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75) <김병기와 상파울루 비엔날레
김병기(金秉騏, 1916~2022)는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커미셔너를 맡는다. 한 해 전 한국미술가협회 이사장에 당선되면서 당연직으로 맡은 것이다. 한국은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처음 참가했는데, 정부가 모든 일을 한국미술가협회에 일임해 이사장이 당연직으로 커미셔너가 됐다. 1963년 비엔날레에는 당시 이사장이던 김환기가 커미셔너였다.
“당시 한국미협 이사장은 당연직으로 비엔날레 커미셔너가 되었다.나도 이사장 자격으로 전임 김환기 이사장처럼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를 맡았다.나는 출품작가로 우선 나보다 한 세대 아래인 박서보,김창열,정창섭을 선정했다.그들은 현대미술운동에 앞장섰던 화가들이어서 국제현대미술전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주변에서 현대미술만 배려했다고 항의하기에 권옥연과 이세득을 추가했다.그리고 조각의 김종영과 전통회화의 이응노를 선정했다.”
이렇게 해서 이응노, 김종영, 이세득, 권옥연, 정창섭, 김창열, 박서보까지 7명이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경쟁 부문에 작품 21점을 낸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명예상을 받은 김환기는 1965년엔 비엔날레 측의 초청을 받아 비경쟁 부문에 참가해 특별실에서 전시할 기회를 얻는다. 바넷 뉴먼, 재스퍼 존스, 바실리 칸딘스키 등 세계적인 작가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당시 김환기의 출품작 14점은 모두 뉴욕에서 제작한 것으로, 김환기 개인전이라도 해도 좋은 규모였다. 익히 알려졌듯이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 경험은 김환기의 예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커미셔너 자격으로 브라질 상파울루로 간 김병기는 뜻밖에도 현지에서 비엔날레 심사위원으로 위촉된다. 한국인이 국제 미술전에서 심사위원이 된 첫 사례였다.
“70여 명의 커미셔너 가운데 심사위원15명을 뽑았다.그 명단에 내 이름이 끼었다는 것,즉 국제전 최초의 한국인 심사위원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심사위원으로 선임되니 나를 대하는 참가 작가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듯했다.그랑프리를 의식하기 때문이었다.개막 전야에 파티는 성대하게 치러졌다.특히 바넷 뉴먼,프랭크 스텔라 등이 참가한 미국의 파티는 화려했다.”
흥미로운 것은 김병기의 한 표가 비엔날레 그랑프리 선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김병기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커미셔너가 김병기에게 자기네 프랑스 화가 빅토르 바자렐리를 대상으로 밀어주면, 한국의 이응노를 명예상에 추천하겠다고 제안했단다. 하지만 바자렐리의 옵아트 작품이 김병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저히 바자렐리에게 표를 줄 수 없었던 김병기는 이탈리아 출신 작가 알베르토 부리에게 표를 던졌다.
대상이 발표됐다. 알베트로 부리 8표, 빅토르 바자렐리 7표. 김병기의 한 표가 향방을 갈랐다. 유럽의 어느 심사위원이 즉석에서 제안했다. 차이가 근소하니 공동 수상으로 하자고. 그렇게 그해 상파울루 비엔날레 대상은 2명이 공동 수상했다. 김병기는 “덕분에 내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고 술회했다. 한국의 이응노는 명예상을 받았다. 당시 이응노가 받은 메달은 프랑스 파리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
김병기는 똑똑하고 글 잘 쓰는 화가였다. 국제 미술계의 흐름에도 비교적 밝아, 여러 잡지에 글을 썼다. 오늘날 화가로서보다는 미술평론가와 행정가로 쌓은 업적이 더 부각되는 이유다. 김병기는 1963년에 이어 1965년 비엔날레 때도 전시 서문을 썼다. ‘「서울」에서 「상 파울로」는 아직도 멀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포르투갈어로 발행된 상파울루 비엔날레 공식 도록과 한국미술가협회가 별도가 제작한 한국관 브로셔에 영어와 한국어로 실렸다.
“오늘의 커다란 국제적 흐름 속에서 과연 한국의 조형예술이 첨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먼저 우리들은 동양적 특질의 순결한 유지자로서의 의식과 긍지를 갖는다.그러나 지난1950년의 동란 이래 우리들이 부딪쳐 온 것은 가장 예리한 톱니바퀴의 틈바구니의 현실이었던 것이며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코리아는 이미「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아니다.
고요한 전통과 열띤 현실과의 이 엄청난 간격은 우리들을 하나의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것은 오늘의 우리를 조형예술의 선택한 형태의 평균화와 이 평균화에 저항하는 정신의 독자성과의 갈등이었던 것이며 또 이러한 갈등의 의도는 명백히 평균화에 따르는 유형에서의 탈피가 아닐 수 없다.이응로,김종영,권옥연,이세득,정창섭,김창열,박서보. 30대에서50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의 일 단면을 통하여 일관되어 흐르고 있는 모색의 도정은 바로 이런 데 있다.동방으로부터의 소리 없는 소리 물질에 응결되는 정신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
당시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들은 대부분 행방이 묘연하다. 실물이 확인되는 건 경쟁 부문에 출품된 김창열의 <제사 Y-9, 김종영의 <작품 65-1, 그리고 비경쟁 부문에 출품된 김환기의 <Echo 연작 정도다. 이 가운데 김창열과 김환기의 작품 석 점이 가나아트가 연 김병기 3주기와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60주년 기념전 《김병기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선보인다. 더불어 당시 출품작과 같은 계열의 1960년대 작품들을 함께 보여준다.
전시장 벽에 빼곡하게 인쇄된 연보는 무려 106년을 산 김병기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을 생생하게 웅변한다. 김병기라는 한 인물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압축이다. 김병기는 100년 넘게 장수하면서 시대의 증언자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병기는 뛰어난 ‘연결자’였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김병기와 연결되지 않는 화가가 과연 있었을까.
■100세 맞아‘최고령 전시회’여는 노화가의 열정(KBS뉴스7 2016.3.2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3256038
운 좋게도 나는 생전에 화가의 그런 면모를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했다. 2016년 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김병기 개인전 <백세청풍을 취재하면서 화가를 직접 인터뷰했다. 질문 하나에 답변은 기본 2, 30분.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았겠는가. 화가의 말을 단 한 차례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