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카지노 게임 17
영화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까지 석권하며 세계적인 거장 자리에 오른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입니다. 에드워드 애쉬턴의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주인공을 10번 더 죽여 '미키 17'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는데, 여기서 이미 봉준호 감독의 의중이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낸 요지경을 한껏 흉보면서도 그 안에 약자로 버티고 선 사람들을 연민하며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지켜봐 온 봉준호 감독의 시선은, 소설 원작이 있고 할리우드 거대 자본의 수혜를 입었다고 해서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17번째 버전까지 이르러서도 그 성정이 바뀌지 않았던 미키처럼, <미키 17은 한국인 배우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봉준호 감독 최초의 본격 할리우드 자본 영화이지만서도 감독의 손길과 숨결이 영락없이 담겨 있는 영화입니다.
카지노 게임(로버트 패틴슨)는 친구 티모(스티븐 연)의 말만 믿고 (<기생충 속 대만 카스테라 가게가 생각나는) 마카롱 가게를 차렸다가 쫄딱 망했습니다. 그 결과 거액의 빚을 진 카지노 게임와 티모는 못 갚을 시 지구 끝까지 쫓아가 토막내어 죽일 거라는 사채업자의 위협에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다 지구를 벗어나기로 결심합니다. 선거에서 진 (국내외의 누가 계속 생각나는) '전 국회의원' 마셜(마크 러팔로)과 그의 아내 일파(토니 콜렛)가 또 다른 자기네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인지 시작한 '니플하임 행성 개척 프로젝트'에 자원해 우주로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티모는 잽싸게 비행사 포지션에 지원했지만, 어떤 기술도 없는 카지노 게임는 죽음을 불사하는 임무에 뛰어드는 일종의 '죽음 노동자'인 익스펜더블에 지원합니다. 익스펜더블이 되면 행성 개척의 과정에서 감수해야 하는 온갖 위험에 뛰어들면서, 죽으면 다음날 바로 몸이 다시 프린팅되어 업데이트 저장된 기억과 함께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익스펜더블이 된 카지노 게임는 죽음의 공포와 부활(?)의 불쾌함을 수 차례 감수하며 '현타'를 겪고, 동시에 죽음을 수없이 겪는 유일무이한 구성원으로서 바라지도 않은 동료들의 호기심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늘 그의 곁을 지켜주는 연인 나샤(나오미 애키)가 있었기에 4년간의 항해동안 이어진 반복된 죽음도 그나마 감당할 수 있었죠. 그렇게 수 차례의 죽음을 거쳐 '카지노 게임 17'이 된 카지노 게임는 니플하임 행성의 외계 생명체인 일명 '크리퍼'와 맞닥뜨린 후 죽을 줄로만 알았던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돌아오는데, 기지로 돌아와보니 그가 이미 죽은 걸로 처리되었는지 아니나다를까 '카지노 게임 18'이 이미 프린팅되어 그의 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규정상 익스펜터블이 2명 이상 존재하는 '멀티플' 상황이 발각될 시, 익스펜더블은 매번 업데이트 저장되던 기억과 함께 그 모든 신체가 영구 폐기됩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건데, 과연 둘 중 누가 살아남아야 할까요. 아니, 둘 중 누가 더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있는 걸까요.
<설국열차, <옥자 등 할리우드 배우가 등장하거나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적은 있지만, 그 영화들 모두 한국 배우들이 대등한 비중으로 등장했던 데 반해 <미키 17는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짐은 물론 배우들도 전부 할리우드 배우들로 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사랑하는 봉준호 감독의 색깔이 여전히 잘 녹아 들어가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미키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는 첫 장면에서부터 '봉준호는 여전히 봉준호다'라는 생각에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완전히 갈아끼운 목소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미키의 캐릭터는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서는 생소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무척 익숙한 초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변변한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뻔뻔하지도 못해서 얼레벌레 머쓱해 하며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본능적인 생존력을 발휘하고 부끄러움과 선함을 모르지 않기에 때로는 눈부신 순간을 때로는 비극적인 순간을 맞이하는 인물. 미키가 딱 그런 인물이고, 그가 맡은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책 역시 적재적소에서 죽어주는 것 외에 특별히 요구되는 능력이 없어서 어느날 갑자기 히어로로 발돋움하거나 하지도 않지만 그렇기에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만의 이야기로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주인공 뿐 아니라 그를 위협하는 우스꽝스럽지만 확실히 무섭기는 한 적, 그 사이를 메우는 날선 유머와 안쓰러움 섞인 시선까지. <미키 17은 국적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봉준호 영화'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들 중 사랑이라는 감정의 농도가 가장 짙다는 점일 것입니다.
원작 소설도 기본적으로 코미디 기반이었고 <미키 17 역시 코미디 기조를 계속 유지해 나가지만, 영화는 '미키 7'에서 '미키 17'까지 나아간 설정에 걸맞게 '죽음 노동자'인 미키의 처지를 통해 노동 착취와 계급화의 세태를 더욱 내밀화합니다. 미키는 니플하임 행성 개척단의 구성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죽음 후 재생이 가능한 익스펜더블인데, 그런 그의 특수성은 '어차피 죽을 거'라는 핑계 아래 오히려 그의 희소한 가치가 훼손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 누구의 목숨보다도 중요하지 않은, 살아야 하고 살려야 할 대상에 있어서 가장 후순위에 서는 인물인 것입니다. "죽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끊임없이 묻는 동료들의 순진하고도 폭력적인 호기심부터 '나서서 죽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까지 위협하는 권력자들까지. 익스펜더블이란 표현에 담긴 '소모품'이란 뜻 그대로, 미키는 그럴싸한 번영과 영광을 위해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며 희생을 당연스레 강요당하는 수많은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대변합니다. 영화가 아무리 코미디 기조를 띤다고 해도, 아무리 죽음이 반복된다고 한들 늘 새롭고 그만큼 늘 두려운 상황에서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하는 미키의 현실 앞에서 마음 놓고 웃긴 쉽지 않습니다. 보통의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톤 앤 매너를 보여주는 다리우스 콘지의 촬영과 정재일의 음악은, 내내 감도는 비인간성의 한기 속에서 새어나오는 헛웃음을 상기시키며 냉소적이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지금까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사랑의 감정이 있기에 영화는 끝내 얼어붙지 않습니다. 얼어죽거나 잡아먹혀 죽을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17번째 미키의 생명력처럼, <미키 17에는 여전히 부조리한 세상을 흉보는 봉준호 감독의 시선 속에서도 인간이기에 마땅히 피어나는 연민의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작용합니다.
