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말라가
식칼이 얼마나 무딘지 감자가 썰리는 게 아니라 찢어지는 수준입니다.
에어비앤비 숙소 대부분의 칼은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간혹 호스트가 청소도 하고 직접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관리자를 따로 고용합니다.
그러므로 호스트들은 살림살이의 세세한 사정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집은 기가 막히게 럭셔리하고 훌륭하여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을 정도인 고급 주택도 주방을 들여다보면 사소한 아쉬운 점이 발견되곤 합니다.
가령 수세미가 다 낡아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거나 주방 세제가 바닥을 드러낸다거나 프라이팬의 코팅이 벗겨져서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지만 주인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죽하면 여행 준비물에 수세미와 행주, 고무장갑을 챙겨 갖고 다닐까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을 있어야 하니 견뎌서 될 일이 아닙니다.
호스트인 알렉스에게 사정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는 전혀 몰랐다면서 정말 미안하다는 말과 퇴근길에 새로운 칼을 준비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날 오후, 문고리에 쇼핑백이 걸려 있었지요.
온갖 종류의 칼 한 세트가 들어있었습니다.
알렉스의 발 빠른 대처가 고마웠습니다.
아침 일찍 말라가 카지노 게임 미술관(Museo Picasso Málaga)으로 갑니다.
말라가는 처음이라 어떤 느낌일지궁금함 가득합니다.
스페인다운 벽화들이 그려져 있고 돈키호테로 짐작되는 철재 조각도 보입니다.
상점에 진열된 마그네틱도 여긴 스페인이야 하는 듯 알록달록 화려한 컬러들이 줄줄이 걸려 있지요.
10분 남짓 걸었을까?
드디어 미술관에 도착했습니다.
역시나 아직 오픈 전인데 사람들이 모여 있더군요.
카지노 게임라는 이름의 미술관은 바르셀로나, 말라가, 그리고 프랑스의 파리, 앙티브 등 여러 도시에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의 어느 미술관에 가더라도 적어도 한두 점은 흔히 볼 수 있는 화가가 카지노 게임입니다.
화가가 오래 살기도 했지만 그만큼 다작을 했기 때문이지요.
말라가의 카지노 게임 미술관은 그의 가족이 기증한 약 2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전에도 말했듯이 화가의 이름을 달고 있는 미술관들은 대표작품보다는 창작 과정을 보여주는 소품들이 많다고 했듯 그곳 역시 유명한 작품은 크게 없었습니다.
단 파리의 국립 카지노 게임 미술관은 예외입니다.
말라가의 카지노 게임 미술관은 원래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부에나비스타 궁전(Palacio de Buenavista)으로말라가 지역 귀족의 저택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랍 건축 스타일과 안달루시아풍의 중정(파티오), 유서 깊은 벽과 천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지요.
카지노 게임는 예술가들 중 드물게 살아생전부터 성공한 작가로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입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그림, 도자기, 판화, 조각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작품이 잘 팔렸고, 세금도 그림으로 납부할 정도였죠.
프랑스 정부가 그의 유산의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 국립 파리 카지노 게임 미술관으로 만들었으니까요.
돈과 사랑과 명예, 그는 이른바 다 가진 남자였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독특한 화풍을 갖고 있습니다.
작품의 의미는 몰라도 그냥 보기만 해도 카지노 게임라는 게 드러나니까요.
하나의 얼굴 안에 두 개의 각도, 하나의 몸 안에 여러 개의 감정, 한 마디로 카지노 게임의 그림은 보는 방식 자체를 뒤집습니다.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시선을 담은 해체와 재구성의 예술이지요.
카지노 게임의 그림은 감정이 충돌하다 산산이 부서진 거울 조각 같습니다.
그는 한 사람을 한 시점에서 보지 않았지요.
사랑도, 사람도, 순간도 그에겐 해체와 재조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각은, 언제나 카지노 게임의 여인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카지노 게임'라는 이름 뒤에는 늘 '여성 편력이 심했던 남자'라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그에게 여성은단순한 영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녀들을 사랑했고, 소유했고, 찢었고, 다시 또 그렸지요.
