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 이렇게 할머니가 됐지?”
흰 머리카락 하나가 눈에 계속 거슬렸다. 처음엔 햇빛 때문에 유독 밝게 보이는 건가 했는데 분명 그건 흰 머리카락이었다. 얼마 전에도 하나 뽑은 적이 있었지만, 그저 새치겠지 하며 넘겼는데 하필 같은 자리다. 그 말은 이게 그냥 새치가 아니라 정말 흰 머리카락이란 뜻이다. 세 살 위 남편도 몇 달 전부터 갑자기 눈이 뿌옇다고 호소했다. 설마 이 모든 증상이 노화의 시작인가 싶어 잠시 멍해졌다.
내가 노화,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기 시작한 건 이제 막 스물을 넘겼을 때였다. 내 실습 스케줄엔 신경외과 중환자실이 두 번 배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병동까지 포함해 신경외과 관련해서만 세 번의 실습을 배정받았다. 그곳은 주로 뇌수술 환자가 많았고,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매일 실습 시간 중 두 번은 바이털 사인을 재야 했는데 갈 때마다 환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나를 붙들어 종종 시간이 지연되곤 했다.
할아버지는 6.25 사변 이야기를, 할머니는 첫째부터 열째까지 아이 낳은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갈 때마다 똑같이, 하지만 매번 처음 하시는 것처럼. 그들의 아픈 이야기는 마치 영웅담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전쟁 때 가족이 죽었단 이야기에도, 열 명의 아이 중 더러는 병으로 죽었단 이야기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들의 몸에는 수분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난 그럴 때마다 ‘참 힘드셨겠어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찌 위로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날은 바이털 사인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할머니 한 분이 거울을 보며 혼잣말하시는 걸 듣게 됐다.
“내가 언제 이렇게 할머니가 됐지?”
참 이상하게 들렸다.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카지노 게임이 된 게 아닌가. 그런데 할머니의 눈빛은 마치 조로증을 앓는 사춘기 소녀처럼 영 모르겠다는 듯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어디 하나 말랑하지도, 촉촉하지도 않은 그들의 손목에서 맥박을 잡으려면 내 손가락에 모든 신경을 모아야 했다. 온도계를 물고 있는 입술은 만두 가장자리처럼 촘촘한 주름으로 모여 있었다. 한 번은 주삿바늘을 혈관에 꽂았다가 피가 나오지 않아 네 번이나 다시 찌른 적도 있었다. 제대로 혈관을 찾았다면 당연히 피가 얇은 관을 따라 흘러나와야 정상이었다. 죄송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책임 간호사를 불러 혈관을 잡았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피는 나오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가 물어보니 카지노 게임들은 원래 혈관을 잡아도 피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더욱이 상처가 잘 아물지도 않아 여러 개의 바늘 자국이 산발적으로 남아 있는 팔목에 가만히 손을 대어봤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묘한 서늘함에 한기가 들었다.
좀 더 가까운 노화도 보았다. 둘째 아이 돌잔치를 마치고 가족여행을 가던 중이었다. 쉰을 막 넘기신 아빠는 드넓은 캐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네.”
이제껏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나이 계산법이었다. 카지노 게임과 죽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순 없지만 죽음이 꼭 카지노 게임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래서 아빠의 계산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그 말이 주는 느낌이 내 감정을 서걱서걱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신께서 주신 시간에 감히 ‘좀먹다’란 표현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카지노 게임들의 기억엔 자꾸 알 수 없는 작은 구멍들이 뚫려간다. 자식의 이름도, 배우자와의 추억도 조금씩 좀먹어간다.
노화가 시작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그저 법적으로 지정해 노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만 육십오 세? 요즘 노인들은 칠순이 되어도 노인이라 불리기 싫어한다던데. 시니어의 기준도 점차 높아진다니 그것도 아닐 것이다. 흰머리, 노안, 각종 성인병이 올 때부터일까? 갱년기가 기준이 될 수 있을까? 혹은 생일을 챙기기 싫어질 때부터라던가 시간 흐름이 빨라지기 시작할 때부터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 속에 살고 있다고 느낄 때부터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탄생과 동시에 카지노 게임 거다. 죽음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질 뿐이다. 그 말에 근거하면 난 삼십팔 년을 꾸준히 늙어왔고, 드디어 흰 머리카락 하나가 나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티브이에서 구십 대 카지노 게임이 팔십 대 카지노 게임에게 화가 난 듯, 한 마디를 던졌다. 새파랗게 젊은 게! 그러니 내가 만약 늙는 것에 대해 다시 쓰게 된다면 그건 아마 오십 년 후는 넘어야 할 것 같다.