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기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설향
택배가 도착했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말은 늘 일정량의 설렘을 담보하지만 이번 택배는 평소의 배 이상의 설렘을 함께 담아가지고 왔다. 책 몇 권이었지만 그 설렘의 무게만큼 택배가 더무거웠을 거다.
오래 기다린 책이었다. 텀블벅에서 펀딩을 통해 제작되어 실제로 내 손에 도착하기까지는 달력이 넘어갈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요즘 어떤 책들은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도착하는데, 이렇게 긴 기다림으로 만나야 하는 책이라니. 솔직히 말하면 주문한 지도 깜빡 잊고 있었는데, 택배가 왔다는 문자를 받고 깜짝 선물이 도착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설렘과는 별개로, 책은 '죽음', '애도',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길지 않은 책이라단숨에 읽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가끔씩 책을 덮어야 했다. 자주가슴이 아팠고, 또 가끔은 눈을 감고 한참을 진정하고 나서야 다시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 김설향 작가는 8년의 투병 끝에 떠난 엄마를 기억하면서 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책의 표지에는 흰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애도 기간이 시작되었습니다]하고 제목이 쓰여 있다. 그 제목 위로 파랑과 초록과 다홍색과 노랑, 검정, 은빛 등 다채로운 색의 점들로 이루어진 그림이 있다. 애도 기간이라는 말을 붙여서 이 그림을 보면 어쩐지 눈물 같기도, 어쩐지 발자국 같기도 하다. 8살짜리 딸에게 물어보니 무덤에 풀이 자란 모습 같다고도 했고, 비가 내리는 풍경 같다고도 했다. 표지의 그림은 작가의 동생이 엄마를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해순'이라는 엄마의 이름, 바다가 담긴 그 이름을 기억하며 엄마가 좋아하던 바다와 들꽃을 담아서.
책의 제목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었다. 이문장을 써 놓고 보니 더욱 그렇다. 엄마를 떠나보낸다는 것이 과연 끝이 날 수 있는 일일까? 애초에 끝이라는 게 있을까. 애도기간은 시작될 수는 있어도 끝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애도의 기간이라는 것이 온통 눈물로 얼룩지고 상실의 슬픔과 북받치는 뜨거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바다를 보면서 엄마가 떠오를 수도 있고 등산을 하다가 만난 들꽃에 갑자기 울컥할 수도 있다.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폭삭 속았수다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 애순이와 엄마의 이야기를 보아도 그렇다. 엄마는 오래전에 애순을 남겨놓고 떠났어도 애순의 엄마 그리기는 애순이 흰머리가 성성한 노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거세게 바람이 휘몰아치는 제주바닷가, 현무암 바위 위에 서서 엄마를 목 놓아 부르는 문소리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내 엄마도 아닌데 나는 많이 울었다.
책은 작가와 엄마,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분명 그 이야기이지만 그저 그것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긴 투병의 기간 동안 암환자와 그 가족, 그들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고 죽음을 둘러싼 여러 화두를 다루었다. 그저 한 개인의 생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가지고 있는 무게가 상당하다. 그중에서도 책의 초반에 외래진료를 기다리며 로비에 가득한 환자 혹은 보호자들을 보면서 작가가 쓴 문장이 내게 문득 위로가 되었다.
우리 마음과 같지 않고 맑은 하늘에 날벼락 내리듯 그렇게 흘러갈 때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동지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풍은 금방 잠잠해질 테고, 잠시 이는 바람도 금세 멈출 것이다.
p.41.
우리 엄마도 암환자였던 때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의 일이라 나에게는 이제아주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기억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암환자나 암환자의 가족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마음자리를 한걸음 가까이 가고 싶고 뭐라 위로를 전하고 싶지만 말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는신분증 내밀듯이 '우리 엄마도 암이셨어요'하고 말한다. 그러면 갑자기 대화 상대와 한껏 친해진 것 같고 가까워진 것 같고 서로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우리 엄마는 암투병을 끝내고 지금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시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비슷한 상황에 우리가 함께 처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길바닥에 함께 털썩 주저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작가는 이 책을 그런 위로를 전하기 위해 썼다고,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다독임을 전하기 위해 썼다고 했다.