카지노 게임에게는 무슨 운명의 여인들이 그리도 많았을까요?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고 하지만 그의 카테고리에 있었던 여인들은 속된 말로 영계들이었습니다.
여성들은 나쁜 남자, 즉 바람둥이인 줄 알면서도 묘하게 끌림을 느낀다고 하지만 카지노 게임는 선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1. 23세의 페르낭드 올리비에(1881-1966, 프랑스) - 그가 23살에 파리의 빈민굴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그의 첫 번째 연인
2. 26세의 에바 구엘(1885-1915, 프랑스) - 조각가 마르쿠시스의 프랑스 연인이자 파블로 카지노 게임의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의 친구. 카지노 게임의 초창기 연인으로, 그가 "Ma Jolie(나의 예쁜이)"라고 불렀으며 30세에 병으로 요절.
3. 26세의 올가 코클로바(1891-1955, 우크라이나) - 에바 구엘이 사망한 후, 카지노 게임가 발레 무대를 그리기 위해 로마로 갔을 때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와 사랑에 빠졌고 1918년 결혼하여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되었음. 명문 집안의 딸인 아내 올가의 사교력으로 러시아 상류층과 교류한 카지노 게임는 그들이 좋아할 법한 그림도 대량으로 그려내면서 막대한 돈까지 벌기에 이르렀고 이른 나이에 돈 걱정 없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는데 매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함.
올가의 이혼 요구에 막대한 위자료를 주지 않기 위해 이혼에 응하지 않고 혼외 자식까지 두었음.
올가는 알코올 중독에 암으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카지노 게임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음.
4. 17세의 마리 테레즈 월터(1909-1977 , 프랑스)- 올가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카지노 게임와 가장 오랜 시간 사랑을 나눈 여인 중 하나로 혼외 자식을 두었음. 카지노 게임가 죽은 지 4년 후에 스스로 목을 매 자살.
5. 29세의 도라 마르(1907-1997, 프랑스)초현실주의 사진작가이자 화가. 카지노 게임와의 관계 중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고, 결국 신경쇠약과 정신질환으로 고생.
6. 21세의 프랑수아즈 질로(1921-2023 , 프랑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자국의 대학교인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 법학 등을 공부했고 유일하게 카지노 게임를 차버린 여성, 101세로 사망.
7. 27세의 자클린 로크(1927-1986ㅡ 프랑스) 카지노 게임의 마지막 연인, 처음에는 그의 구애를 거부했지만 카지노 게임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그를 신처럼 숭배했음. 1961년, 79세의 카지노 게임는 그녀와 결혼했지만, 여전히 다른 여인들과 불륜을 저지름. 카지노 게임와 20년을 함께 살았고 그가 죽은 지 13년 후 카지노 게임와 같이 살던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함. 카지노 게임와 함께 묻힘.
92세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카지노 게임와 사랑을 나눈 여성들을 간단히 살펴본 것이 이 정도입니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경우이며 비공식적인 연인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나는데요.
아마도 카지노 게임는 중증의 여성 중독이라는 병에 걸린 환자가 아닐까 합니다.
전시실을 나오니 한쪽에 카지노 게임와 한 여인이 그의 작업실에서 춤추는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반바지만 입은 카지노 게임와 여인은 맨발이었고 두 사람의 행복하고 친밀한 삶을 보여주는 장면인데요.
그녀는 카지노 게임의 그림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일상을 함께한 여인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였습니다.
그를 가장 오래 곁에서 지킨 여인이며 말년의 카지노 게임가 가장 많이 그린 인물입니다.
