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없고 꼰대가 가득한 시대
진짜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경남 진주의 어느 한약방, 60년동안 한약방(남성당 한약방)을 지킨 김카지노 게임 선생.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도 인터뷰 한번 하지 않고,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승용차를 가지지 않은 사람.
많은 이들을 도우면서도 자신의 옷 한벌 허투루 사지 않는 사람.
다큐 <어른 김카지노 게임는 그 사람에 대해 김주완 기자가 김카지노 게임 선생의 과거 행적을 뒤쫓아 경남권 여러 곳에서 김카지노 게임 주변인을 만난 기록이다. 윤석열 탄핵 인용후, 문형배 재판관의 일화와 함께 김카지노 게임에 대한 이야기도 재조명 받게 되었다. 그러한 계기로 어느 토요일 저녁 나도 이 다큐를 시청하게 되었다.
다음주 유튜브 채널 <웃다가 헤드헌터 특집편에 출연하게 되는 것을 계기로, 최욱방송을 보다가 최욱과 희희희희 노영희 변호사의 러브라인 서사를 몰아보다가, 문형배 재판관에서 이 다큐까지 오게 된 것.
45살, 어른의 나이에 들어선 제니퍼씨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보게 되었다. 지난주 친구들과 들른 백화점에서 명품백을 사지 않았던 나자신을 칭찬하면서. 이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보다 의미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어느정도 답을 찾은 것 같다. 일단 내게 커리어상담을 요청해온 사람들을... 내 일정 바쁘다고 미뤄두었었는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 해야겠다.
젊은 시절에는 투쟁적이고 호전적이고 거진자에 대한 반감이 컸던 기자였다. 기득권의 악행을 발굴하는것에 역점을 두고 살았는데..그래도 꿈쩍도 안하고 바뀌지 않고 한 세대가 지나면 또다른 토호세력이 출몰하는 과정에서 회의감과 좌절감이 들었다. 채현국선생의 선한 영향력을 취재하면서 그런것이 확산되는걸 보면서 글쓰는 사람, 기자로서 효능감을 느꼈다. 그래서 좋은 분을 찾아서 널리 알리는것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유용한 방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외근 기자에게는 차가 필요했지만 차를 사면 수지타산이 도저히 맞지 않았다. 그때부터 촌지의 노예가 되어야만 했다. 그때 김카지노 게임 선생을 떠올렸다. 돈이 많음에도 평생 차를 갖지 않고 검소하게 사시는데 부정한 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다 취재에 협조적이었다. 이런 사람은 알려야 한다는데 모두 공감했다. 지금껏 취재를 하는동안 이렇게 모두가 협조적인취재는 처음이었다.
진주신문 김주완 기자
노무현후보가 대선 당시 진주에서 김카지노 게임 선생을 만나고싶어해서 자리를 주선한적이 있다.
그때 노무현 후보가 김카지노 게임 선생을 뵙고 돌아오는길에'참 좋은 사람 만났다'고 말했고 대통령당선후 식사한번하자고 제안했지만 예상대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나랏일 바쁜데 나같은 사람 만날 필요없다. 뜻은 고맙다. 고.
김성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좌역 (2002년 대선 당시)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낭비하는 모습을 보인적이 없다.
절대로 학부모한테 손벌리지마라, 고 말씀하셨다.
국회의원이 직접 자기 아는사람이 명신고 가게 되었는데 잘해주라는 말을 듣고 이사장이 바로 그사람 채용을 무효로 하라고 했다.
1983년 7월 준공식할때 이사장이 선언했다. 학교가 본궤도에 올라가면 내가 이걸 국가에 헌남하겠다, 고 선언했는데 그걸 실천했다. 이사장님에 대해 돈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사장님은 돈이 많기보다 뜻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학교 국가게 넘길때 약국 건물과, 학교에 따른 부속적인 것 모든걸 넘겼다. 110억이 넘는 재산이었다. 이사장 나이가 되어보니까 더 대단한 결정이다싶다. 저분을 닮고싶은데 도저히 닮을수가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사셨으니까 평생 힘드셨겠다, 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분의 삶을 닮을 수 없어서 부끄러웠다.
이달희. 명신고등학교 영어교사 (1986-1993)
효과가 있는데 약이 싸서 입소문이 많이 났다. 돈 필요하면 많이 빌려다 썼다.
