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묵상 02
오늘 복음은 유명한 성서의 한 장면이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을 때, 그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아니하리라”고 답한다. 그리고 며칠 뒤, 제자들이 다시 모인 자리에 예수가 나타나 토마스에게 손과 옆구리를 내어 보이며 말한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토마스가 비로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는 덧붙인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복음 20:29-
이 복음의 마지막 질문은 단순한 시각적 증거의 유무를 넘어, 인간 실존이 신이라는 초월적 지평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간극 속에서, 필연적인 온라인 카지노 게임과 위태로운 확신, 그리고 맹목적인 복종으로서의 맹신이라는 세 개의 지점 사이에서 신앙은 과연 어떤 층위를 차지해야 하는가라는 깊은 사유로 전이된다.
예수는 분명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에게 ‘행복’이라는 알 수 없는 축복을 약속했지만, 그 행복이 눈을 감은 채 무작정 따르는 상태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차라리 눈을 뜨고 절망하는 것이 더 정직한 삶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이며, 그 믿음은 어떻게 맹신의 어둠과 구별될 수 있는가?
파스칼의 <팡세; 신앙의 시작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심연에서
질문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사유가 바로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속에 응축되어 있다. 그는 신앙의 본질적 전제로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단호하게 선언한다. 인간이 “무한을 보고, 무(無)를 본다”는 그의 고백은, 유한한 이성이 무한의 지평 앞에서 마주하는 필연적인 좌절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처절한 충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우주의 광대함과 자신의 미미함을 동시에 깨닫고,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질문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파스칼에게 이러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과 좌절은 신앙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심연으로부터 비로소 신앙의 여정이 시작되는 불가피한 출발점이었다. 그는 “인간은 한 자루의 갈대에 불과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다. 이 ‘생각하는’ 능력, 즉 온라인 카지노 게임하고 질문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고유성이며, 신앙은 바로 그 생각하는 과정,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과정을 통과할 때 비로소 자신의 무게를 갖게 된다. 그에게 맹목적 확신이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회피한 채 도달하는 죽은 신앙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세계의 어둠과 내면의 심연, 그리고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지평 사이에서 인간이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 치열하게 저울질한 끝에야 비로소 희미하게 마주하게 되는 ‘빛’에 대한 예감, 혹은 그 빛을 향해 간신히 내딛는 발걸음 그 자체일 것이다. 파스칼은 행복이 도착점이 아니라 고뇌하는 과정 속에 있음을 역설한다.
키르케고르; 신앙이란 믿음의 비약
쇠렌 키르케고르는 파스칼이 말한 ‘한 걸음’을 더욱 철저한 실존적 비약으로 밀고 나간다. 그의 <두려움과 떨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의 사건을 통해 ‘믿음의 기사(Knight of Faith)’라는 존재를 조명한다. 아브라함은 신으로부터 자신의 아들,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는 모든 인간적인 윤리, 아버지로서의 사랑, 그리고 상식적인 이해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인간 이성과 보편 윤리의 영역을 넘어서는 절대자의 부름 앞에서 깊은 '두려움과 떨림'에 휩싸인다.
키르케고르에게 ‘믿음의 비약(leap of faith)’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논리적 추론이나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한 도약이 아니라, 이성과 윤리가 제기하는 모든 모순과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끌어안은 채, 오직 신에 대한 절대적 신뢰만을 근거로 나아가는 순전한 결단이다. '믿음의 기사'는 이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신의 명령에 순종하려 함과 동시에, 아들 이삭을 통해 자신의 삶이 지속될 것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까지도 믿는 자다.
그는 윤리의 보편성을 넘어선 단독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명령 앞에서 고독하게 선다. 파스칼이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보며 이성을 넘어선 한 걸음을 강조했다면, 키르케고르는 그 ‘한 걸음’이야말로 이성적 이해나 윤리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오직 신앙만이 가능한 실존적 비약이며 신앙의 가장 진정한 현현(顯現)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이해할 수 없음을 무릅쓰고 온 존재로 응답하는 행위다.