1953년 카지노 게임는 도자기 작업장에서 자클린 로크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의 마지막 연인이자 마지막 뮤즈였으며, 그의 재능을 가장 충성스럽고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로맨틱한 관계가 시작되자 자클린은 작업장의 조수에서 카지노 게임의 모델이 되었고 그는 다른 모든 그림보다 그녀에게 더 많은 그림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20년 동안 함께 살았고, 그중 17년 동안 그녀는 그가 그린 유일한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기법과 스타일로 그려진 그녀의 모든 초상화에서 항상 아몬드 모양의 눈의 고요하고 먼 표정이 돋보입니다.
이마선을 따라 곧은 코는 여성을 스핑크스처럼 보이게 하는데, 예를 들어 그림 '꽃을 든 자클린'(1954)에서 처럼 말입니다.
카지노 게임는 그녀가 자신을 종교로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종교의 사원은 보브나르그 성(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시 바로 외곽, 생트빅투아르 산 북쪽에 위치한 보브나르그 마을에 있는 요새)으로 카지노 게임가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이주하기로 결정한 곳이지요.
자클린은 자신의 우상인 카지노 게임를지키기 위해 보브나르그 성으로의 모든 방문을 통제했습니다.
1961년, 79세의 파블로 카지노 게임와 34세의 자클린 로크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언론의 관심을 피하고 싶어 했기에 가장 가까운 친척들만 초대되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오히려 늙은 사람은 나였죠.'
이 말은 카지노 게임의 마지막 뮤즈, 자클린 로크가 카지노 게임와 결혼할 때 한 말입니다.
신혼부부는 프랑스 칸의 새 빌라로 이사했고, 카지노 게임는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말년에 거의 은둔자가 되었고, 친구들은 이를 자클린의 소유욕 탓으로 돌렸습니다.
자클린은 카지노 게임의 창작 공간을 지키기 위해 카지노 게임의 자녀와 손주들을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1973년 자클린이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9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클린은 그의 전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카지노 게임의 사생아들과 그의 유산을 놓고 다투었고, 장례식 때 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대문을 걸어 잠가버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지노 게임가 사망한 후 그녀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어두운 방에 앉아 흐느껴 울거나, 마치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사진에 말을 걸곤 했지요.
그리고 자클린은 카지노 게임가 죽은 지 13년 후, 권총으로 자살하여 카지노 게임 옆에 묻혔습니다.
파블로 카지노 게임가 생전에 남긴 회화 작품 수는 약 1만 3천 점으로 추정됩니다.
드로잉(10만 점 이상)과 조각, 판화, 도자기 등을 포함하면 전체 작품 수는 5만 점 이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문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전체 회화 중 약 60~70%가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한 작품이라고 해요.
그만큼 카지노 게임에게 여성은 예술의 중심이자 영감의 원천이었고, 동시에 그의 삶을 뒤흔든 불안정한 거울이기도 했던 것이죠.
아마도 그 많은 뮤즈들이 없었다면 오늘 날의 카지노 게임 그림은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그녀들에게 공이 큽니다.
카지노 게임가 그린 여성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도 <거울 앞의 소녀, Girl Before a Mirror(1932)일 것입니다.
그의 연인 마리 테레즈 발테르를 묘사한 이 그림은 강렬한 색채, 입체파 양식, 그리고 자기 성찰과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유명합니다.
<우는 여자, The Weeping Woman(1937)와 <꿈, Le Rêve(1932), 이 두 작품 역시 그의 뮤즈들을 묘사하고 감정적인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으로 손꼽히지요.
카지노 게임의 작업실을 찍은 대형 사진이 마치 무대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그곳의 사진을 찍다 보니 바닥에 노란 버튼이 보였지요.
그 노란 버튼을 발로 밟아보니 앞쪽의 커다란 스크린에 내 모습이 사진으로 찍히더군요.
이것은 포토콜(photocall)이라고 하는 흥미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명씩 돌아가며, 또는 셋이 나란히 서서 노란 버튼을 누르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좋은 사진이 나올 때까지 말입니다.
다행히 사람들이 없어 우리는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아마도 그 기능을 몰라 스쳐 지나갔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재미있는 시간이었지요.
