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상 2021년 11월호
작년까지만 해도 시월 중순까지 하와이안을 입었는데, 올해는 하루 차이로 하와이안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제는 하와이안을 입었는데 오늘은 입지 못하는 아이러니라니. 갑자기 날씨가 여름에서 겨울이 되었다.
이제 정말 계절은 여름과 겨울만 존재하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사라진 또 다른 가을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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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와 나는 스무 살에 처음 만났다. 우리는 같은 하숙집에 살았고, 가을이는 내 옆방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나이도 같았고, 같은 과였다. 입학 정원이 35명인 과에서 같은 하숙집에서 동기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계산해보지는 않았지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가을이와 나 말고도 같은 과 동기가 한 명 더 우리 하숙집에는 있었다. 그 친구는 1층에 살았고, 나와 가을이는 2층에 살았다.
가을이의 첫 인상은 ‘모범생’이었다. 바른 생활만 할 것 같은 모범생 같은 느낌의 가을이. 문득 가을이는 나의 첫 인상을 어떻게 보았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물어볼 수가 없다. 가을이와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같은 하숙집에 같은 과였기에 오래도록 가을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막상 가을이와 내가 함께 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가을이는 사라졌다. 마치 영화 <화차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춘 가을이에게 사람들은 생각보다 관심이 없었고, 과에서 아무도 가을이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가을이와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던 나도 가을이가 휴학을 한 건지 자퇴를 한 건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들이 모르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가을이에게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고 싸이월드에서도 탈퇴했는지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가을이에 대해 내가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전주에 있는 가을이의 부모님이 가을이를 데려갔다는 것이었다. 가을이는 계속 부산에 있고 싶어 했으니까, 제 발로 가지는 않았을 테다.
엄격했던 가을이의 부모님은 간섭이 심했다. 가을이의 연애도 싫어했는데,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연애를 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우리 하숙집에서는 가을이의 부모님이 가을이와 남자친구를 떼어놓기 위해 데려갔다고 다들 생각했는데 나도 그 의견이 맞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가을이와 하숙집 근처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는데, 가을이가 말했다.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전주에서 편입 공부를 해서 다른 대학으로 편입하기를 부모님이 원한다고도.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그게 설마 실제로 일어날 거란 생각을 못했다.
현실에서 가을이가 사라지자 그 모든 게 현실이었다는 사실에 슬픔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가을이의 부모님은 내 생각보다 더 엄격했고, 눈에 보이는 곳에 딸을 두면서 공부 외에 다른 곳에 한 눈을 팔지 않게 하려고 혈안인 사람들이었다.
한 순간에 딸이 성인이 된 후 맺은 인간관계를 다 끊어버릴 정도로 독한 사람들. 가을이도 나도 갑자기 친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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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전주에 가면 가을이를 만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연락도 되지 않는데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지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전주에 갈 때면 길에서 내 옆을 스쳐 걸어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가을이를 찾아 볼 수는 없었고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조차도 본적이 없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지금은 더더욱 마주칠 확률이 낮을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가 전주에 없을 지도 모르고,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다면 그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지겠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 살면서 아예 못 만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을이를 꼭 한 번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 가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안녕.” 이라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작별해야 했으니까.
*
가을아, 네가 떠난 걸 알고 텅 빈 네 하숙방의 문을 열어보고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너는 모르겠지.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면, 너와 함께 하숙집 근처의 치킨집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날들이 떠올라.
"류,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나를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던 네 표정과 목소리도 선명한데 시간은 그 모든 걸 옛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구나.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질 않아.
어쩌면 그 시간동안 우리는 서로가 모르는 사이에 한 번 정도는 스친 적이 있지는 않을까. 나는 전국을 다니는 사람이니까, 충분히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 우리가 스쳤는데도 내가 널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겠지만.
보고 싶다, 가을아.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꼭 만남도 헤어짐도 확실한 인사를 나누자. 오랫동안 나누지 못한 인사가 마음에 사무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