남성당 한약방 시절 이웃
선생님이 19살에 개원했다. 날이새면 첫차로 온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선생님은 박리다매 이야기를 많이했다. 약값이 싸니까 많이 오는가 생각했는데, 아무리 싸도 먹고나서 효과가 있으니 왔지 괜히 오진 않았을거다. 직원이 20명으로 많았다. 월급은 다른 한약방에 비해 2-3배 높았다. 워낙 후하게 주셨다.
진주고, 대아고등에 장학금을 많이 내고 있었다.
서창길, 남성당 한약방 전 직원 (1970-1988)
저는 도움을 받는 자였지만 그게 저를 위축시키지 않았고 선생님도 전혀 그런 것들에 대해서 티를 내지 않으셨다.
권재열, 충남대 의과 대학 교수 (김카지노 게임 장학생, 1981-1989)
공부 많이 한 스님, 깊은 호수 같았다. 당시 50대였는데 그런 남성 드물었다. 자기 나타내는 그런 남성들이 아니었고 결이 달랐다. 여성인권 말도 못끄낼 상황이었는데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결이 정말 달랐다.
스스로 구석진 자리, 제일 끄트머리에 가서 앉고 돋보이려 하지 않았다.
정행길, 진주가정폭력피해여성 피난시설 이사장 (전 진주가정폭력 상담소장)
최악의 선택을 피하게 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셨다. 정신 혼미하거나 중심 못잡을때 마치 뒤에서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는것 같다.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
카지노 게임는 절대 화내지않고 절대 비난하지 않는다. 절대 화내지 않는 비결이 뭔지 물어본적도있다. 단점 없는 것이 단점이다. 딸셋 아들하나인데 자식들이 결혼할때 누구에게도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 돈도 10원도 받지 않았다.
불교에 무주상보시 (내가 내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것)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배어있는 사람이다. 사람 차별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진짜 교육가다.
김카지노 게임 삶은 안 부럽다. 너무 신과 같으니까. 일관성있는....말은 쉬워도 긴장의연속 아니겠습니까?
최관경, 부산교육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김카지노 게임 초등학교 동창, 70년 지기)
석달에 한번씩 찾아뵈었는데 한약방에서 기다리는데 평화로우니까 아직도 약재 냄새를 맡으면 좋은 기억이 난다. 등록금 주시면 현금으로 받아오곤 했다. 선생님은 들으시는 편이다. 학교에서 어려운건 없냐, 필요한 건 없냐. 지침을 주거나 알려주진 않으셨는데 선생님 삶 자체가 내게 지표가 되었다.
선생님 장학생 스펙트럼이 넓다. 재판받은 사람, 재판하는 사람. 변호사 시험치고 변호사 될줄알았는데 스님이 된 사람도 있다.
이준호, 서울대 자연과학대 교수, 예쁜 꼬마선충 전문가, 김카지노 게임 장학생 (1977-1988)
공부 잘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운 김카지노 게임 키즈다. 간섭 안하시고 니가 원하는걸 해라, 말씀하셨다.
젊은 우리에게 해줄말씀은 많으셨는데 일부러 안하신것 같다. 베푸는입장에서 말씀하시면 부담이 될것 같아 굉장히 자제를 많이 하신게 아닌가 싶다.
학생운동으로 몇년 살았다. 반제동맹 사건이었다.
부모가 등록금을 준것도 아니고 남이 대준 등록금인데 데모를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길은 둘다 똑같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을 하고 그 곤욕을 치르는데 공과를 따지자면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그 당시에 우종원교수에게점수를 후하게 주었다"
선생님은 생활비까지 주셨다. 기숙사비와 혼자 생활하기 충분한 돈을 주셨다.
우종원, 사이타마대학 경제학부 교수, 일본 사회정책학회 회장, 김카지노 게임 장학생 (1977-1983)
독립운동하듯이 진주신문을 했다.
김카지노 게임 선생 책을 준비하자는 제안을 받고, 이사장님 허락 받아오라고했는데 노발대발 하셨다고 했다.
윤성효, 오마이뉴스 기자 (전 진주신문기자)
사실 김카지노 게임 선생이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본인 선행을 알리는걸싫어한다. 강상호 선생 묘비세운것을 김카지노 게임 선생이냐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 시간이 지나면 가로채려는 사람이 나타나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밝히게 되었다.
일제시대 관공리지냈던 3천명 조사해서 일제강점기 인명록을 출간했다. 출판기념회는 생각도 못했다.