그의 붓끝에서 여성은 한없이 부드럽고도 잔혹하게 변형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황홀한 여신으로, 어떤 이는 고통 속의 유령으로 말입니다.
그녀들의 얼굴은 곧 카지노 게임의 초상입니다.
그가 어떤 시기로 들어설 때, 어떤 사랑에 빠졌을 때, 그가 그린 여인을 보면 짐작할 수 있지요.
눈에 띄게 둥글어진 곡선, 무너진 구도, 폭발하는 색채. 그건 모두 누군가가 그에게 들어와 흔들고 나간 흔적이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그렸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찾았습니다.
올가의 단정한 선은 안정기를 살던 그의 심장을 닮았고, 마리 테레즈의 부드러운 곡선은, 그가 순수에 취해 있던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도라 마르의 일그러진 눈은, 분열된 그의 내면을 숨기지 못하지요.
그는 여인을 그릴 때마다, 사실은 자기 자신을 해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카지노 게임의 사랑은 종종 폭력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의 그림 안에서 여성은 이상화되거나, 찢기거나, 혹은 둘 다였지요.
그에게 뮤즈란, 사랑의 대상이기 이전에 창조의 연료였습니다.
뜨겁게 타오르고 나면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타다 남은 재처럼 캔버스 어딘가에 붙어 있습니다.
예술은 그에게 진실이었고 사랑은 소모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잔인하지만 그게 카지노 게임라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도라 마르는 사진가였고 시인이었으며 예민한 영혼을 가진 예술가였습니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의 그림 안에서 도라 마르는 늘 울고 있습니다.
'우는 여인'은 그녀의 자화상이 아니라 카지노 게임의 방식으로 만든 비명입니다.
얼굴은 조각났고 눈물은 파도처럼 흐릅니다.
사랑이 그녀를 울린 게 아니라, 그의 시선이 그녀를 해체한 것이지요.
여인의 이름으로 남은 그림들, 그의 삶은 시대를 찢는 전위였고 그의 그림은 사랑의 잔해로 남았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여자 없이는 살 수도그릴 수도 없었습니다.
사랑하고, 찢고, 그리하여 남은 것은 그림뿐입니다.
그 속에서 여인은 파괴되었고, 예술은 완성되었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유언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막대한 재산과 예술 작품들은 엄청난 상속 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인정받은 유족들이 그의 유산을 나누어 갖게 되었지요.
카지노 게임의 유산은 약 4만여 점의 작품 (회화, 드로잉, 도자기, 조각 등), 부동산 (프랑스의 고성, 스튜디오 등), 엄청난 액수의 현금과 저작권 등 천문학적인 규모였어요.
발표하는 언론에 따라 다르지만 그의 재산은 수 조원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의 유족들은 그의 작품 일부를 기증하여 막대한 상속세를 대신하는 방법을 활용했습니다.
그렇게 카지노 게임의 대표작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고, 그 결과 파리 국립 카지노 게임 미술관(Musée Picasso)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는 어부지리로 카지노 게임의 막대한 작품들을 갖게 된 행운을 얻게 되었지요.
카지노 게임는 천재였고, 누구보다 뜨겁게 살았으며, 세상의 빛을 쥐고 흔들 듯 찬란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부신 삶도 아무리 격정적인 사랑도 끝을 피해가진 못하지요.
그의 죽음 앞에서 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남긴 작품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그의 삶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끝이 있다는 사실이 그 삶을 더욱 반짝이게 만들었을 테니까요.
우리는 각자의 색, 각자의 선으로 삶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를 채워나갑니다.
언젠가 붓을 내려놓을 그 순간까지 말입니다.
카지노 게임 미술관에서 나오니 골목길에 솔로몬 벤 가비롤 (Solomón ibn Gabirol)의 동상이 호젓이 서 있습니다.
동상이지만 시인의 모습이 느껴졌지요.
그는 11세기 말라가 출신 유대계 철학자이자 시인, 유대 사상과 중세 철학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합니다.
