀었다가 놓고 그래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 번 밀면 차가 (반동으로) 되돌아오잖아. 그때 다시 밀고, 다시 밀고 해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 차가 들썩거리는 게 아래위로 들썩이는 게 아니라 앞뒤로 들썩이고 있었다. 힘을 주면 살짝 앞으로 밀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지나쳐 살짝 뒤쪽으로 물러나는 진자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 그 반동을 이용해, 같은 주기로 힘을 반복해 가하면 - 게다가 미끄러운 노면이 바퀴 앞뒤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마찰력도 굉장히 낮은 수준! - 차가 결국 궤도 밖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다는 설명을 그 짧고 조용한 말씀 속에 담고 계셨던 게다.


우리는 그 새벽 족히 2톤은 되는 차를 찔끔찔끔 밀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대여섯 번을 그렇게 과학적인 힘을 가하니 과연 차의 진자운동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한 대여섯 번을 더 반복하니 차가 뒤로 스르륵 밀렸다. 아내가 누워있는 우리 차가 빠질 수 있을만한 공간이 생긴 것이다.


물리학 대가 아저씨에게 고개를 푹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얼른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인사도 받지 않으시고 비와 자루를 챙겨 뒤돌아 경비실로 향하셨다. 아저씨 덕분에 다행히 아내는 병원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며칠 오며 가며 경비실을 엿봤다. 혹시 모를 물리학 전공 서적이 있을지 몰라서다. 하지만 거기엔 아저씨가 매일 만지고 다루시는 빗자루 및 여러 가지 청소 도구, 흙, 호미, 철집게, 목장갑 같은 일상의 것들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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