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기억나지않는다
11.
나와 로지는 그렇게 해서 중간 정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곳은 해운대였다. 해운대 아쿠아리움이 있는 바닷가 벤치에서 시간을 정해서 만나자 했다. 해운대로 갔을 때 내가 알고 있는 해운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해운대에 거의 십 년 동안 와보지 못했다. 그러나 도시의 풍경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관광지라 잘 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도 꽤 낯설었다. 제대로 설명은 못 하겠지만 뭔가 인위적인 느낌이 예전에 비해서 더 많이 났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몇 번째 벤치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앉아서 햇살을 받으며 로지를 기다렸다. 햇살은 좋아서 빛을 쬐고 있으니 졸음이 왔다. 꾸벅꾸벅 졸다 보니 옆에 한 카지노 쿠폰가 와서 앉았다. 고운 카지노 쿠폰였다. 카지노 쿠폰도 누굴 기다리는지 앉아서 시계를 보았다. 카지노 쿠폰가 오고 나서 로지와 생각 대화가 되지 않았다.
카지노 쿠폰: 이보오 젊은 양반. 나 로지의 할미 되는 사람이오.
나: 네? 누구요?
카지노 쿠폰: 젊은 양반과 생각 대화를 하는 로지라는 아이가 내 손녀라우.
나: 카지노 쿠폰께서 생각 대화를 아세요?
카지노 쿠폰: 호호호. 그건 내가 발명한 거라오.
나: 발명이요?
나는 놀랐다. 생각 대화는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발명이 만들어낸 부산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나였을까.
나: 손녀는 어째서?
카지노 쿠폰: 손녀를 빨리 만나고 싶지?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그나저나 햇살이 너무 강한데, 우리 어딘가 좀 들어가면 안 될까요? 나이가 들면 이래저래 불편한 것들이 늘어나는 법이지.
나: 그렇게 하시죠.
우리는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는 분명 해운대에 있는 카페인데 기묘한 분위기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창밖으로 보이는 해운대가 아니라 어린 시절 잠시 스쳐 간 어느 바닷가의 모습처럼 보였다.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기시감이 확 들었다. 아주 묘했다. 카페에서 보니 카지노 쿠폰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카지노 쿠폰는 카페에 앉으니 마음이 좀 놓이는 듯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얼굴에 주름은 많았지만, 주름처럼 보이지 않았다. 피부도 깨끗했다. 얼굴에 검버섯 같은 것도 없었다. 눈도 맑았다. 그러나 카지노 쿠폰였다. 할머닌데 카지노 쿠폰의 나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카지노 쿠폰는 커피를 주문했다. 주문한 커피를 조금씩 몇 번 끊어서 여러 번 마셨다. 그리고 아주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카지노 쿠폰: 난 커피를 즐긴다우. 커피는 가장 좋은 음료라고 생각해요. 좋은 커피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지.
나: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커피는 맛도 맛이지만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커피 마시는 것에만 집중하거든요. 카페에 커피 향이 가득하면 마음이 놓여요. 그러나 그런 카페가 점점 줄어들어 가는 것 같아서 슬프네요.
카지노 쿠폰: 호호호. 맞아요. 젊은 양반이 내가 할 말을 다 해주네.
나: 그런데 로지 님은? 손녀분은?
카지노 쿠폰: 손녀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꽤 되었지. 한 5년 정도 됐나?
나: 그럴 리가요?
카지노 쿠폰: 맞다오. 소녀는 식물인간이에요. 나는 의사로 뇌 생리학 박사예요.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일지 몰라요. 손녀는 바이러스가 뇌에 침투하는 바람에 쓰러진 후 식물인간이 되었어요.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게 되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손녀는 눈을 감고 있을 때 눈동자의 움직임도 있고 손끝도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어요. 뇌에 전기적 신호를 줘서 생각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연구를 꾸준하게 해 왔는데, 덕분에 손녀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 명이 더 생각 대화에 들어왔어요.
나: 그게 접니까?
카지노 쿠폰: 그렇다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손녀는 당신과 생각 대화를 하게 되었지.
나: 카지노 쿠폰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카지노 쿠폰: 호호호.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에요. 미안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
로지는 어째서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나에게 한마디라도 했다면 나는 더욱 로지를 응원하고 힘을 실어 줬을 텐데. 그러나 로지는 나에게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았다.
카지노 쿠폰: 이보오 젊은이? 손녀가 젊은이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오. 손녀의 신체 반응이 며칠 전부터 미미해지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전기적 신호를 보내는 동안 미미하지만 움직임이 잦아서 희망을 찾았는데 오히려 신체 반응이 점점 가늘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아마 생각 대화를 이전처럼 쉽게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다가 가위로 자르듯이 뚝 끊길 겁니다. 끝나기 전에 손녀를 한 번 만나보세요.
그렇게 카지노 쿠폰와 대화하고 헤어졌다. 로지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다. 카지노 쿠폰에게 물어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나는 언제나 후회한다. 항상 후회가 남는다. 그게 나의 인생이다. 후회가 늘 따라다니는 삶이다. 그녀는 현재 34살이라고 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로지의 시간은 멈췄다. 나는 다시 한번 로지에게 생각 대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내 손에는 카지노 쿠폰가 건네준 병원의 명함이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생각 대화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서 괴로웠는데 지금은 생각 대화가 먹통이라 고통이었다. 나는 로지를 만나러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제는 후회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이제 질질 끌고 어영부영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식물인간이지만 나를 보면 실망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로지를 만나야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