그러나 파스칼의 '내면의 저울질 끝에 찾아오는 빛'이나 키르케고르의 '윤리를 초월한 비약'만으로는 아직 '맹신(盲信)'과의 경계를 충분히 섬세하게 그려내기 어렵다. 맹신이란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품는 고통스러운 과정 자체를 생략하고, 질문을 죽이며, 진실을 향한 내면의 갈망을 외면한 채 어떤 권위나 관습, 혹은 집단의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상태다. 이는 파스칼이 그토록 경계했던 '맹목적 확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신앙은 분명 '보지 않아도 믿는 눈'을 요구하지만, 그 믿음은 자신을 향한 모든 물음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리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 안의 가장 깊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과 바깥 세계의 엄혹한 현실이 제기하는 모든 물음들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그 질문들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한 뒤에야 비로소 선택되는, 스스로에게 응답하는 용기이다. 맹신이 진실을 억압한다면, 깨어 있는 신앙은 진실을 향한 질문을 끝까지 붙든다.
도스토옙스키; 신앙이란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 기반한 신뢰
물고 무는 질문의긴장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 중 한 명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 속에서 삶의 현장과 맞닿아 극적으로 펼쳐진다. 그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 특히 무고하게 고통받는 아이들의 비극 앞에서 신의 정의와 선함에 대해 근본적인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품고 분노를 쏟아낸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 고통에 대해 합당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신의 세계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반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단순히 지적인 회의를 넘어, 세계의 고통 앞에서 터져 나오는 양심의 절규이자 정의로운 분노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정직한 불신자'의 전형이다. 반면, 그의 동생인 알료샤는 형이 마주한 어둠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 사이의 연약함과 상처를 끌어안고 '사랑'만이 진리의 잔불을 다시 지필 수 있다고 믿는다. 알료샤의 믿음은 관념적인 확신이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과 자신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에서 비롯된 신뢰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반처럼 질문만 남은 채 절망의 심연에 머무는 자와, 알료샤처럼 그 어둠과 질문 속에서도 인간적인 사랑과 관계를 통해 그 너머의 지평을 향해 걸어가는 자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신앙이야말로 '절망된 온라인 카지노 게임'과 '사랑에 기반한 신뢰'라는 양극단을 동시에 껴안고 나아가는 위태롭고도 역동적인 여정임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것은 '믿음의 기사'가 현실의 모순 앞에서 고독하게 비약하는 모습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 앞에서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다.
파스칼이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딛고 무한을 향해 내딛는 내면의 한 걸음'을, 키르케고르가 '이성과 윤리의 모순을 비약으로 전환하는 순전한 실존적 결단'을 강조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그 결단이 인간 실존의 고통과 윤리적 책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어떤 무게를 갖게 되는지를 문학적으로 증언한다.
확신에게 죄를 묻는 맹신자들
보지 않고도 믿음을 선택하는 이, 즉 '깨어 있는 믿음'을 가진 이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불완전과 한계, 그리고 인간 관계 속의 상처와 갈등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어둠과 혼돈 속에서 의미와 관계를 발견하고,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 분투한다. 이는 눈을 감고 현실을 부정하는 '맹신'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깨어 있는 믿음은 현실의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내미는 행위이며,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진실의 잔불을 발견하려는 의지이다.
결국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의 행복은 외부의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맹목적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그 질문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며 무한을 향해 내면의 문을 여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키르케고르의 '믿음의 기사'처럼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앞에서라도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신뢰를 향해 비약하는 용기,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알료샤처럼 세상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인간적인 사랑과 관계를 통해 희망의 잔불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모두 그 행복의 여정에 속한다.
이들이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앙이야말로 '완전한 확답'이라는 최종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이전에도, 여전히 '질문의 자리'에 기꺼이 남아 사랑과 진실을 향해 고통스럽지만 용기 있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확신은 죄가 없다. 화제가 된 영화 <콘클라베의 한 장면을 끌어와 확신을 단두대 위에 세우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최근의 정세와 사회의 혼란을 빗대어 '확신'을 공개처형한다. 그러나 정세 혼란의 주범들 때문에 확신이라는 말이 오염되었을 뿐이다. 확신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과 그 물음 끝어 길어 올린 심연의 대답이다. 우리는 이 확신을 맹신과 혼동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의 화두는 여전히 오늘 우리 각자의 실존을 향해 유효하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라는 도전은 2천 년 전 토마스에게 던져진 물음을 넘어,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과 마주하고, 맹신이라는 유혹과 싸우며, 어떤 종류의 '확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든다.
보지 않아도 믿는 이들의 행복은 완전한 이해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라는 견고한 성 안에 머무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알 수 없는 불확실의 바다 한가운데서도 사랑이라는 구명줄을 놓지 않고, 진실을 향한 질문의 돛을 내리지 않으며, 고통 속에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그 '믿음의 여정' 자체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알 수 없는 축복이자,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의 이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