말라가의 카지노 게임 미술관 주변은 카지노 게임의 발자취와 더불어 말라가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적과 장소들로 가득합니다.
고대 로마 유적지부터 무어 양식 요새와 르네상스 건물까지 말라가의 풍부한 역사를 보여주더군요.
무어 양식의 요새인 알카사바, 고대 로마 유적인 말라가 원형극장,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히브랄파로 성 등 상징적인 랜드마크들이 모여 있어 그냥 한 바퀴 돌아보기 좋습니다.
미술관에서 나와서인지 야자수가 흔들리는 모습도 바람의 붓질 같아 보입니다.
카지노 게임 미술관을 나와 대성당 옆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름 아닌 말라가의 호스트 알렉스였어요.
11월이 무색하리만큼 핑크색 봄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무 앞이었죠.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새 칼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고 그 역시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습니다.
혹시 나무 이름을 아는지 물어봤지만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모른다고 합니다.
이름을 알아보고 메시지를 보내주겠다고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에게서 메시지를 받았지요.
나무 이름은 세이바, 또는스페시오사(Ceiba speciosa) 나무로 500년 이상 살 수 있으며, 높이가 73m 이상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린 세이바 나무는 매년 최대 1m쯤 자라며 8~10년 후에 꽃을 피우는데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바오바브나무(Bombax ceiba)와 같은 과에 속한다고 해요.
귀 뒤에 꽃 하나씩 꽂고 낭랑 18세처럼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10m는 족히 넘을만한 커다란 나무 둥치에서 피워낸 핑크색 가녀린 꽃잎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동남아도 아닌 스페인의 11월에 만난 꽃잔치는 마음을 노골거리게 만들어 주었지요.
말라가 대성당 (Catedral de Málaga)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건설된 르네상스 양식의 대성당으로, 원래는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오른쪽 종탑이 미완성인 점에서 ‘La Manquita (외팔이 여성)’라는 별명이 있다고 해요.
웅장한 기둥들과 바로크 양식의 제단, 독특한 목조 합창석이 인상적입니다.
대성당 옆으로 말라가 역사 지구(Centro Histórico)의 매력적인 거리에는 역사적인 기념물과 활기찬 분위기로 가득한 보행자 전용 구역이 있습니다.
그중 헌법 광장 (Plaza de la Constitución)은 말라가의 중심 광장으로, 과거에는 시장과 공개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해요.
현지인들과 관광객 모두가 모여드는 광장인지 카페와 상점도 많고 활기찬 분위기입니다.
이즈음에서 커피 한잔은 필수지요.
테이블 아래 바닥에 신문 모양의 동판이 몇 개 붙어 있었지요.
알고 보니 그것은 말라가 지방 헌법 관련 신문 기사였습니다.
길바닥에 붙여놓은 신문이라니 그 또한 처음 보는 조형물입니다.
말라가 시청 근처에 아베키 로만티카 (Ave qui Romántica)라는조각 작품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새'라는 뜻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작품은 말라가 출신 조각가 '호세 세기리'가 만든 도시 청동 조각품으로 시인들과의 관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해요.
반은 비둘기이고 반은 펼친 손 모양으로 말라가의 소설가, 시인, 만화가인 라파엘 페레스 에스트라다의 그림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보아도 도무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짐작되지 않는 청동 조각 작품이 있습니다.
영국 예술가 토니 크래그가 만든 '두 얼굴 (Las Dos Caras)', 또는 '관점(Points of View)'이라는 제목입니다.
이것은 한 인물의 이중성, 또는 서로 다른 정체성의 공존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어느 방향에서 보면 두 사람의 옆모습이 보이기도 하더군요.
말라가의 역사지구는 시간의 끝자락에 조용히 손을 얹는 일 같았습니다.
말라가의 마지막 걸음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앞으로 걷습니다.
조금 더 느긋하게, 조금 더 나답게 말이지요.
여행은 늘 끝이 있지만, 그 끝은 곧 내 안에 새로운 문장을 여는 문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