박노정 선생님께서 금일봉을 내밀면서 그냥 넘어가면 안되니 격식을 맞춰해라. 김카지노 게임 선생이 주신거다, 해서 출판 기념회를 하게 됐다. 김카지노 게임 선생은 '친일문제'해봐라라고 한적이 없다. 내가 자청해서 했다. 강상호 선생님 묘비를 세웠을때 김카지노 게임 선생이 보여준 모습들과 김카지노 게임 선생이 보여준 모습들이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형평운동에 왜 집착하실까? 출생에 이야기가 있는건가 그런 마타도어가 있었다. 그런거 하나도 없었다. 삶으로 증명했다.
김경현 행안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친일문제 전문가, 전 진주신문 기자
돈이라는게 똥하고 똑같아서 모아 놓으면 악취가 진동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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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김카지노 게임 선생을 위해 인터뷰해준 분들
김춘하, 남성당 한약방 직원(1988-2022), 김카지노 게임 막내동생
허기도, 전 산청군수 (명신고등학교 생물교사, 1986-1991)
박영석 이탈리안 레스토랑 대표
옛날에는 약값을 기술료라고해서 엄청 많이 받았는데 기술보다 수가를 줄이려고 했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을 상대로 벌었다.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 내가 그돈으로 호의호식, 호화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수 없어서 차곡차곡 모아서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70년전에 형평운동기념사업을 시작할때 차별을 없애려고했는데 30년이 지나도 차별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것 같아 안타깝다.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데 새로운 차별을 없애는 방법을 공부하고 발표하기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명신고 설립당시 교사청탁이 많았다. 세가지 조건을 걸었다. 내친척은 한사람도 안쓰겠다. 돈을 받고 한사람도 채용하지 않겠다. 권력에 굽히지 않겠다. 이 3가지가 해결되면 옳은교사를 뽑을 수 있다.
국회의원이 잘 봐달라는 선생을 탈락시켰더니 며칠뒤 교육부에서 가사가 내려와 이잡듯 잡았다. 그렇게 나오면 오히려 나는 쉽다. 왜냐면 잘못한게 없기 때문이다. 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힘이 되었던 것은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왔다는 것. 그게 하나의 큰 힘이 되었다.
(선생님을 찾아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요?)
노무현 대통령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가 잘 나가지 않으니까 그사람들이 찾아왔다.
(왜 정치를 안하셨어요?) 정치가 도저히 마음에 안들었다. 반골기질이 있어서...난 정치인은 아니었다. 자유로운 기회가 주어졌다면 대학교수가 되었을거다.
전교조 선생님들하고 교류를 많이 했다. 한겨레 신문에 전교조 명단을 실었는데 명신고교 선생님이 많았다. 해임하고 결과 보고하라고 했지만, 무조건 한명도 해임안시킬거라고 버텼다.
진주신문 창립 가치를 지켜주지 못한게 안타깝다.사회가 겁나는데가 없이 설치면 사회가 몰락하는거거든. 결국 5도 10적이라고 지방 토호세력이 많았다.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고 찾아온 장학생이 있었다. 내가 그걸 바란건 아니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거다.
60년간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삶의 목표로 하루도 긴장을 놓치않았던 삶을 살던 김카지노 게임 선생의 은퇴하던 날의 풍경을 담은 사진 한장이다.
진주가을문예 (1995-2021)
남성문하재단(이사장 김카지노 게임)이 1994년부터 기금을 마련해 만든 신진작가 공모전. 남성문화재단 해산과 함께 27회를 마지막으로 종료. 남성문화재단 해산후 경상국립대 기증(주식 28억, 현금 6억 5천, 총 34억 5천만원)
진주 가정폭력피해여성 피난시설 (1999년 개소)
가정폭력 피해여성과 동반자녀에게 일시적인 안식처와 회복프로그램 지원. 김카지노 게임 이사장의 지원덕에 탄생하게 됨.
명신고등학교
설립자 김카지노 게임 이사장. 김카지노 게임 이사장 40대에설립
대안문화예술공간 책마을
김카지노 게임 선생 총 1억원 지원
진주신문
최대지분 보유
극단 현장 (1994)
당시 돈으로 3천만원 도와주심
형평운동기념사업회 (1992)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그러므로 아등은 계급을 타파하며..."
김카지노 게임 선생이 발의하여 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초창기 백정의 삶의 형평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새로운 차별을 없애자, 라는 의미로 취지.
남성당 한약방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