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같은 비를 맞고 있는 비닐우산 속 그 공간에 둘만 있었다
나는 삼남매의 둘째다. 첫째와 셋째의 중간에 위치한 나는 어릴적 어머니를 차지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잠을 잘 때 어머니의 오른쪽과 왼쪽은 언니와 동생의 차지였고 나는 어머니의 발밑에 자리 잡는다. 어머니의 몸을 만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데가 발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회상에 의하면 잠을 자다가 무의식중에 벌어지는 발버둥으로 인해 내가 여러 번 차였다고 하시는데, 내 기억에는 없으니 다행이다. 그러고보니 퇴근한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일요일이면 성당에 다녀오는 일이 큰 일과 중 하나였던 우리는, 지금은 절대 도보로 불가능한 거리를 걸어서 다녔는데, 어머니의 양 옆은 언니와 동생이 각각 차지하고, 나는 어머니 뒤에서 옷자락을 붙들고 종종 걸음으로 뒤따르곤 했다. 시장이든 어디든 외출할 때 삼남매의 포지션은 늘 같았다. 어머니의 양 손에 언니와 동생이 붙어 있고, 나는 등허리 부분에 있는 옷자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잡은 채 거의 매달려 가는 광경이니 참으로괴상한 모양새였을 것 같다.
직장 다니랴, 시부모님 모시랴, 일 년에 열두번 제사를 치르느라 정신을 쏙 빼놓고 사셨을 것 같은 어머니다. 그러나 나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심어 주셨다. 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지만, 그 때를 떠올리면 가슴 한편 몽실몽실 푸근해진다. 어머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는 그 여름 날 한 컷.
4학년 어느 여름, 비가 오다말다 하는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아니 나만 데리고 “송추 계곡에 도자기 굽는 데가 있다는데 가보자.”고 하셨다. 지인이 알려준 곳이라며 어머니의 표정에도 기대가 엿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초행인 장소를 찾는데, 갑자기 시야가 가려질 정도로 억센 비가 쏟아졌다. 계곡에 가면 흔히 있는 막걸리와 파전을 파는 식당에 들어가 감자전을 하나 주문했다. 언니와 동생 없이 어머니와 둘이만 먹는 감자전이라니. 조금은 낯설고 그래서 어색했지만 그 공간에 둘만 있는 듯 오롯이 누렸던 것 같다.
“여기 도자기 굽는 데가 있다던데 혹시 아세요?” 식당 주인은 모르겠다고 했다. 억수 같은 비 때문에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판단하셨는지 아쉽지만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이후에도 송추 계곡 어디에 있다는 그 가마에 가보지는 못했다. 자식들 가운데 어느 한 녀석만을 데리고 데이트할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으셨을 텐데. 그 여름 나와의 외출을 감행하신 건, 어머니의 손을 차지할 틈이 없던, 가운데 끼인 자식이 안쓰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 날이 의미 있는 한 장면으로 남는 까닭은 폭우 속에서 어머니의 손을 온전히 잡을 수 있었고, 어머니가 씌워주시는 비닐우산 속에서 어머니의 품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떠올려도 행복감이 밀려든다. 비를 맞고, 땀이 나서 찐득하고 끈적거렸을 게 분명한 어머니의 손이었을 텐데 마냥 뽀송뽀송한 기억뿐이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늙어 수분이 다 빠져버린 어머니의 손을 자꾸 만지작댄다. 버석버석한 손, 잡으면 바사삭 부서질 것 같은 늦가을 낙엽 같은 ‘어머니의 손을 몇 번쯤 더 만지고 비벼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니 그림책 <나의 엄마가 떠오른다.
강경수 작가의 <나의 엄마는 ‘맘마’와 ‘엄마’라는 낱말 외에 글이 없고 그림도 매우 함축적이어서 독자에 따라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는 그림책이다. 맘마를 먹으며 행복해 하는 아기, 노란 유치원복을 입고 엄마 품으로 뛰어드는 나, 일기장을 훔쳐보던 엄마를 보고 "엄! 마!"를 외치며 째릿하는 사춘기 소녀였던 나, 결혼식장에 서있는 좀더 성숙한 나와 아기를 낳은 내가 떠올리는 엄마 그리고 영정 앞에 국화 꽃이 흩날리는 장면..... 어느 하나 우리들 인생에서 빠지는 게 없다. 모두 어머니와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면들이다. 그동안 엄마를 소재로 한 책이나 영화 심지어 뮤지컬도 보았지만, 이 그림책만큼 강렬한 반응이 일었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보는 내내 어머니와 나 그리고 딸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을 어머니와 함께 보고 싶은데 읽어드릴 자신이 없다.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혼자 읊조려본다. “엄~마”
한줄요약 : 억수 같은 비를 가려주던 비닐우산 속에서 나의 시계는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