책에서는 작가와 그 가족의 이야기뿐 아니라 주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다. 다양한 투병과 헤어짐의 이야기, 그 속에서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살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치매를 겪었던 작가의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고 그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 연명치료, 죽음을 앞둔 순간의 자기 결정권,환자를 보살피는 가족들의 이야기, 작가 자신의 투병(공황발작) 이야기, 지인들의 사연들까지 다양한 아픈 이야기와 그 아픔을 보듬는 이야기가 깃털 포개듯 포개어져 한 둥지를 만들고 있다. 왜 이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했을까? 자기 이야기만 써 놓아도 8년의 투병과 그 이후의 애도 기간이니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건 작가가 밝힌 대로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웰리빙과 웰다잉을 규정짓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을 테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미 너무나도 많은 다양한 아픔과 상실과 고통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카지노 게임들이 이 책의 폭을 넓혀주고, 더 많은 화두를 던져주는 동시에 우리 사는 지극한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어쩌면 매일 무엇인가와 이별하고 있다. 질병을 앓고 있거나 또는 앓을 예정이다. 이는 이상한 일도, 흔치 않은 일도, 나와 상관없는 일도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은 아직 나와부모님이 건강하시고 가족 중 누구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직접' 닿아 있는 카지노 게임다. 그 이별이 암이 아닐지는 몰라도언젠가는 나에게 직접 일어날 일이라는 진실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어떤 형태로든지 죽음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과 살을 맞대고 있으므로. 이생에서의 삶은 반드시 끝이 있으므로.
누군가와의 헤어짐에 적응이 되어간다는 것은 반복되는 이별의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다. 이별을 직시하면서 그 헤어짐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관계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나는 엄마와 여전히 이별 중이다.
p. 185
책의 어조는 내내 담담하다. 죽음과 이별과 그에 따른 수많은 고통의 모습을 이야기하면서도 당신의 울음주머니를 건드려서 눈물을 쏟아내게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일과 본 일과 생각한 것을, 햇살 좋은 카페에 앉아서 가끔 차 한 모금씩 마시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전해준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한 없이 무겁고 피하고 싶을 죽음에 대한 이 이야기가 무겁고 무섭게 들리기보다는 따뜻하게 다가와서 부드럽게 토닥이고 마지막에 가서는끝내 위로로 남는다. 책의 마지막에 애도를 슬픔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재해석해낸 부분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 마지막을 읽으면서 작가가 이 애도의 기간을 지나오면서 결국 이르게 된 지점이 슬픔이나 혹은 후련함이나 망각이 아니어서 고마웠다. 내내 슬프다는 결론이었어도 이해했을 것이다. 혹은 이제 슬픔은 모두 끝났고 끝났으니 후련하다는 심정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모든 슬픔은 잊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새 출발이었어도 박수를 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 모든 끝에 카지노 게임을 살포시 올려두었다. 나는 이 결론이 참 맘에 든다. 마음이 놓인다. 나도 여기 작가가 놓아둔 마음 위에 내 마음을 올려놓고 싶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이른 그 사람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슬플 애(哀), 슬플 도(悼)를 쓰는 애도 말고 마음대로 다른 의미를 붙여보기로 한다. 카지노 게임 애(愛), 이를 도(到), 결국엔 카지노 게임 이르는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 사람이 걸어간 길을 추억하면서 그 사람을 카지노 게임했던, 혹은 카지노 게임하지 못해서 미안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마지막엔 카지노 게임만 남겨지는 시간으로 말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카지노 게임에 이르는 그 시간을 걸어가고 있다.
p.199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