'멀티플'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해결해야 하는 처음의 상황에서 사건을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그렇게 커져만 가는 상황에 비해 미키의 성정은 우리가 처음 듣게 되는 그의 옹졸한 목소리에서 알 수 있듯 그 그릇이 그저 한줌 같아 보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웅 서사에 몰두할 이는 아닌 것을 잘 알기에 이런 미키의 특성이 일대 변화를 맞이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키는 적어도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각성하고 성장하고야 마는 소시민입니다. 그 존재 자체로 이미 존경해 마땅한 여성인데다 언제나 그의 곁에서 그가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연인의 존재로 인해, 자신과 너무나 다르면서도 어쩌면 자신이 품었을 생각을 표출하는 건지도 모르는 결국은 자신과 같은 존재인 '미키 18'로 인해, 미키는 '소모품'의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그저 소모되는 인간으로 남기를 거부하는 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특질과 기술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그 등급에 따라 대체 여부를 판명하는 자본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장 강한 생명력은 그 등급을 획득하기 위한 소모적인 경쟁이 아니라 비틀거리고 핍박받아도 거둘 줄 모르는 발걸음임을, 그리고 그 발걸음을 위한 도약대가 거뜬히 되어주는 연대와 사랑임을 깨달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이 늘 그래왔듯 부조리와 부도덕함과 비인간성으로 가득 들어찬 정신나간 세계를 누비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갈수록 명료해지고 단단해지는 의식으로 목적지에까지 이릅니다.
봉준호 감독은 매 영화에서 배우들의 새로운 진가를 꾸준히 발굴해 왔는데, 이번 <미키 17에서는 로버트 패틴슨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최근 몇년 간 믿음직스런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던 그였지만, 전형성을 벗어나면서 사실감과 활력을 한껏 불어넣는 봉준호 감독의 캐릭터 빌딩 능력과 만나 이 영화에서 그야말로 만개합니다. 우리가 알던 그의 목소리부터 완전히 없애버리며 미키의 소시민성을 구현한 것부터도 놀라웠지만, 그런 미키란 인물이 '미키 17'과 '미키 18'로 나뉘면서 미키의 각기 다른 면모들이 극대화된 듯한, 그래서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야 마는 섬세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사와 캐릭터, 유머와 메시지가 촘촘하게 얽혀드는 봉준호 감독의 세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서 손색없는 에너지를 보여주니 '봉준호 월드'의 새로운 주자로서 손색없겠습니다. 한편 미키의 연인이자 만능 요원인 나샤를 연기한 나오미 애키는 기대 이상의 강렬한 활약을 펼칩니다. '주인공의 연인' 포지션에만 결코 머물 수 없는, 자신보다 훨씬 소심한 연인을 나서서 이끌면서도 그의 가치를 변함없이 믿어주는, 강인하고도 사려깊은 '쾌녀'의 모습을 활력 넘치게 그려내죠. <플란다스의 개, <괴물, <마더, <옥자, <기생충 등 봉준호 감독의 여러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와 이를 연기한 배우들의 진가가 빛을 발한 사례들이 떠올랐는데, <미키 17의 나오미 애키는 그 뒤를 잇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한편 밉상스러우면서도 어떻게 보면 지극히 소심하고 비열한 보통 사람의 표상 같기도 한, 미키의 친구 티모 역의 스티븐 연 역시 봉준호 감독의 톤과 무척 잘 어울리는 생활 연기로 극을 풍성하게 합니다. 여기에 할리우드에서 연기로 한가닥 하는 두 배우인 마크 러팔로와 토니 콜렛은, 자꾸만 실존하는 국내외 대통령과 그 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우둔하고 과장되면서도 섬뜩하고 폭력적인 캐릭터를 신나게 재현하면서 미키와 그 친구들이 내내 헤쳐나가야만 하는 광기와 억압의 세계를 개성있게 만들어냅니다.
감독의 전작 <기생충이 워낙 전무후무한 수준의 걸작이었기 때문에 이후 어떤 영화가 나와도 이를 뛰어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키 17은 <기생충과 장르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상당히 다른 결을 지닌 영화인데다 기대할 만한 장르적 쾌감을 마음껏 선보이지도 않기에 아쉬운 지점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 기술도 없는 인간이 난데없이 히어로가 되는 것도 우습기에, 영화는 광대한 스케일의 우주 어드벤처라기보다 뒤뚱거리고 덜컹대는 우주 난장극에 가깝고, 음악이 드리우는 감수성처럼 스펙터클보다는 우스꽝스런 비애감을 끊임없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기생충 수준의 텐션과 얼얼한 충격에는 비할 바가 못되겠지만, <미키 17은 매끈하고 멋지게 걷는 인간이 아니라 삐걱대면서도 끝까지 돌파하고야 마는 인간이 서 있는 봉준호 영화의 풍미를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을 이전보다 더 부드러운 손길로 보듬고 있단 한들, 그 풍미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