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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가용 May 02. 2025

낭만에 대하여 11

무명의 낭만

글쟁이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난 쉽게 생각했다. 글을 팔아서 먹고사는 거, 딱 그거였다. 하지만 이 단순한 말이 실현되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타인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는 걸 혈기왕성할 때는 간과했다.


그러다 소규모 잡지에 글을 정기적으로 내게 됐다. 당시 늘 궁금했던 건 판매량이었다. 독자 메일이었다. 하지만 대중들을 상대로 낸 첫 글들은 파동을 일으키지 못했다. 패배감이 가득했다. 사는 게 재미 없어졌다. 집구석에 박아놓은 잡지만 늘어났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그 잡지를 엄마가 읽고 계셨다. 내가 쓴 것만 읽으셨다 했다. 약간 감동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후기는 뜻밖이었다.

“이게 다 무슨 말이냐?”

그 후 엄마마저 그 잡지를 보지 않으셨다. 나중에 아들이 그곳 편집장이 됐는데도 엄마의 손은 잡지를 펼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일 것 같았던 그 독자는 그렇게 나를 떠났다.


몇 년 후 운 좋게 등단을 했고, 축하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전 여자친구(현 아내)가 기쁘게 동행했다. 앞에 나가서 상패도 받고 여자친구와 같이 기념사진도 찍었다. 문인 선배들과 저녁도 같이 먹었다. 이제 뭐라도 쓰기만 하면 독자들의 지갑이 열리겠거니 했다. 여자친구에게도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때가 내 마지막 전성기였다. 아직도 나는 책 한 권 못 내고 있고, 심지어 내 모든 글의 첫 독자일 것만 같았던 그때의 그 여자친구는 아직까지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 보낸 글들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뭔가가 생각나 쓸 때마다 일단 카톡으로 전송했는데, 100% ‘읽씹’을 당했다. 어김이 없었다. 심지어 아부성 가득한 자기 찬양글에도 무반응이었다.


내 글 어땠냐고 스스로 묻는 게 가장 쪽팔린 짓이라고 배웠다. 독자로부터 억지 감상을 이끌어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후기로 점 하나 찍어주지 않는 나의 첫 독자에게 어땠냐고 묻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그 누구의 지갑도 못 여는 내가 글쟁이로서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은 독자의 한결같은 ‘읽씹’에 마찬가지로 ‘읽씹’하는 거였다.


그러다 내가 참다못해 은근슬쩍 물었었나. 아니면 지나가는 말처럼 그 무관심을 힐난했었나. 아내와 내가 쓴 것들에 대해 잠깐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내는 내 글이 너무 우울하고 슬퍼서 뭐라고 감상을 남기기가 어렵다고 했었다. 자기 취향 아니라는 의미다. 아내는 희망과 생명 가득한 글을 좋아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 독자는 아직 날 떠나지 않았지만, 무반응에 지친 내가 더 이상 글을 보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읽씹’을 호되고 끈질기게 당하고 나니 ‘글쟁이가 된다’는 것에 대해 좀 더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누가 지갑을 열어주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 내 글은 팔릴 글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지 이미 오래다. 읽고 반응만 해줘도 감지덕지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형태든 독자의 반응이 있는 날은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노쇠한 뇌에서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글감이 넘쳐나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조울증처럼, 하향조정된 나의 목표에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든다. 그 조금의 반응조차 없는 시기를 지나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면 어떨까? 그때 나의 목표라는 건 어디까지 내려갈까? 여기서 더 밑으로 갈 데가 있나? 그때가 된다면 ‘쓴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의 수준에 이를 것인가?


놀랍게도 현실은 이미 그 단계의 초입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고 속삭인다. 아이 셋을 키우는 하루가 ‘집필의 여유’ 따위를 도무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 작가들처럼 자기 전용 서재에, 집중 잘 되라고 조명 어둑어둑하게 해 놓고, 아무런 방해가 침투하지 못하게 문까지 잠가두고 백지와 1:1로 마주하는 시간을 꿈꿨었는데, 개뿔이다.


우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들쳐 안고 머릿속으로 쓰다가, 그러다가 내가 먼저 잠들어 머릿속으로 썼던 것을 하얗게 잊어버린 채 깨어나기를 반복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억나지 않지만 어쩐지 세상을 뒤흔들 문장이었던 것 같은데, 또 빛날 차례를 놓쳤다. 막내 재우고 나면 첫째 컴퓨터를 고쳐야 하고, 둘째 자전거 손보겠다고 약속해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 아내가 양육 문제에 고민하거나, 집 어딘가 나사 조일 데가 있다고 하면 거기에 또 집중해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 집필은 개뿔이다.


여기까지 쓰는데 또 아이가 일어나 울기 시작온라인 카지노 게임. 첫째와 둘째를 투입시켰지만 역부족인 듯하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서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재워야 할 것 같다. 지금부터는 머릿속으로 세상을 뒤흔들 명문들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나는 붙잡을 수 없다. 세상은 오늘 뭔가 위대한 것을 놓칠 수 있지만 나조차 위기감은 없다.


그렇다고 그 문장들더러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기억나지 않을 뿐 그 문장들이 나를 지나갈 때 나는 그 어떤 것보다 높은 수위의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희열마저 사라진다면, 그때야말로 나는 글쟁이로서 실격이 아닐까. 문장에 대한 희열. 아무도 몰라줘도, 누구에게 설명하지 못해도, 나만 느끼는 그 희열. 그게 나라는 무명 글쟁이의 실낱같은 희망이다.


그렇다면 ‘쓴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는 글쟁이 최하위 목표는 최하위가 아니다. ‘나만 아는 희열 잃지 않기’라는 게 그 아랫단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내가 나의 독자로서 남아 있어줘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내가 내 글에 감상평 남겨주고, 댓글을 달아주고, 응원을 해줘야 한다. 어머니와 아내도 거절한 내 글을 내가 봐주지 않으면 누가 보겠나. 오늘도 나는 내가 독자이므로 글쟁이로 남는 데 성공했다. 이런 자위를 요즘 말로 정신승리라고 하던가.


다시 그 낮디 낮은 목표를 돌아보니 밑에 구덩이가 하나 또 있다. 깊다. 거기로 빠지면 영영 쓰지 못할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 무덤의 이름은 외로움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무명 작가들이 거기에 빠져 있었다. 외로웠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난 한 사람도 건질 수 없다. 날 돌아보는 게 고작이다. 난 외로운가? 그렇지 않다. 집필실 대신 얻은 내 살붙이들이 날 외롭지 않게 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들을 부둥켜안고 있을 때 스치는 문장들이 날 외롭지 않게 온라인 카지노 게임.


외롭지 않은 한 나는 아직 괜찮다. 하지만 그 구덩이가 그리 멀지 않기에 정신 차려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 무명의 무덤은 외로움이라는 걸 알았으니 힘껏 도망쳐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 도망치려면 더 쓰고 더 읽어주고 더 희열해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 살기 위해 써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건데, 그 말은 ‘양을 채워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뜻이다. 아직은 그저 그득그득 써야 할 때인가. 죽도 밥도 안 되지만 일단 쓰고 또 써야 하는가.


하긴, 글 한두 편으로 세상을 뒤흔들 수 없었으니 그 한두 편이 나올 확률을 높이기 위해 계속 써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건 논리적인 결론이다. 뭐라도 해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절망은 이르다. 뭐라도 써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무명이라도 외로워하기에 이르다. 그러니 날 희열케 하는 문장이여, 오늘도 자는 아이 옆으로 날 데리러 오라. 내가 읽어주고 칭찬해 줄 테니 우리끼리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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